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기운을 떨쳐내고자 오랜만에 길을 떠났다. 길 떠나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은 이미 새로운 공기가 들어와 나를 일으켜 세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묵은 것을 매듭짓고, 새로운 매듭을 잇고자 내게는 고향 같은 태국으로 향했다. 인도에서 얻은 독기가 빠져나갔던 곳, 한국에서 잃은 생기가 채워진 곳, 이런 집 같은 곳이 내게는태국이다.
유학이나 학술대회 참석차 외국에 갔을 뿐 이런 목적의 여행은 처음이다. 새로운 곳에 가는 것을 꺼려하고 익숙한 곳에서 일상을 보내는 것에서 힘을 얻는 나는 참 촌스럽다. 그 촌스러운 내가 짧은 5박 6일이라는 시간 동안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① 내가 존경하는 스님 뵙기, ② 친한 언니 만나기, ③ 내가 살던 원룸에서 지내
기, ④ 매일 가던 동네 반찬가게에서 가지반찬 사서 먹기, ⑤ 동네 미용실 언니 만나기,
⑥ 동네 편의점 매니저(친구) 만나기. 이렇게 여섯 가지다.
태국에 살 때 내게는 아버지 같던 스님이 있었고, 어머니 같던 16살이 많은 언니가 있었다. 그 두 분과는 계속 연락을 하고 지냈기 때문에 그 만남은 예정되어 있었지만, 나머지 네 가지는 몇 년간 모르고 살았기에 얼마나 궁금하고 또 설레었는지 모른다. 내가 살던 원룸에서 5박 6일을 지내면서 모든 일을 다 하겠노라 다짐하고공항에서 바로 그 동네로 향했다. 마치 모든 것은 내가 떠났던 그 시점에서 정지되어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환영해줄 거라는 착각을 하면서.
원룸 앞에 택시가 서고 서둘러 원룸 사무실에 가봤지만 주인아주머니는 오간데 없고 일하는 아이가 방 없다며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가방을 끌고 2년 내내 늘 가던 반찬가게에 가니 반찬가게도 오간데 없고 그 자리에 작은 슈퍼가 생겼다. 동네 편의점에 매니저 친구를 보러 갔는데, 매니저뿐만 아니라 점원까지 다 바뀌어져 있어 어디 물어볼 데도 없었다. 동네를 돌아 가끔 가던 미용실에 참 착하고 예뻤던 미용실 언니를 만나러 갔는데 미용실도 오간데 없고 건물 수리 중이었다.“다들 어디로 갔을까”
그렇게 저녁이 되었고, 저녁마다 리어카를 끌고 나와 파파야 즉석생채를 파는 언니가 보였다. 공무원을 한다는 한 젊은 여자애는 늘 퇴근 후에 그 파파야 언니 옆에 앉아 수다를 떠는데 영어도 곧잘 하곤 해서 이 모든 사라진 사람들과 건물들에 대해 물어 보았다.
반찬가게 부부는 돈을 많이 모았기에 더 이상 일을 하지 않고 작은 슈퍼에 세를 주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미용실 언니는 작년에 병으로 죽어 그 남편과 딸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무상無常하구나! 소나기가 오기에 잠시 비를 피해 건물 처마 밑에 가만히 서 있자니 내 마음도 그대로 정지되어 멍~한 상태가 되었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에 대한 답이 나왔다. 그들은 그들의 인연대로 살다가 인연이 다하여 떠났던 것이다.
내가 그곳을 떠난 이후에도 그들은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며, 치열하게 병과 싸워가며, 또 자신의 삶을 계획해가며 그렇게 자신의 삶을 살았을 뿐이다. 몇 년 간 내 마음의 진공상태에 그들을 가두어 그들의 삶을 정지시켜 놓고 내가 원하는 대로 기억하며 그대로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것이 얼마나 자연의 이치에 어긋나는 발상
인가. 제행무상諸行無常에 대해 말하는 법구경의 시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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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bbe saṃhāāaniccā”ti yadāpaññāa passati
삽베 상카라 아니짜-띠 야다 빤냐야 빳사띠
atha nibbindatīdukkhe, esa maggo visuddhiyā①
아타 닙빈다띠 둑케 에사 막고 위숟디야
“모든 조건 지어진 것들은 무상無常하다”라고 지혜를 통해 볼 때에
괴로움에 싫증이 나게 된다. 이것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② 《법구경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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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제행이 sabbe saṃhāā(모든 조건 지어진 것들은)이고, 무상이 aniccā(항상함이 없다)이다. 불교 공부하면서 가장 많은 듣는 말 중 하나이고, 불교 강의하면서 수도 없이 언급했던 무상은 누군가의, 무엇인가의 변화를 내가 인식하고 나서야 ‘아차!’하면서 절감하게 된다.
어느 건물의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멍하게 서 있었던 이유는 누군가의 삶이 끊임없이 진행되어 왔고, 또 누군가의 삶은 이미 끝이 나 있는 그 변화를 받아들이기에 시간이 필요해서였다. 모든 조건 지어진 것들은 무상하다는 그 진리는 내게 체득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묵은 기운을 떨쳐내고 태국에서 온기를 받아 가려고 왔다가 무상의 이치를 또 한 번 새기고 간다. 아직은 내게 무상의 혜안慧眼은 없다. 시력 안 좋은 이가 뿌연 세상을 참세상이라 믿고 보다가‘아차’하고 허겁지겁 안경을 찾아 끼듯, 나는 누군가의, 무엇인가의 변화를 인식하고 나서야 무상이라는 안경을 찾아 끼고 다시 세상을보는 중생이다. 무상이라는 안경, 참 식상할 틈이 없다.
모든 조건 지어진 것들이 무상하기에,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가! 내 것도 아니었던 것에 대해 마치‘잃은 것’처럼 느껴지는 상실감을 달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새기게 된다. 지금 만나고 사는 사람들과의 인연은 딱 지금이 최고의 순간이다. 먹는 음식이든, 걷고 있는 거리든, 하고 있는 일이든 지금이 그것들과의인연에서 최고의 순간이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순간을 살아내야 한다. 무상은 슬픈 것이 아니다. 무상은 지금 이 순간을 빛나게 살도록 하는 참 매력적인 것이다. 그래서 오늘, 내 현재의 모든 인연이 참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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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sabbe: 모든. saṃhāā 조건 지어진 것들은. aniccā 무상(無常)하다. ti: 직접화법이 끝났음을 나타냄. yadā ~할 때에. paññāa: 지혜를
통해. passati: 본다. atha: 그리고, 그러고 나서. nibbindatī= nibbindati: 싫어진다, 싫증난다. dukkhe: 괴로움에. esa: 이것은. maggo: 길.
visuddhiyā 청정에 이르는.
② 일체행무상一切行無常 여혜소관찰如慧所觀察 약능각차고若能覺此苦 행도정기적行道淨其跡(한역법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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