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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십일고찰十一古刹 성지순례를 다녀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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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대 - 용운┃해인사승가대학 2학년 2014년 11월 393호
윤달이 낀 긴 방학을 뒤로 하고 맞은 가야산의 하늘은 청명하고 아름다웠다. 하안거를 마치고 걸망 메고 떠났었던 관음전의 빈자리는 부처님 말씀을 배우고자하는 학인 스님들의 열기로 다시 가득 찼다. 잠시의 적응기간이 지나자 우리는 2박 3일간 떠날 성지순례의 계획을 세우고 토론을 하느라 매일 밤 반회의를 열었다. 어느 절을 갈 것인가 어디서 묵을 것인가 어떤 루트로 가는 것이 효율적인지 하는 일로 의견을 조율했다. 관례상 치문반 때는 경상도 지역을 사집반 때는 전라도 지역의 사찰을 참배하러 가곤 하는데 이번에는 해남 대흥사 출신인 성진 스님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처음 모두가 동의한 것은 대흥사부터 시작해서 전라도를 돌되 그때그때 시간이나 상황에 맞게 유동적으로 대처하자는 의견이었다. 이번 성지순례는 유명한 절을 참배하고 선지식을 찾아뵙는다는 것뿐만 아니라 지금껏 별로 가보지 못했었던 전라도 지역을 둘러본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었다.

성지순례 첫날. 해인사부터 전라남도 해남까지 이어지는 도로는 평범했지만 도로 옆으로 펼쳐진 기암괴석과 산맥, 소박한 시골집들이나 농촌의 정경들은 몇 천년된 남도의 역사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백제나 신라가 힘을 겨루던 이야기나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진주성까지 쳐들어왔던 이야기, 정유재란 때 남원과 전주 등의 호남에 적이 침범했던 이야기, 서산 대사, 사명 대사, 이순신 등 당대의 영웅들을 떠올리며 혼자 상상을 하다가 몽상 속으로 빠져들기도 했다.
4시간 가까이 달려서 도착한 첫 참배 사찰인 대흥사는 신라시대 아도 화상에 의해 창건되었지만 조선시대 승병장이었던 서산 대사가 주석하면서 유명해진 사찰이다. 대흥사 주지 범각 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휴정 스님은 이곳을 삼재三災가 들지 않는 곳이라 하여 이 땅에서 법통을 잇게 하면 법맥이 끊어지지 않고 널리 만대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정치적으로 얽힌 한성에서도 멀고 중국, 일본 등 타국의 침범을 받기가 어려운 지역임을 고려했을 때 억불전란의 시대를 살았던 고승의 혜안이 엿보이는 부분이었다.
두 번째 참배 사찰인 땅끝 마을 미황사는 해인강원 선배이신 금강 스님의 원력으로 유명한 사찰이다. 금강 스님은 20년 가까이 절에 주석하시며 쓰러져가던 법당을 일으켜 세우시고 괘불재, 한문학당, 템플스테이, 7박 8일 수행프로그램 등을 만드셨다. 최근에는 세월호 유가족 지원과 달라이라마 방한 추진 위원회 설립으로 미황사나 해남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불사도 해내고 계시다. 스님께서는 소중한 시간을 내어주시며 법문도 해주시고 책도 주시고 차도 내어주시며 강원에서 3명 이상의 학인이 수행프로그램에 참여하러 올 경우 참선법을 직접 지도해주시기로 약속까지 해주셨다.
미황사를 뒤로하고 세 번째로 참배한 사찰은 강진 백련사다. 백련사는 고려시대에 원묘 국사의 칭호를 받으셨던 요세 스님이 결사를 일으켰던 절이다. 고등학교 국사책에는 그저 ‘고려시대 요세 스님이 백련사 결사를 했다’라는 한 문장의 문구로 나와 있지만 이번에 알게 된 스님의 수행과 원력은 차원이 달랐다. 기록에 의하면 스님께서는 매일 지자의 지관수선법止觀修禪法인 천태선관을 하고, 《법화경》과 법화삼부法華三部를 독송한 후 준제신주準提神呪를 천 번, 미타불彌陀佛을 만 번 소리 내어 불렀다고 한다. 또한 우바리 존자도 울고 갈만큼의 엄한 백련사 청규를 만들고 본인 스스로 솔선수범을 보이셨다. 지금은 퇴락하여 작은 사찰로 전락했지만 무너져가던 고려불교의 수행을 올곧이 세우고자 했던 스님의 정신만은 마음 깊이 담았다.
네 번째 참배 사찰인 무위사는 백련사와 가까운 강진에 위치해 있었고 무위사를 거쳐 참배한 다섯 번째 사찰인 월출산 도갑사는 신라 시대 도선 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조선 시대 수미 대사가 중건하였다. 다른 절과는 다르게 해탈문이 돋보이는 사찰이었다.
바빴던 일정을 마치고 하룻밤을 보낸 후 우리 일행은 도반인 현각 스님의 은사스님이 계시는 변산반도의 내소사로 향했다. 지금까지의 여정도 아름다웠지만 변산 일대의 높이 솟아있는 암산들과 넓게 펼쳐진 뻘의 절경은 방학 외에는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었던 가야산인들에게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날씨도 좋았지만 노랗게 익은 벼들과 파란 하늘의 마주함은 마치 그 자체로 감미로운 노래를 들려주는 것 같았다. 염불삼매에 빠져 저절로 흥얼거렸지만 내소사 일주문에 다다르자 다시 마음을 경건하게 추스렸다. 이번에 뵙게 될 스님은 어떤 분이실까 기대하며 말이다. 백제 무왕 때 지어졌다던 오래된 법당에 다 같이 삼배를 올리고 각자의 바램을 한가지 씩 읊었다. 누군가는 해인강원 졸업을 무사히 시켜달라고 누군가는 염불을 잘하게 해달라고 빌었을 것이다. 나는 이번 성지순례가 아무 사고 없이 마쳤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내소사 주지소임을 맡고 계시는 스님의 법명은 윗자는 진자 아랫자는 학자스님이셨다. 스님께서는 차를 달여 주시며 우리에게 무엇을 공부하고 있느냐고 물어보셨고 ‘육조단경 덕이본’을 공부하고 있다고 하자 본인께서 20년 넘게 공부하고 토를 새기셨던 오래된 ‘육조단경 덕이본’을 꺼내 보여주셨다. 그러나 스님께서는 선사셨다. 윗옷을 벗으시고 ‘법성차’라는 아끼는 차를 내어주시며 격을 깨는 모습을 보이셨다. ‘법성차’는 한 잔만 마셔도 정신이 맑아지고 속이 따뜻해지는 차였는데 이런 차는 마셔본 적이 없었다. 스님은 학인들에게 ‘사나이 대장부 살림살이가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운을 띄우셨다. 주지로 부임하신 이후 정부로부터 700억 가까이 되는 투자를 받으셨다는 불사 애기를 꺼내면서 하신 말씀이다. 스님은 깨달으셨던 것일까? 눈을 치켜뜨고 이마의 주름을 움직이면서 ‘그대는 알겠는가?’라고 물어보실 때는 스님이야말로 이 시대의 임제 선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큰스님과 3시간 가까운 다담을 하고나서야 백양사로 출발할 수 있었다. 어른스님과 이렇게 길게 마주한 적은 없었지만 우리 모두는 이 시간이 너무 짧았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백양사와 내장사를 거쳐 고창의 선운사에 이르러 둘째 날 성지순례 일정을 마무리했다. 선지식을 뵙고 역사적인 고찰에 참배했다는 기쁨도 잠시, 저녁 공양을 마치고 지금까지 없었던 격렬한 반회의가 벌어졌다. 마지막 날에 전북 김제의 금산사를 참배하고 갈 것이냐 아니면 송광사만 참배하고 바로 해인사로 들어갈 것이냐에 관해서 의견 차이가 심했던 것이다. 물론 반장인 법익 스님과 나를 비롯한 몇몇 스님은 성지순례의 목적과 취지를 설명하며 금산사에 가기를 원했고 반대하는 일부 스님들은 일정이 힘들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쉬었다가 해인사에 들어가자는 입장이었다. 서로 찬반 의견을 내다가 몇 분의 스님이 중재하길 봉고차가 2대이므로 9명씩 두 조로 나누어서 한 조는 새볔 일찍 출발해 금산사를 거쳐서 송광사로 가고 다른 한 조는 쉬었다가 송광사로 가서 합류하자는 안을 내놓았다. 만장일치로 합의를 보고 조를 나누어 마지막 날의 일정을 결정했다.
셋째 날 참배했던 금산사는 포기했더라면 두고두고 후회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유서
깊은 고찰이자 대가람이었다. 나중에 사적을 살펴보니 후백제의 견훤이 유폐되었던 절로 원래는 백제시대에 지어지고 신라의 통일 이후 혜공왕 때 진표 율사에 의해 중창되면서 절의 기틀이 갖추어졌다고 한다. 전각 중 미륵전이 마치 봄에 참배했던 일본 교토의 동대사 대불전과 비슷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안내해주신 종무원의 설명에 따르면 동대사의 건축도 사실 여기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미륵전과 다른 전각들의 규모를 보았을 때 농경시대부터 중요한 쌀 생산지였던 전북 지방의 경제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참배를 마치고 김제 평야를 거쳐 송광사까지 내려가니 약속 시간인 정오가 다되었다. 가야에 해인사IC가 있는 것처럼 순천에도 송광사IC가 있고 IC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야 하는 것은 해인사와 비슷했다. 대장경 축전으로 길이 시원하게 잘 뚫린 해인사에 비해 첩첩산중처럼 느껴졌다. ‘푸른 소나무 깊은 골짜기는 수행자의 깃들일 바니라’라는 원효 대사의 말씀처럼 송광사는 승보종찰 답계 도량으로 들어오는 길만으로도 법문을 해주고 있었다. 송광사에는 미리 공문을 보내놓고, 전화로도 연락도 해놓은 상태였기에 강주이신 덕조 스님을 친견하고 송광사 강원 사집반 등명 스님의 안내에 따라 도량을 둘러보았다.

송광사 사집반 스님들과의 차담을 마치고 송광사와 순천을 떠나면서 힘든 성지순례 일정을 마무리 했다. 둘러보았던 열 한곳의 호남 지역 사찰들은 작년에 둘러보았던 여타 영남 지방의 사찰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마치 일본 사찰과 한국 사찰이 다른 것처럼, 한국 사찰과 중국 사찰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불상이나 전각, 탱화, 심지어 도량의 구성요소까지 이 지역 특유의 색깔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는 고찰古刹을 중심으로 성지순례를 하며 한국불교의 옛 영광을 훑어보았다.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불교도들이 제 역할을 못하는 사이 우리나라에서 서양 종교의 입김은 쎄졌다. 국민들은 ‘황사영 백서사건’을 잊어버린 것일까? 정부는 이백년 전 국가를 전복시키려했던 교도의 수장을 민족의 상징인 광화문 앞에 초대하고 그들 종교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교인을 성인으로 추대하는 행사를 하도록 허락했다. 마치 이토 히로부미의 후손들을 한국에 데려와 종묘에서 히로부미를 위해 제사지내도록 하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예전 일을 기억해내는 국민은 거의 없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인 이유다.
<선가귀감>에서는 이수돈오理雖頓悟나 사비돈제事非頓除라고 했다. 이치는 단박에 깨칠 수 있으나 현실(事, 습기)은 단박에 없애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정신 차리지 않으면 찬란했던 역사를 두고도 한국불교의 미래는 장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