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기2015년, 음력으로 치면 을미乙未 양羊의 해다. 신년벽두부터 여기저기 불려 다니기도 하고 불러내기도 하다가 문득 돌아보니, 그 단 새 새해 첫 달이 중순으로 들어선다. 열흘 간 무얼 했나 돌이켜보니 여전여상 구업만 저지른 듯하다.
살아갈수록 가장 무서운 일 두 가지가 자연의 이법인 무상無常과 사람의 일인 구업口業이라는 생각이 절실해진다. 시간 가는 것을 필두로 지나가는 온갖 것이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불변의 진리는 무상 하나뿐이라는 대각의 가르침이 실감으로 다그니 오싹해진다.
보시도 공덕도 그렇다. 지상에 쌓인 들리고 보이는 공덕치고 변하고 사라지지 않는 것 없다. 그래서 유루공덕이다. 영혼을 따뜻하게 하는 공덕이 무루공덕이라지만 나 같은 범부에, 말과 글이 없으면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일개 소설가에게는 그것이 살갑게 다가오지 않는다.
들리고 보이는 공덕 구체적 보시마저도 여차하면 욕으로 돌아오기 십상인데,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공덕이 의식주마저 해결되지 않은 황폐한 중생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갈 수 있을까?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말로써 들리게 하고, 글로서 보이게 하고, 말과 글의 유기적 결합인 말글로 동시에 들리고 보이게 하는 것일진대, 말하기, 글, 말글 쓰기마저도 구업 쌓기라는 생각으로 두렵기만 한 것이 요즘의 나다.
인생에서 한번 쌓아두면 덜 변하는 것, 천천히 사라지는 일이 무엇일까? 한참이나 생각한 끝에 독서라는 결론을 내린다.
지상의, 들리고 보이는 양식 치고 방정맞을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사라지지 않는 것 없다. 유루공덕의 변화와 사라짐에 막상막하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독서에 대한 열정과 저력과 독서량까지 많은 문학적 도반들, 시인작가와 독자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간간히 보여주는 독서노트는 완벽하다. 시의 경우는 작품 단위로, 소설은 줄거리를 요약하면서 명구를 골라서 기록한다. 수필은 요점정리다. 이런 시인작가가 있는 한 우리나라 좋은 나라의 문학, 희망 있다.
많이 읽고 많이 쓰는 문인은 생각을 억지로 짜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 구양수歐陽脩의 독서관이고 창작관이다. 당연히 역설이다. 그러나 당송팔대가 이전에 송나라 최고의 독서가로 손꼽히는 그의 주장이기에 실감이 난다.
한 권의 책도 읽지 않고도 우주의 근본과 인간의 본질까지 규명하고 기록할 수 있는 천재도 있다지만, 아니다.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사견이다. 개인의 사고와 지식이란 지극히 일천하므로, 스승과 현자들의 것을 받아들여 갈고 닦아 자신이 것으로 만들어야 비로소 넓어지고 깊어진다.
고전과 명작 읽기를 통하여 보편적 지식과 지혜를 쌓은 후에야 자신의 사고와 지식과 지혜로 발전시킬 수 있다. 구양수가 사갈시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왜 다독多讀 다작多作 뒷자리에 다 상량(商量 생각의 중국식 한자)을 두었을까? 조금 읽고 조금 아는 것을 많이 읽고 많이 아는 줄 착각하는 분들 때문 아닐까?
많이 읽고 많이 쓰는 시인작가는 지식과 지혜뿐 아냐, 말글의 무랑무변을 안다. 어떤 말 어떤 글도 받아들인다. 그런 자세가 되어있다. 그러나 흉내 내기 정도로 읽고 쓴 문인은 자신이 아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닌데, 조금만 벗어난 말이나 글을 만나도 흥분한다. 대갈일성에 삿대질은 기본이다. 구업의 극치다.
구양수가 아니라도 걱정스러운 일이다. 차라리 읽지 않고 스스로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문인이 낫다. 두 귀로 듣고 가슴에 담을 줄 아니까. 타고난 감수성만으로도 정직한 작품이 되니까.
읽기와 쓰기는 기능이다. 일정수준에 이르면 개인차가 나기 시작한다. 이십대의 독서지수가 평생을 가는 이유다. 구업 짓기로 말하면 이십대까지 만화나 무협지만 읽은 분은 평생 거기까지라는 뜻이다. 등단작가로서 본격적인 말글을 쓰기 전에 고전과 명작을 섭렵하라고 사정사정해가며 가르치는 이유다.
듣기와 말하기는 자세고 인격이다. 말의 연계 중 선행인 정확하게 듣기, 후행인 올바르게 말하기가 되는 분이 말을 잘하는 분이고 인격자다. 듣기만 하고 말하기를 아끼는 분은 이기적이다. 듣지는 않고 말하기만 하는 분은 손해 보면서도 손해인 줄 모른다. 말의 반만 하는 분들이다. 듣기도 말하기도 되지 않은 사람은 불구다.
해인사에 관한 아픈 추억으로 마무리다. 초등학교 입학 전 아버지 따라 처음 가 본 해인사, 그리고 계곡과 숲, 물소리 무시무시했고 숲은 마왕의 유혹소리가 들려오는 듯 스산했다. 거기서 아버지와 손잡고 다니는 이상한 아줌마가 나를 아프게 했다. 어머니에게 일러바치지 못한 것, 침묵이 구업일 수도 있다는 생생한 증거다.
해인사 신혼여행, 순전히 젊지도 늙지도 못한 신랑 탓이었다. 그것이 마냥 미안하고 아픈데 아내는 이날 입때껏 내색하지 않는다. 외국으로 신혼여행 갔다 온 두 동서와 시누이의 여행담에 박수까지 보탠다. 정 구업이 필요 없는 모습이다. 그것이 아프기만 하니 내 정서가 병든 탓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