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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성찰과 전망의 시기 그리고 '공유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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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리포트 - 해인 편집실 2014년 10월 392호
통합종단 출범 이후 조계종의 교세를 거칠게 보면, 분명 발전적이다. 종교인구 수는 1973년 798만→ 85년 8백만→ 95년 1천32만→2005년 1천70만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여전히 한국에서 최대의 종교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통계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피부로 느끼기에도 사찰은 늘어났고 외형 또한 커졌다. 종단의 행정체계도 이만하면 될 정도로 갖춰졌다.
그러나 다른 종교와의 비교, 사회적 수준의 상승세와 비교하면 발전했다는 결론은 유보되어야 한다. 비슷한 시기의 천주교인은 75년 101만→ 85년 186만→ 95년 295만→2005년 514만으로 증가했다. 불교보다 훨씬 가파른 증가세를 보였다. 개신교의 경우는 85년 650만→ 95년 876만→ 2005년 861만으로 완만한 증가와 완만한 감소를 나타냈다. 종교 인구 수 외의 비교치, 가령 학교, 병
원, 언론 등 사회적 인프라를 비교하면 불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뒤쳐지고 있다.
종교를 계량화되는 것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종교의 본질과도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사회적인 프라는 국민들에 대한 기여의 측면이 있기 때문에 중요성을 지닌다. 특히 불교의 가르침을 시민적 가치와 결합시켜내려는 시민사회 영역의 활동은 다른 종교에 비해 현
저히 뒤쳐진다. 이런 부분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수년에 걸쳐 내부의 역량이 쌓일 때에 가능한 것이므로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다.
그런데 종단의 총무원과 교육원, 포교원의 중요 소임자들이 노심초사하고 있음에도 성과는 미미하다. 최근 종단의 원로 송담 스님은“재단법인 법보선원의 수행전통과 대한불교조계종의 수행전통이 맞지 않아서 대한불교조계종의 승려로써 의무와 권한을 내려놓으면서 탈종합니다”라고 했다. 송담 스님의 제자 10여 명도 탈종하겠다고 공고했다. 탈종의 이유를‘수행전통이 맞지 않아서’라고 했다. 이에 대해 여러 해석이 분분하다. 법인법에 따른 관리 회피라든지, 용주사 주지 선거에서 유시를 받들지 않은 것에 대한 노여움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 이는 지엽이다. 수행종단으로서의 조계종의
정체성을 되돌아보게 하는 지적이라는 데에 이르지 않는다면 난감한 일일 뿐이다.
종단의 상층은 수행보다, 중생구제보다 권력화되어 권력을 누리는 이너서클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법 아래(法下)에서 법을 구현함으로써 비로소 주어지는 권위를 바탕으로 종단을 이끌어야 함에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한 예로, 승가 화합과 유지의 지혜인 계율을 현대적으로 적용토록 하는 과제
가 주어져 있지만, 종법은 최소한의 규범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종법은 준엄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권세 앞에서 무력하기 그지없다. 이래서는 신뢰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 또 종법의 적용이 자의적인 경우도 많은데,누구에겐 솜방망이고 누구에겐 저승사자 같아서는 총무원을 원망하는 마음이 깊어진
다. 권력화된 상층과 종법의 추락이 종단의 전체 모습은 분명 아니지만, 종단의 권위를 스스로 깎아내리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불교 수행공덕의 회향처는 중생이다. 사홍서원의 첫 서원은“중생을 다 건지오리다”이듯이 중생이 행복하여지기를 기원한다. 그런데 한국사회의 중생은 고달프다. 불안, 경쟁, 자살, 이혼, 비정규직, 이런 말들이 우리 사회의 현실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종교적·불교내적·사회적 상황 속에 한국불교와 조계종이 놓여 있다. 며칠 있으면 16대 중앙종회의원을 뽑는다. 현행의 선거제도에 대해 장단점을 따지는 논란도 있지만, 종단 대의기구를 구성하는 중요한 행사다. 지난 시기를 돌아보면서 성찰하고, 앞날을 설계하는 전망의 시기이다.
종회의원을 뽑는 선거 시기를 맞아 성찰 이 있고, 전망이 있는가? 오히려 소리 없는 탄식이 깊어지고 있지는 않은가? 직능대표 종회의원 후보들은 여전히 해당 직능을 대표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율원·선원·강원·교육·포교·사회·복지·문화·법제·행정 등 10개의 직능으로 분류되어 있다. 최소한 각각의 분야에서 오래도록 활동했거나 기여했다는 동의가 있어야 하는데, 이런 점을 고려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각 직능과 종회의원 사이의 거리를 더 벌어지게 만드는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까 우려하
지 않을 수 없다.
비구니 종회의원의 경우도 그렇다. 전국 비구니회 운영위원회에서 추천한 10명을 직능직선출위원회에서 선출하는데, 비구니회 운영위원회조차도 모르는 스님이 추천되었다고 한다. 불교포커스는 9월 22일 열린비구니회 운영위원회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현장에서 만난 일부 운영위원들 역시 현행 방식에 불만을 토로했다. 복지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한 스님은“운영위원은 회의가 성원되도록 하는 일이 전부다”라고 자조 섞인 불평을 이야기했다. 선거법에 규정된‘비구니 종회의원 추천은 운영위원회에서 한다’는 요건만 갖추는 것이 역할이라는 푸념이다. 이 스님은“누가 후보인지도 모른 채 간선직 의원들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있다. 말을 못하고 있을 뿐이지 후보들의 포부를 듣고 자신의 손으로 후보를 결정하고 싶은 것이 대부분 스님들의 생각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불교포커스,‘전국비구니회, 진정 6천여 비구니의 대표가 되려면’, 2014. 9. 24.> 누구인지도 모르는 스님이 대표를 한다는 것인데,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기가 막히는 일이며, 이것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왜 종회의원이 되려는 것일까. 직능분야와 교구의 대변자로서 종단 발전에 헌신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있을 것이다. 사찰의 주지자리를 얻고, 권세를 누리기 위해 종회의원이 되겠다는 스님은 없을 것이고, 그런 삿된 마음을 먹었다면 대중들이 단번에 알아보는 까닭에 뽑히지도 않을 것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성찰과 전망의 선거가 되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도 그렇고 그런 스님들이 종회의원에
뽑히면, 종단은 내적으로 무기력하고, 사회적으로도 교세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길은 걸어가야 비로소 길이 된다고 한다. 길을 만들어 나아가야 한다.‘공유지식’이라는 말이 있다. 어떻게 집단행동이 나타나는가를 연구한 것인데, <사람들은 어떻게 광장에 모이는 것일까?>라는 책으로 나와있다. 이에 따르면 각자가 무엇을 아는 것으로는 집단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A가 아는 것을 B도 알고, B가 알고 있는 것을 A도 알 때 비로소 집단행동의 조건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또 각자가 아는 것을 표현해야 서로가 알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종단이 놓인 종교적·불교내적·사회적 상황을 공유지식으로 만드는 것이 하나의 길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