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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는 님께 묻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시절이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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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리포트 - 해인 편집실 2015년 01월 395호
가야산에 울려 퍼지는 북소리가 허공을 맴돕니다. 허공이 더 넓어졌습니다. 가야산의 품이 더 넓어졌습니다. 오시었으니 스님께서도 돌아가시는군요. 언젠가는 가실 줄을 모르진 않았지만 갑작스럽습니다. 스님의 세수 올해로 90, 졸수(卒壽)이셨군요. 적은 세수는 아니지만 오래 머물기를 바랐던 마음이었는데, 가실 때는 이리 허허롭게 가시는군요. 헛헛합니다. 낙엽 떨군 겨울길이 더 스산합니다. 아침의 햇살도 바스락거림을 저어합니다.

두 손 모아 향 피워 올리며 큰 절 올립니다. 도림당 법전(道林堂 法傳) 대종사님 영전에 두 손 모아 향 피워 올리며 큰 절 올립니다. 스님, 이제 누구에게 길을 물어야 하는지요. 영전의 사진을 보며 다시 스님을 떠올려 봅니다. 누가 스님의 행적을 묻거든 스님 생전에 정리해두었던 대로 다음과 같이 전하려 합니다. 아마 스님께서는 괜한 짓이라고 손을 내저을 줄은 알지만, 남은 이들에게 이정표가 될 것이 분명한 까닭입니다.

스님께서는 1925년에 음력 12월 8일 전남 함평군 대동면 연암리에서 김해김씨 시중공파(侍中公派) 원중 청신사와 경주최씨 호정 청신녀의 삼남일녀 중 셋째 아들로 출생했습니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했고, 1938년 14세 때 장성 백양사 청류암으로 출가했습니다. 1941년 17세 때 영광 불갑사에서 은사 설제(雪醍) 스님, 계사 설호(雪浩) 스님으로 수계득도 하였으며, 백양사 강원에서 수학한 후, 해방 전 만암스님의 고불총림 결사에 동참했습니다.

1948년 24세 때 문경 봉암사 결사를 통해 성철스님을 만나면서 본격적인 참선공부의 길로 들어섰고, 성철스님이 1951년 통영 안정사 천제굴에서 도림이라는 법호를 내렸습니다. 1956년 문경 대승사 묘적암에서 득력(得力)한 뒤, 1957년 33세의 나이에 대구 파계사 성전암에서 성철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습니다. 이후 제방 수행처의 정진대중들은 스님께 \'절구통 수좌\'라는 별호를 붙여 주었다. 1969년 45세 때 퇴락한 김천 수도암으로 거처를 옮겨 가람 중수와 선원 복원을 통해 많은 납자들을 제접했으며, 2006년 대구 팔공산에 도림사를 창건하여 대가람으로 일구었습니다.

봉암사 결사는 반세기가 넘은 일이지만 우리 종단의 지남입니다. ‘부처님 법대로 살자’고 했던 간명한 구호가 말해주듯 실타래처럼 얼킨 현실의 문제를 단칼에 자르라는 가르침으로 남습니다. 아쉽게도 후학들이 선뜻 일어서지 못함이 안타깝습니다. 당시 수행과 일상의 지침으로 삼았던 ‘공주규약(共住規約)’ 또한 성성한 가르침입니다. ‘삼엄한 부처님 계율과 숭고한 조사의 유훈을 부지런히 닦고 힘써 실행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원만하고 빠르게 이를 것을 기약한다. 어떠한 사상과 제도를 막론하고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 이외의 사견은 절대 배척한다’는 대원칙을 세우고 ‘생활에 필요한 물품의 공급은 자급자족의 원칙에 따른다. 물 긷고, 나무 하고, 밭에 씨 뿌리며, 탁발하는 등 어떠한 어려운 일도 사양하지 않는다’ ‘소작인이 내는 사용료와 신도들의 특별한 보시에 의한 생활은 단연히 청산한다’ ‘부처님께 공양을 올림은 열두 시를 지나지 않으며 아침은 죽으로 한다’ ‘앉는 차례는 비구계 받은 순서로 한다’ ‘방 안에서는 늘 면벽좌선하고 잡담을 절대 금지한다.’ 스님은 그리 가열차게 정진하셨습니다.

1967년 해인총림이 설치되면서 해인사와 인연을 맺고, 1969년 유나(維那)소임을 맡아 초기 총림의 법도를 세웠습니다. 1984년 해인총림 수좌(首座) 소임을 맡았으며, 그뒤 주지, 부방장을 맡았습니다. 1996년부터 현재까지 방장(方丈)으로서 영일(寧日)이 없었습니다. 가람 수호와 총림대중의 화합을 통해 수행가풍 진작에 진력했습니다. 선승으로써 매일 108배와 화두참선을 삶의 지남으로 삼았습니다. 1981년 대한불교조계종 종회의장, 1982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2000년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2002년 조계종 11대 종정, 2007년 12대 종정으로 추대되어, 10년간 대임을 원만하게 회향했습니다. 종정을 두 번 역임하셨던 일은 오래도록 우리 가문에 회자될 것입니다. 스님의 뜨거운 수행가풍과 원만한 성품이 아니고서는 어찌 가능했겠습니까. 화합중이 우리 불문의 또다른 이름인데, 스님은 그리 하셨습니다.

2003년 <백천간두에서 한걸음 더>라는 법문집을 통해 간화선을 두루 선양하셨고, 2009년 자서전 <누구 없는가>를 출간하여 스님의 진솔한 삶과 수행 흔적을 세인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2002년이 해인사 개산 1200년이었습니다. 이에 스님은 법어를 내리시기를 “앞으로는 천 년이요 뒤로는 만년이니, 영원토록 법등(法燈)을 이어갈 도량이어라”라 찬탄하시고는 “절을 세우기는 쉬우나 지켜가기는 어렵고 건물을 채색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마음을 단청하기는 쉽지 않도다. 중건과 중창을 거듭한 고인들의 노고와 정법안장을 이어온 선지식의 법은을 항상 잊지 말고, 후학들은 수도와 교화 그리고 가람수호에 불방일하여 불조께서 베풀어준 1200년 은혜에 보답할지어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스님의 말씀을 새기며 도량을 다시 살핍니다. 어찌 해인사만이 도량이겠습니까. 중생들의 삶터가 도량임을 되새깁니다.

2014년 12월 23일(음력 11월 2일), 별처 삼아 머물던 대구 팔공산 도림사 무심당(無心堂)에서 원적에 들었습니다. 법랍 73년, 세수 90세였습니다.

해인사 퇴설당 경상(經床) 서랍 속에는 임종게가 남겨져 있었습니다.

산색수성연실상 山色水聲演實相
만구동서서래의 曼求東西西來意
약인문아서래의 若人問我西來意
암전석녀포아면 巖前石女抱兒眠

산빛과 물소리가 그대로 실상을 펼친 것인데
부질없이 사방으로 서래의를 구하려 하는구나
만약 어떤 사람이 나에게 서래의를 묻는다면
바위 앞에 석녀가 아이를 안고 재우고 있구나

평소 고구정녕하셨던 말씀이 새삼 떠오릅니다. 스님이 남기신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의 한쪽을 펼칩니다. 얼마 있으면 새해입니다. 스님께서는 새해마다 법문을 내려주셨는데, 10년 전 스님께서는, “천지가 열리기 이전/ 신령스럽고 찬란한 빛이 있어/ 만물의 아름다운 덕성과 차별 없는 지혜를 빚어내어/ 새 아침 시방세계를 장엄하니/ 모든 마왕은 호법의 신선이 되고,/대지는 변화하여 진불의 국토를 이루니/ 처처가 화엄세계요 두두물물이 진리의 몸을 이룹니다”고 축복하셨습니다. 새해를 가슴 뛰는 기대감으로 맞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법문 말미에서는 누군들 화들짝 정신이 바짝 들게 하는 말씀을 놓으셨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시절이온지요?

직언은 끽철주요 直言 喫鐵鎚

진청은 무이라 眞聽 無耳

직시현금이요 갱무시절이라 直是現今 更無時節

곧은 말은 쇠망치를 맞는 것이요

진실로 듣는 것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구나.

바로 지금이지

다시 시절이 있는 것은 아니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