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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100경 완전정복 해인사 소리길편 촬영을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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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장민석┃KBS PD 2014년 12월 394호
올해 초부터 KBS 창원총국의 <경남100경 완전정복>을 맡게 됐다. 출연자가 달랑 사진 한 장을 들고 묻고 물어서 경남의 비경을 찾아다니는 프로그램이다. 우린 각 계각층(나름 비경을 좀 볼 줄 안다는)의 선정위원들이 까다롭게 고른 비경을 찾아다닌다. 그 중에서도‘해인사 소리길’은 가을이 올 때까지 아끼고 아꼈던 보물 같은 아이템이었다. 누구나 하나쯤 쟁여 놓는 비장의 카드였다. 그런데 촬영 둘째날 해인사에 도착했을 때 비가 왔다. 이번 회는 망했다고 생각했다.

사실촬영 전부터 걱정스러웠다. 올해는 일명‘마른단풍’이라고 단풍의 색이 잘 들지 않고, 일찍 떨어져버린 해라고 인근 어르신들의 제보(?)를 합천에 가자마자 들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비까지 내리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상태였다. 추적추적 차분하게 내리는 비는 합천의 가을을 적시고 있었고 내 마음속에는 단풍보다 붉은 분노의 불기둥이 용솟음치고 있
었다. 오래간만에 기도를 했다. 비 좀 내리지 않게 해주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감정 상태와는 상관없이, 합천은 생각보다 소박하게 가을을 맞이하고 있었다. 야트막한 골짜기 사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논에서는 추수가 한창이었고 지천에 깔린 감나무의(이미 홍시가 된) 감들과 단풍나무와 은행나무와 나머지 이름을 잘 모르는 활엽수들이 은은하게 겨우 자기 색을 내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과연 방송을 탈 만한 단풍인가 싶었다.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지만) TV에서 보던 그 불타는 단풍의 향연은 언제쯤이면 나타날까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세속에 찌든 방송국 피디(나)는 아마, 그때쯤, 그렇게 세속의 경계를 건너고 있었던 것 같다.

소리길은 세속의 시름을 잊게 해주기에는 충분했다. 여름의 계곡소리와 가을의 단풍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일찌감치 떨어진 낙엽 밝는 소리, 용감하게 굽이치는 물소리가 가득 차 있었다. 우리 프로그램의 진행자인 가수‘라마’는 연신 감동의 멘트들을 쏟아냈고, 카메라 감독은 물소리 때문에 멘트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며 걱정했다. 그리고 속이 타는 피디와 카메라 감독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행자라는 친구는“들릴 소리만 들리는 거죠”라며 한마디 툭 던지더니 유유히 계곡을 따라 올라갔다. 그렇게 세속의 오디오를 지우며 소리길은 해인사까지 이어져 있었다.

촬영은 계속됐다. 해인사 앞에 놓여 있는, 해인사가 세계문화유산임을 장대한 스케일로 보여주는 바위에 도착했을 때 즈음(사실 거기쯤 갔을 때는 비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카메라에 담기고 있는 단풍은, 가야산에 절묘하게 안겨 있는 해인사절집과 어우러져 놀랍도록 선명하고 아름다운 색깔을 내고 있었다. 날씨 탓에 너무 말라서 자기 색깔을 찾지 못하던 단풍이 비 때문에(내 마음에 분노의 불기둥을 선사했던) 더 선명해진 것 이었다.‘해인총림’이라는 현판이 걸린 사천왕문도, 비로자나불을 모셔놓은 대적광전도, 마당에 있는 석탑도 모두가 선명하게 자기 색을 찾고 있었다. 마치 평소 뿌연 필터를 끼고 있었던 것처럼 비가 그 필터를 걷어내고 있었다.

해인사 맞은편 매화산은 더 놀라운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선명해질 대로 선명해진 단풍들 위로 때마침 안개가 자욱하게 낀 것이다. 라마는 안개 사이로 보이는 단풍을 보더니 불이 나서 연기가 난거 같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때 홀연히 나타난 종현 스님이 실제로 매화산은 묻을 매埋, 불 화火자를 써 불을 묻은 산이라는 설명을 해주셨다. 산세도 불이 치솟는 국이었
다. 그‘화기’때문에 해인사에 7번이나 화재가 났다고 한다. 목판으로 만든 팔만대장경이 있는 해인사에 재라니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불타는 듯 화려한 단풍이 문제가 아니라 진짜 불이 났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불타는 단풍 위로 비가 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번 마음이 누그러졌다.

대적광전 바로 뒤에 있는, 신기하게도 그 동안의 화마를 다 피해갔던, 대장경판전은(문과 출신인 나에게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과학적인 설계로 대장경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 과학은 다른 게 아닌 자연 그대로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또 목판의 변형을 막
기 위해 3년을 바닷물에 담가뒀다고 한다. 한자 한자 글자를 파고, 목판을 옮기고, 보관하는 것까지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노력과 정성이 들어갔다. 한때 습도유지를 위해 (PAN)을 설치할 뻔 했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걸 보니 나만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닌 듯했다. 현대과학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어찌 나라를 구하고자 하
는 지극한 불심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해인사 본절을 다 둘러보고 찾아간 곳은 성철 스님이 생전에 주석하셨던 백련암이었다. 최종적으로 백련암의 불면석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다. 성철 스님이 생전에 그러셨듯이 백련암도 화려하진 않지만 검소하고 소박한 암자였다. 자비롭게 중생을 내려
다보는 부처님의 얼굴을 한 불면석과 빨간 단풍이 잘 어우러져 비경을 연출했다. 우리는 “찾았다!”를 외치며 촬영을 마쳤고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비가 와서 실망했고 비 덕분에 선명해진 단풍을 보고 다시 안도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나 혼자 지옥과 천당을 오갔다. 자연은 언제나 그대로 여여한데 사람 마음만 요동친다. 해가 지고 해가 뜨고 비가 오고 눈이 오고 그냥 그대로일 뿐인데 말이다. 그 어떤 단풍 보다 선명하고 아름다운 비경을 선사해준 해인사에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단풍에 생명력을 더해주고 내 마음의 불기둥을 식혀준 비한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