경남 합천 출신 근대 예술인으로 허민을 이름으로 지닌 이는 둘이다. 화가 허민(1911∼1967)과 시인 허민(1914∼1943)이 그들이다. 둘 모두 재능을 제대로 피우지 못하고 고난스럽게 살다 갔다. 산청군 단성에서 누대로 태를 묻다 갈라진 한집안이라는 점도 같다. 호를 예전이라 쓴 화가 허민은 삼가 덕촌에서 났다. 일찍부터 한학과 서화를 닦았다. 서울로 올라가 떠돌며 장승업을 닮았다는 세평을 얻었다. 호방한 재능이 예사롭지 않았던 셈이다. 쉰여섯 나이로 부산에서 세상을 떴다. 산과 어둠이 가로막는 골에/도까비불인 듯 반딧불만 나서느냐//이 길은 북으로 큰 재를 넘어야/경부선 김천까지 사뭇 백여 리//우중충한 하늘이라 북극성도 안 보이고/그 계집애 생각마저 영영 따라 오질 않어//이럴 땐 제발 듣기 싫던 육자백인들 알었더라면/소장수 내 팔자로 행(行)이 좋았으리라만//호젓한 품으로 스며드는 밤바람에/엊그제 그 주막 돗자리방이 어른거린다//너도 못난 주인을 따라 울고 싶지 않더냐/방울 소리 죽이며 걸어가는 이 짐승아//산턱엔 청승궂은 소쩍새 울고/초롱불 쥔 손등에 비가 듣는다.
- ‘야산로夜山路’
밤길을 걷는 소장수를 말할이로 내세워 산골 마을 풍속을 담았다. 작품에 깔려 있는 쓸쓸함과 고적함은 허민의 마음일 뿐 아니라, 그 무렵 겨레의 현실까지 암시한다.〈문장〉시 추천에 이어 허민은 1941년 소설 ‘어산금魚山琴’을〈문장〉에 보내 이태준의 추천을 받았다. 시와 소설 두 쪽에서 추천을 받는 희귀한 본보기였다. 1943년, 허민은 세상에 작품집 남기지 못한 채 원통한 요절을 맞이했다.
그러다 이름이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된 때는 1975년 《문학사상》의 〈한국현대문학재정리〉 자리였다. 여러 일간지가 그를 윤동주에 버금가는 민족 시인으로 소개했다. ‘허민육필시선’까지 나왔다. 그리고 또 십 년, 1986년 지식산업사에서 《한국현대시문학대계 23》을 내면서 나라잃은시대 마지막 빛나는 별 같은 시로 그의 작품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 뒤 허민 문학의 전모를 알리는 일은 한 과제였다. 다행스럽게 2009년 글쓴이가 《허민 전집》을 내 숙원을 푸는 한 계기를 마련했다.
오늘날 남아 있는 그의 작품은 시에서부터 어린이문학, 소설, 수필에 걸친 모두 328편이다. 스물아홉으로 삶을 마감한 청년이 얼마나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가를 잘 보여 주는 자취다. 그가 더 오래 재능을 펼쳤더라면 우리 문학은 얼마나 풍요로워졌을 것인가. 그를 중심으로 유엽․이주홍․최인욱․정종여와 같은 지역 예술인에서부터 나혜석․이기영․김범부․김동리․노천명․서정주로 이어지는 해인사 산중문학이 이채롭게 꽃피었다.
민족문학사에서 볼 때 허민은 피식민지 후기, 윤동주․남대우․심련수와 나란히 또는 더 위에서 청년문학의 기개를 지킨 이다. 해인사로서 그는 근대 대표적인 신앙 선조다. 그의 작품 거의 모두는 가야산의 정기를 받아 이루어졌다. 비록 대처승으로 살다 갔지만 한 시대 민족문학의 대들보였던 허민을 위해 해인사와 가야산이 할 일은 없을 것인가. 해인사 산문 바깥 어느 곳에 세워질 ‘야산로’ 시비 하나가 그 첫 걸음이라고 나는 믿는다.
아버지 유품을 어렵사리 간직해 세상에 알린 맏아들 허은도 곧 여든 객이다. 설날 아침, 서울 김포 아파트 한곳에서 그는 어두워가는 눈길로 남향 해인사 골짝을 향해 긴 향연을 아끼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 일도 몇 차례 남지 않았다. 피지 못한 함박꽃처럼 툭 져버린 허민과 근대 해인사 문학도 잿날 물밥처럼 흩어지고 말지 모른다. 가야산이 허민의 뜨거운 뼛가루를 다비의 불꽃으로 품어 주었던 때가 일흔두 해 전인 1943년 뻐꾸기 우는 봄이었다. 그의 시비가 해인사를 오가는 중생들을 뜨겁게 깨우칠 날은 또 언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