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실로 오랜만에 해인총림을 찾았다. 우리나라 고건축에 관한 영상 작업을 위해 해인사의 사계절을 카메라에 담기로 했기 때문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물을 궁궐, 사찰, 정원, 민가 등 몇 가지 카테고리로 분류하고 전문가들이 이모저모를 따지며 선정 작업을 벌였다. 대한민국에서 뛰어난 건축학적 가치를 지닌 건물들이 어디 열손가락으로만 꼽을 수 있겠냐마는 여러 가지 요소를 감안하여 넣고 빼는 과정을 거듭한 끝에 최종적으로 정리된 장소가 창덕궁, 종묘, 수원화성, 해인사, 통도사, 불국사, 선암사, 양동마을, 도산서원, 소쇄원 등 10군데였다.내가 해인사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20여 년 전인 1993년이었다. 그때 나는 신문기자로 성철 스님 다비식을 취재했었다. 그 전까지 해마다 한두 번 씩은 해인사를 들락거렸지만 93년이 마지막이었다. 성철 스님 다비식 당시 전국에서 몰려든 불자들로 인해 가야산으로 향하는 길은 수많은 차량들이 엉키면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날 하도 고생을 해서인지 그 뒤로 해인사 근처에 갈 일이 있어도 에둘러 피해다니곤 했다.
초여름 오랜만에 찾아간 해인사는 많은 것이 뒤바뀌어 있었다. 진입로의 구조도 달라지고 낯선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으며 새로 자리를 잡은 조형물들은 절집의 분위기와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어 내 눈에 많이 거슬렸다. 옛날 분위기를 잃어버린 백련암 등 암자들의 모습도 아쉬웠다. 특히 두 개의 나무 기둥이 석축 앞에 세워져 암자의 무게를 감당하던 모습이 일품이었던 희랑대의 나무 기둥이 없어지고 하얀 대리석이 깔려져 정말 안타까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세월은 흐르고, 사람들은 점점
많이 몰려들고, 모든 사물이 옛날 모습 그대로 남아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이번에 해인사의 4계절을 기록하는 영상작업은 초고화질 영상 기록방식인 4K UHD 기술로 진행되었다. 건축물들의 규모가 워낙 크고 방대하므로 지미집, 전동슬라이더, 무인 헬리캠 등 다양한 장비를 투입하여 촬영을 진행하기로 했다. 해인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이고 전 국민의 관심이 쏠려있는 장경판전이 같이 붙어있는지라 대규모 장비 투입에 상당히 조심스러웠으나 사찰 측에서 이번 작업의 가치를 의미있게 생각하여서인지 큰 어려움 없이 촬영 허가를 내주었다.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자연스럽게 음향에도 욕심이 생겨 절집에서 나오는 좋은 소리를 잡아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낮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들고 인근 사천 비행장에서 이륙한 군용기들의 소음 때문에 좋은 소리를 잡아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밤의 해인사는 또 다른 세계였다.
새벽 3시. 들릴 듯 말 듯 시작된 청아한 도량석 소리가 은은하게 절집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간다. 대적광전 앞 삼층석탑에 작은 달이 걸려있고 가야산 하늘에는 셀 수 없는 별무리가 뿌려져 있다. 여기가 낮 시간 동안 그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들던 바로 그곳이었던가. 바로 이어서 시작되는 법고가 새벽의 가야산을 뒤흔든다. 범종과 목어를 거쳐 운판의 음이 여운을 마칠때까지 정신없이 카메라를 돌렸다.
사중 사물四物(범종, 법고, 목어, 운판)의 감동과 함께 새벽 예불이 시작된다. 우리 촬영은 건축물에 집중 됐지만 반야심경의 소리가 하도 맑고 힘차서 고성능 녹음기로 소리를 담아두었다. 염불소리는 절집마다 다르지만 해인사의 염불은 다른 절에 비해 정통성이랄까 고지식함이랄까 빠른 속도에 힘이 넘쳐흐르는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아침 공양이 끝나면 산사에 아침 해가 비추기 시작한다. 하루 중 촬영하기 가장 좋은 시간이다. 산너머에서 올라온 태양은 비스듬한 각도로 빛을 뿌려주고 목조 건축물과 석조물의 길게 늘어진 그림자들이 해가 올라가면서 점점 짧아지는 모습은 마치 따뜻한 아침 햇살을 받아 밤새 얼어붙었던 건축물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아홉시가 넘으면 관광객들이 경내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복잡한 촬영장비 때문에 방해가 될 수도 있어 우리는 일단 장비를 걷어 철수하고 늦은 오후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 다시 촬영을 시작한다.
지금까지 여름과 가을의 해인사를 촬영했다. 여름철 녹음綠陰도 좋았지만 단풍에 불타는 해인사의 풍광은 잊지 못할 장관이었다. 일주문에서 봉황문에 이르는, 이 나라 절집의 진입로 가운데 최고로 꼽히는 이 아름다운 길의 아름드리 고목 사이사이에는 여름철에는 그 존재조차 눈에 띄지 않았던 단풍나무들이 새빨간 잎을 불태우며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앞으로 눈 내린 겨울과 꽃 피는 봄철의 해인사 촬영을 남겨두고 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앞으로 어떤 장면이 카메라에 담겨 영상으로 기록될지 기대와 흥분이 교차한다. 나는 이 아름다운 절집에 대한 사랑에 다시 한번 빠져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