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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해인사와 허민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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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박태일 2015년 03월 397호
경남 합천 출신 근대 예술인으로 허민을 이름으로 지닌 이는 둘이다. 화가 허민(1911∼1967)과 시인 허민(1914∼1943)이 그들이다. 둘 모두 재능을 제대로 피우지 못하고 고난스럽게 살다 갔다. 산청군 단성에서 누대로 태를 묻다 갈라진 한집안이라는 점도 같다. 호를 예전이라 쓴 화가 허민은 삼가 덕촌에서 났다. 일찍부터 한학과 서화를 닦았다. 서울로 올라가 떠돌며 장승업을 닮았다는 세평을 얻었다. 호방한 재능이 예사롭지 않았던 셈이다. 쉰여섯 나이로 부산에서 세상을 떴다.
시인 허민은 본명이 창호다. 사천 곤양에서 삼대독자로 태어났다. 난 지 사흘 만에 스물셋 젊은 아버지를 섬진강 물에다 묻었다. 열아홉 청상의 어머니는 핏덩이인 허민을 안고 십여 년 친정살이를 굴렀다. 그런 뒤 해인사로 삶터를 옮겼다. 가사의 어려움에다 단명하리라는 아들의 명을 빌기 위한 일이었다. 1929년 열다섯 나이로 해인사로 들어온 허민은 1937년과 1938년 동아일보 진주지국 기자로 비운 일 말고는 가야산을 벗어나지 않았다. 1943년 스물아홉으로 이승을 뜰 때까지.
그런데 머물렀던 짧은 십여 년 세월 동안 그가 이룬 일은 매우 컸다. 무엇보다 해인사를 지역 근대 예능의 텃밭으로 이끌었다. 게다가 자신을 나라잃은시대 막바지 대표 문학인으로 들어 올리는 일에 진력했다. 그가 문학 수업을 본격적으로 닦기 시작한 때는 1929년 해인사 강원에 입학해 강사였던 시인 유엽을 만난 뒤였다. 유엽은 허민 어머니의 부탁으로 그의 강원 공부와 문학열을 북돋웠다. 허민은 강원을 마친 뒤 해인사 사설강습소 해명학원海明學院에서 교원으로 일했다.
1932년부터 불교와 같은 데에 드문드문 투고를 줄기던 허민은 1936년 매일신보 현상문예에 소설 ‘구룡산九龍山’이 당선하여 이름을 문학사회에 내걸었다. 스물두 살 청년문사로서 자긍심과 조숙이 마음껏 날개를 단 격이었다. 1938년 8월 지병이 깊어져 해인사로 되돌아온 뒤에도 허민 문학은 거침이 없었다. 1940년 11월 〈문장〉에 시 ‘야산로夜山路’가 스승 유엽의 추천을 받은 것도 그런 결과였다.

산과 어둠이 가로막는 골에/도까비불인 듯 반딧불만 나서느냐//이 길은 북으로 큰 재를 넘어야/경부선 김천까지 사뭇 백여 리//우중충한 하늘이라 북극성도 안 보이고/그 계집애 생각마저 영영 따라 오질 않어//이럴 땐 제발 듣기 싫던 육자백인들 알었더라면/소장수 내 팔자로 행(行)이 좋았으리라만//호젓한 품으로 스며드는 밤바람에/엊그제 그 주막 돗자리방이 어른거린다//너도 못난 주인을 따라 울고 싶지 않더냐/방울 소리 죽이며 걸어가는 이 짐승아//산턱엔 청승궂은 소쩍새 울고/초롱불 쥔 손등에 비가 듣는다.
- ‘야산로夜山路’

밤길을 걷는 소장수를 말할이로 내세워 산골 마을 풍속을 담았다. 작품에 깔려 있는 쓸쓸함과 고적함은 허민의 마음일 뿐 아니라, 그 무렵 겨레의 현실까지 암시한다.〈문장〉시 추천에 이어 허민은 1941년 소설 ‘어산금魚山琴’을〈문장〉에 보내 이태준의 추천을 받았다. 시와 소설 두 쪽에서 추천을 받는 희귀한 본보기였다. 1943년, 허민은 세상에 작품집 남기지 못한 채 원통한 요절을 맞이했다.
그러다 이름이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된 때는 1975년 《문학사상》의 〈한국현대문학재정리〉 자리였다. 여러 일간지가 그를 윤동주에 버금가는 민족 시인으로 소개했다. ‘허민육필시선’까지 나왔다. 그리고 또 십 년, 1986년 지식산업사에서 《한국현대시문학대계 23》을 내면서 나라잃은시대 마지막 빛나는 별 같은 시로 그의 작품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 뒤 허민 문학의 전모를 알리는 일은 한 과제였다. 다행스럽게 2009년 글쓴이가 《허민 전집》을 내 숙원을 푸는 한 계기를 마련했다.
오늘날 남아 있는 그의 작품은 시에서부터 어린이문학, 소설, 수필에 걸친 모두 328편이다. 스물아홉으로 삶을 마감한 청년이 얼마나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가를 잘 보여 주는 자취다. 그가 더 오래 재능을 펼쳤더라면 우리 문학은 얼마나 풍요로워졌을 것인가. 그를 중심으로 유엽․이주홍․최인욱․정종여와 같은 지역 예술인에서부터 나혜석․이기영․김범부․김동리․노천명․서정주로 이어지는 해인사 산중문학이 이채롭게 꽃피었다.
민족문학사에서 볼 때 허민은 피식민지 후기, 윤동주․남대우․심련수와 나란히 또는 더 위에서 청년문학의 기개를 지킨 이다. 해인사로서 그는 근대 대표적인 신앙 선조다. 그의 작품 거의 모두는 가야산의 정기를 받아 이루어졌다. 비록 대처승으로 살다 갔지만 한 시대 민족문학의 대들보였던 허민을 위해 해인사와 가야산이 할 일은 없을 것인가. 해인사 산문 바깥 어느 곳에 세워질 ‘야산로’ 시비 하나가 그 첫 걸음이라고 나는 믿는다.
아버지 유품을 어렵사리 간직해 세상에 알린 맏아들 허은도 곧 여든 객이다. 설날 아침, 서울 김포 아파트 한곳에서 그는 어두워가는 눈길로 남향 해인사 골짝을 향해 긴 향연을 아끼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 일도 몇 차례 남지 않았다. 피지 못한 함박꽃처럼 툭 져버린 허민과 근대 해인사 문학도 잿날 물밥처럼 흩어지고 말지 모른다. 가야산이 허민의 뜨거운 뼛가루를 다비의 불꽃으로 품어 주었던 때가 일흔두 해 전인 1943년 뻐꾸기 우는 봄이었다. 그의 시비가 해인사를 오가는 중생들을 뜨겁게 깨우칠 날은 또 언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