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조정 인물의 반이 이곳에 있다_차소위석면반조정자此所謂石面半朝廷者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보장천추寶藏千秋 - 종현 2014년 12월 394호
홍류동 계곡에는 수없이 많은 글들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홍류동의 풍광을 노래한 시, 방문내용을 적어놓은 기록, 각각의 지명, 방문 기념으로 새긴 이름 등 수도 없이 많은 석문이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 홍류동은 유가儒家의 성지이자 시인, 묵객들이 필수적으로 참배해야 하는 순례성지였다. 유가儒家, 도가道家의 종조이자 우리나라 문인의 시조로 추앙받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천년 전 가야산으로 들어 마지막 여생을 보냈기 때문이다.
조선 초의 화가이자 문신인 강희맹은“이런 곳에 이름이 없으니 어찌 시인이나 글 쓰는 이들의 부끄러움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을 정도로 홍류동은 선비들에겐 최우선 순례지였다.

스님들이 석각수石刻手로 참여
옛 기록을 보면 많은 선비나 관료들이 가야산을 찾아 바위에 이름을 남기고 방문소회를 쓰거나 목판으로 새겨 해인사에 걸어두었다.
그러한 것을 쓰고 바위에 각을 하는 일을 스님, 혹은 각수들이 하였던 것 같다. 우선 글을 알아야 하고 자획을 정확하게 쓸 수 있어야 바위에 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스님들이 담당할 수밖에 없었으며 각을 하며 받은
돈은 사중 불사와 살림에 썼던 것으로 보인다. 요즘으로 치면 기와불사나 단청불사 정도로 성행했던 불사였던 것 같다.
치인리 주민에 의하면 1970년대까지 홍류동 계곡 곳곳에 암벽을 타면서 이름을 새겨주는 직업이 있을 정도로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일은 보편적이었던 것 같다.
이마도 1972년 가야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후 환경보호 차원에서 바위에 각을 하는 일은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사라진 듯 보인다.
선비들의 기록인《유가야기》에는 이름 새기는 것에 대한 상반된 의견을 볼 수 있다. 1725
년에 기록한 선비 정식의《가야산록》에 보면, “해환海環이란 승려가 있었는데, 바로 새기는 일을 주로 하는 승려 각승刻僧이다. 나의 당호와 성명을 홍류동의 바위 면에 새기었다.
장차 다람쥐가 밟고 다니며 이끼가 침범하여 마침내 없어질 것이니, 이름을 쓰지 않은 사람
과 더불어 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라고 기록하였다.
반대로 이름 남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 이들도 있었다.
《유가야산록》을 쓴 유학자 이호윤은 홍류동의 바위에 새겨진 이름들을 보고‘돌 면에 조정 인물의 반이 다 있다此所謂石面半朝廷者’라고 하고는,

개시홍진객皆是紅塵客 모두가 세속의 사람들이거늘
청산응속지靑山應俗之 청산도 응당 속되게 여기겠지
오시청한사吾是淸閑士 나는 청한한 선비이니
불명유자지不名猶自知 이름을 안 새겨도 절로 알아주리라

라고 하였으며 영재 이건창은 이들 제명을 보고‘금고유인제성자今古遊人題姓字 다어팔만대장경多於八萬大藏經 고금에 노닌 사람의 이름이 팔만대장경보다 많구나’라고 한 뒤,

대서심각경루루大書深刻競累累 큰 글씨 깊이 새긴 이름 다투어 즐비한데
석괴태전수복지石壞苔塡誰復知 돌 부서지고 이끼 끼니 누가 다시 알까
일자부제최치원一字不題崔致遠 한 글자도 적지 않은 최치원은
지금인송칠언시至今人誦七言詩 오늘까지 사람들이 칠언시를 외우네

라고 하며 새기는 것을 하지 않았다.
바위에 행적을 남기는 것을 두고 각자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수백년이 지난 지금은 그것이 역사가 되고 문화가 되고 예술이 되어 새로운 기록문화로 우리에게 전해오고 있다.

바위에 세긴 기록들은 홍류동 전반에 걸쳐 널려 있지만 크게 보면 세 곳으로 나눠볼 수 있다.
첫 번째가 최치원의 둔세시가 기록돼 있는 농산정 주변이다. 이 농산정 주변에는 돌에 작품을 남긴 어느 예술가의 작품처럼 느껴질 만큼 방대하고 아름답다. 특히 계곡 안쪽 넓은 물 건너편 바위 환선대喚仙臺에는 수십명의 이름이 쓰여 있어 이호윤은 이를 보고‘조정 인물의 반이 여기에 있다’라고 감회를 남겼을 정도이다. 홍류동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도 있지만 대부분 관직과 이름을 기록한 것이 많으며 탑 혹은 부도 형태의 문양에 이름을 새긴 추모비 형태의 석각도 있어 눈길을 끈다.

두 번째 장소는 홍류동 16명소 중 절경 여러 곳이 모여 있는(분옥폭, 완재암, 광풍뢰, 제월담) 취적봉이다. 취적봉은 도롯가에 하늘을 찌를 듯 웅대하게 서 있으며 차를 타고 오가면서 늘 지나치는 곳이다. 이 취적봉은 신선이 남쪽을 향해 피리를 부는 모양의 바위라서 이름이 붙여졌다. 취적봉에는 암각문을 바위에 어떻게 새겼는지 짐작할 수 있는 밑그림이 지금도 남아 있다. 바위에 각을 하기 위해 붓으로 글을 써 놓았는데 무슨 사연으로 각을 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붓자국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바위에 붓으로 글을 쓰고 그곳에 정으로 선을 따라 새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 번째 장소는 깎아지른 절벽에 봄바람, 가을비에 춘초화春草花 추풍옆秋風葉이 계곡을 붉게 물들이는 낙화암이다.
창애고각蒼崖古刻이란 말이 떠오를 정도로 절벽에 수많은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절벽이기에 멀리서 그저 바라볼 뿐이지 저런 곳에 어떻게 새겼을까 그저 감탄할 뿐이다. 1970년대까지 벼랑에 밧줄을 타고 내려와 글을 새겼다고 하는 곳이 낙화담이며 마치 고층빌딩의 유리를 닦는 모습이 연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