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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법기암 감원 대훈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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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정영 2014년 12월 394호
법기암 마당에 서니 허공에 머무는 것만 같다. 구름 지나가니 하늘과 땅이 구분되지 않는 듯 한데 고개 들어보면 능선이 그저 무심히 선을 그을 뿐이다. 해발 800m의 이 산중에 대훈 스님은 오늘도 고요히 앉아 계시다.
“가야산의 기상이 좋아서 다음 생엔 꼭 해인사 큰절로 공부하러 간다고 말하곤 했어요. 그런데 운 좋게도 생을 바꾸지 않고 가야산에 인연을 맺었지요.”15년 전에 은사스님께서 사주신 터에 집을 짓고 이것을 법기암이라 하였다. 금강산에서 항상 설법을 하고 있다는 법기보살이 해인사에 모셔져 있기도 하거니와 대훈 스님도 32년간 절에서 살았으니 이제 법을 일으켜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란다. 스님이 지금의 터를 해인사에 기부하고 집을 지은 후 머물러 앉은 게 3년이 되었다.
“출가할 때 불법승 삼보에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기부하는 게 뭐가 어렵겠어요. 내게 재산이 없다는 게 참 홀가분해요. 이 집 지으면서도 내 집이란 생각은 한 번도 안했어요. 새가 날아가다가 어디든 앉으면 자기 자리이듯 누구든 깃들면 그 사람의 것이지요.”
스님은 강원을 졸업하고 줄곧 선방에서 참선만 하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이곳에 오니 이제야‘내 자리’에 왔다는 생각, 마치‘고향’에 온 듯한 느낌이란다.“본래 내 안에 부처가 있는데 내가 그걸 무시하고 엉뚱한 데서찾으려고 했구나 싶어요. 아무리 구하려고 해도 채워지지 않았는데 이곳에 와서 마음을 내려놓으니 이제야 채워진 느낌이에요. 그걸 몰랐던 거죠. 이곳이 내 자리이더라고요. 이제 여기서 죽을 때까지 부처님의 은혜를 갚아 야지요.”
처음엔 신도들이 없기도 하거니와 이 도량이 어떤 색깔을 가져야 좋을지 몰랐다. 스님이 선방에 다녔다고 해서 신도들에게 참선만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님은 2년 동안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올봄부터 이 깊은 산중에서 법회를 시작했다. 처음엔 여섯 명을 앉혀놓고 시작했으니 다섯 명을 앉혀놓고 한 부처님보다 낫다고 위안하며 웃었다. 그런데 법회가 입소문이 나면서 신도들이 점점 늘어났다. 한 달에 한 번 매주 첫째 토요일에 하는 법회를 보러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대구에서도 오고 경주에서도 온단다.
“해인사가 크니까 신도님들이 절에 가서 일해주는 게 목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법당에 가서 수행할 생각은 안해요. 그런 신도님들을 깨어나게 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자기 수행을 할 수 있게 유도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와서 위패단을 만들라는 말도 자주 한다. 그러나 대훈 스님은 위패를 모실 생각은 없단다.
“난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게 하고 싶어요. 돌아가신 분들은 다른 스님들이 다 해드리니까 나는 산 사람을 깨우려고 해요.” 법회 때는 기초교리를 비롯해서 경전 독송도 하고 백팔참회도 한다. 해인사 암자 중에 기초교리를 가르쳐 주는 곳이 전혀 없으니 법기암의 색깔이 된 것이다. 이것은 대훈 스님이 2년 동안 그 무엇도 강요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신도들이 무엇을 원하며 또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포교당에 가서 교리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좋은 산속에 와서 좋은 공기 마시고 좋은 풍경 보면서 공부도 해가니 더 좋지 않겠어요? 그러면서 같이 음식도 나눠먹고 이야기도 나누고. 신도들이 도심 포교당은 학교 가듯이 가지만 여기는 소풍 오듯이 와요.”
스님은 신도들에게 여러 가지 수행법을 가르쳐주려고 한다. 그래야 근기에 맞는 것을 선택할 수 있으니. 그리고 이제부터는 신도들과 천천히 참선도 해볼 생각이다.“우리가 바닷물을 배부르게 다 마셔야 짠 맛을 아는 게 아니라 찍어 먹어만 봐도 짜다는 것을 알잖아요. 그렇듯이 신도들이 잠깐이라도 앉아서 참선의 맛이라도 볼 수 있게 하려고요.”
대훈 스님은 22살에 출가해 양산 내원사에서 행자생활을 하고 운문사 강원을 졸업한 후에 내내 선방만 다녔다. 처음에 선방에 다닐 때는, 이 길을 끝까지 가야하는 걸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그러다가 33살이 되던 해엔 몸 바쳐서 해보자는 생각으로 내원사 3년 결사에 들어갔다. 그러고 나와서는 이 공부가 아니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은그렇게 흔들릴 때마다 계속해서 재발심을 하며 정진해왔다. 그래서 대훈 스님은 후배들에게 의심하지 말고 무조건 정진하라고 한다. 불투명한 미래를 걱정하느라 시간만 보내지 말고 무조건 해봐야 그것이 짠 맛인지 단 맛인지 알지 않겠나 하신다.“현실에 충실해서 열심히 정진하면 돼요. 그러면 그 정진의 힘으로 그 힘의 크기에 맞는 인연들이 모여들어요. 특히 수행자들은 미래 걱정할 것 없어요. 수행하기 위해서 출가했는데 수행은 뒷전이고 노후를 위해 뛰고 있다면 얼마나 허망해요.”자기 스스로가 강해져야 한다는 말씀이다. 지금 대훈 스님이 깊은
산중에 앉아 있는데도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것은 그 정진의 힘이 아닐까.
지금껏 부처님이 최고의 길이라고 한 길을 따라 묵묵히 걸어왔기 때문이 아닐까. 이곳 법기암에 오기 전에도 운문사 문수선원에서 4년간 도감을 살고 약수암 선방에 가서 5년간 입승을 살다가 왔으니, 대훈 스님은 한 번도 다른 길로 간 적이 없는 것이다.
“한 번도 대중을 여의어 본 적이 없어요. 복이지요.”
스님이 40세가 되던 해엔 해제를 하자마자 밤비행기를 타고 혼자서 인도에 갔다. 거기서 기차를 타고 가다가 어느 날 밤에 기차역에 도착했는데 사람들이 길에 누워서 잠을 자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됐다. 그것을 보자 사람의 세계가 아닌 동물의 세계라는 느낌이 들면서 끝없이 눈물이 흘렀다. 스님은 바로 보드가의 대탑으로 갔다.
그 앞에 서자 그 옛날에 이곳에서 계셨을 부처님의 기운이 느껴졌다. 부처님이 그리워서 또 끝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래서 스님은 그곳에서 21일 동안 낮엔 오체투지를 하고 밤엔 보리수 아래 앉아 정진을 했다. 하루에 두 시간 자고 한 끼만 먹으며 그렇게 또 재발심을 했다.“보드가의 대탑에서 확실하게 부처님을 믿게 됐어요. 그 기운을 느끼고 부처님도 나와 같은 인간이구나, 그러니 나도 부처님처럼 될 수 있구나 믿게 된 거죠. 태풍이 불어서 나무가 흔들리면 나무가 뿌리를 더 깊이 내리듯이 수행자도 그와 같아요. 그때 결심했죠.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여기서 발을 빼지 않으리라.” 그러면서 부처님께 애원했다. 한국에 돌아가서 선방에 앉았을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조금만 앞으로 밀어달라고. 그런데 인도에서 돌아와 선방에 가니 정말로 그 힘이 느껴졌다. 그러니 자신감이 생겨서 얼마든지 정진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떤 일이든 경계를 맛보고 넘어지고 부딪치면서, 거기서 힘을 얻어야 해요. 특히 참선은 더해요. 고행은 어차피 평생 안고 가야 하는 거니까.”그래서 스님은 그때 부처님이 태어나신 나라에 자신을 던져놓고 싶었단다.
죽을지 살지도 모르면서, 그 안에서 스스로 힘을 얻게 될지 아닐지도 모르면서.
“수행자는 부처님 법을 지키기 위해서 있는 게 아니에요. 내 안의 부처라는 금광을 캐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그러니 모든 것을 견뎌야 하는 것이지요.” 젊은 시절엔 아만我慢이 세서 힘들기도 했단다. 속가에 있을 때는 식구들에게 아버지, 어머니, 언니, 오빠라는 호칭을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단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참 불효라는 생각이다.“지금은 지나가는 개한테도 어머니라고 부르라면 그럴 수 있는데, 그땐 왜 그걸 못 했나 몰라요. 전생에 수행을 안했나 봐요.”
출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번은 은사 스님께 여쭌 적이 있단다. 부처님께서는 평등을 말씀하셨는데 왜 절집은 수직관계여서 나를 똑같은 수행자로 대해주지 않느냐고. 그러자 은사스님께서는 대훈 스님의 뺨을 때리셨다. 역시나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럽단다.“지금 내가 마음이 편안해진 게, 그때 내려놓지 못했던 것들을 이젠 내려놓았기 때문이에요. 옛날 같으면 누가 와서 물 한 잔 달라고 하면 가서 떠먹으라고 했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물을 달라고 하기도 전에 떠다 먹여줘요. 그게 나를 편하게 하더라는 거죠.”
그래서 스님은 신도들에게도 다 내려놓으라고 다 비우라고 늘 말씀하신다. 비우지 않으면 아무 것도 들어오지 못하니, 비울수록 채워지니. 그래서 많은 이들이 법기암에 찾아와 비워서 편안해지기를 스님은 바란다.
지금 법기암의 터는 본래 갈대밭이었는데 거기엔 수많은 새들이 살았단다. 본래 새들이 앉을 때는 함부로 아무 데나 앉지 않고 앉을 자리를 살피고 앉는단다. 그렇게 수많은 새들이 깃들던 자리이니 법기암은 누구든 와서 내 집인 양 깃들어 머물다 가는 집이 아닐까. 그렇게 수많은 이들이 찾아오지 않을까. 그때에 스님은 어떤 모습 일지 여쭙자 대뜸 말씀하신다.“난 바위처럼 있어야지요. 새들이 앉았다 가든 날아가다 똥을 싸든 벌이 날아와서 집을 짓든 다 받아들이면서. 그 자리에 박혀서 세월이 가면 이끼가 끼듯이 나도 이끼가 끼면서. 내 생명이 회향하는 날까지 여기에서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원이 하나 있다면 법기암 뒷터에 사부대중 선방을 짓는 것이란다. 비구 비구니 스님을 막론하고 수행을 하고 싶으면 누구든 찾아와도 좋은 집.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 이루어진대도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대훈 스님은 그런 원을 세워본단다.“원을 세운다는
건 기도하는 일인 것 같아요.”
어느새 능선의 하늘자락이 저녁 빛으로 물들었다. 대훈 스님은 구름이 머무는 바 없이 사라진 그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시며 말씀하신다.
“한 생각만 하며 살아온 게 일생에 제일잘한 일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