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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원주실 원주팀장 배현철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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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선우海印善友 - 무구 2014년 09월 391호
펑펑 내리는 눈을 헤치며 8살 남자아이는 백련암을 오른다. 신문보급소였던 집일을 도와 매일 올랐다. 성철스님은 그런 아이가 기특하셨던지 귀한 바나나와 과일을 잔뜩 싸주셨다. 풍족하지 않았던 시절, 봉지를 힘겹게 들고서 발걸음을 간신히 이어간다. 얼어붙은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매일을 그렇게 내려왔다. 한번은 봉지에 담긴 과일이며 떡을 도랑에 던져 버린 적도 있었다. 아이가 감내하기 어려운 무게였으리라. 하지만 이내 얼마못가 펑펑 울면서 되돌아갔다. 집에서 기다릴 동생들의 눈망울이 선해졌기 때문이다. 얼음장 같은 물에서 주워 담았다. 그 때부터였을까. 지금 이 일을 하게 된 인연이.
스물세 살, 검찰공무원을 준비했다. 주독야경할 심산으로 해인사 야경으로 밭 붙였다. 그런데 산감을 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세 분의 주지스님 기사일도 하며 지금까지 이어졌다. 6.25 전쟁에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해인사 공양주를 하시며 ‘왕보살님’으로 통했다. 대를 잇듯 어머니도 불명佛名 ‘자비심보살님’으로 대적광전에 계신다. 3대에 이어 해인사에 이토록 깊은 인연도 있을까. 해인사 원주실 원주팀장으로 재직하시는 배현철 님에게서 선우善友의 향기를 전해 듣는다.

불가에서 ‘공양供養’의 의미는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을 거쳐 감사함으로 승화된다. 해인사에는 커피 한 봉지, 세재 한 통 심지어 공양에 오른 고사리에도 한사람의 가치관과 직업의식이 녹아있다. 식자재 납품 업체에 찾아가서 다듬어지고 만들어지는 그 현장과 업체관리자의 인성까지 두루두루 본 다음 해인사 공양에 오르게 된다. 그래서 한 달에 서너 번은 꼭 새벽시장에 간다. 경매현장에서 해인사에 과일과 채소를 납품하는 업체의 관리자를 지켜본다 자신이 판매하는 물건에 대한 진정한 자부심을 갖지 못한 경우 그 업체와의 거래를 포기하게 된단다. 마트마다 최저가격으로 판매하는 품목들의 알아가는 데까지 원주팀장으로서의 오랜 경험과 발품이 녹아 있었다. 그런 노력이 체득되어 있던 탓인지 다른 이의 그런 노고를 자신의 일처럼 공감하며 아파하였다.
후원보살님의 이야기에는 “마음이 아프죠.”라며 말문을 열고 끝맺는다. 후원의 여름은 절집의 흐름을 제일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다. 안거, 수련회, 스님과 재가공양까지 담당하셨다. 휴가는 물론 휴일까지 반납하며 한달내내 후원은 돌아갔다. 심지어 4시간의 수면시간도 불사하셨다. 무릎과 허리에서 심해지는 통증에 체력적인 고통까지 더해졌다. 링겔 맞는 시간까지도 후원의 일이 걱정되어 마음 편치 못하셨단다. 연신“가야 돼, 가야되는대...”라며 미안해하시는 모습을 옆에서 보며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겨울의 맹렬한 추위에도 찬물에 손을 넣어야 하는 일이라 손등은 터지고, 겨우내 후원에는 바세린이 마를 날이 없단다. 쉬는 날, 병원에 가면 보살님들은 약속이나 한 듯 만난다며 웃는다. 보이지 않는 후원 보살님들의 노고에 따뜻한 말 한마디보다 불평이 들려올 때면 속상하다고 했다. 단지 보시금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짚었다. 누군가의 어머니이고 누나라고 생각하면 쉽게 말할 수 없을 거라며 한숨짓는다.
그리고 행자님들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자신의 업무는 대중에게 적시적소 최적화된 물품을 조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행자님들이 한분이라도 더 계를 받으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것이 제일 중요한 소임이라고 했다. 간혹 행자님들에게 동네 청년쯤으로 생각하는지 말을 놓거나 심지어 욕지거리를 할 때면 간과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가끔 원주팀장님은 언성을 높일 때가 있다. 무례하고 몰상식한 불자들이나 방문객들에게는 거침없다.
보람도 풀어놓는다. 가정에 힘겨운 시간이 있었다했다. 좋은 땅에 집짓고 농사지으며 살자했던, 훗날의 꿈을 함께 그렸던 평생의 반려자가 쓰러졌다. 백혈병을 진단받았다. 더욱 절망적이었던 건 20퍼센트의 생존율이었다. 하루하루 생으로 멀어져가는 듯 했다. 죽음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무능력함에 깊이 절망했다. 3일간 입원과 치료비는 2200만원이었다. 아내가 열심히 모아 불려둔 돈은 고스란히 병원비로 들어갔다. 심적으로 경제적으로도 이중 삼중의 고통이었다. 부지불식간에 몰아친 태풍을 맨몸으로 감내해야하는 기분이었다. 그런 와중에 한순간 정신을 차렸다. 선원장 스님의 한마디 말씀이었다. “스스로가 중심을 잡아야 한다, 꼭 기도해라” 그래서 번뜩 깬 정신으로 기도할 공간을 찾았다. 아내가 있던 가톨릭병원의 예배실 성모마리아상 앞에서 일심으로 부처님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었다. 위급한 상황을 아는 스님부터 행자님들까지 간절히 기도해주셨다. 그리고 내세우지 않으시며 물적으로도 힘껏 보태주셨다. 몇 해 전 일을 그만두려고 했다. 그때도 지금의 선원장 스님께서 잡아주셨다. 만약 그 순간 스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일을 그만두었더라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싶단다. 위중한 상황에서 간절한 염원이 더해지고 보태져서 한 사람을 살리게 된 것 같다. ‘무주상보시’의 진정한 의미를 스님들에게서 배울 수 있었다. 신신당부했다. 스님께서 하신 말씀은 보고, 듣고, 무조건 믿고 행해보라고 말한다. 지금은 월셋방에 살지만 고난을 겪어낸 사람에게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더욱 단단해진 신심과 자신감이 보였다.
자비심보살님에 대한 말씀도 청했다. 어릴 적부터 새옷을 사주신적이 없으셨다며 너스레 웃으신다. 그리고 고등학생일 땐 아르바이트해서 큰맘 먹고 트레이닝복을 샀다. 그러나 주말 집에 오면 입을 옷도, 고이 모셔둔 트레이닝복까지 홀랑 사라져버린 일이 태반이었단다. 이유인 즉 어머니의 불명佛名처럼 ‘자비심’때문이었다. “불쌍하다이가” “안 고맙나?” 이런 말씀을 곧잘 하신다. 그렇게 감내하시며 베푸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속도 많이 끓였단다. 어릴 적, 집에 돌아오면 낯선 아이가 집에 있곤 했다. 그러면 “오늘부터 같이 살거다”라면 어머니는 선포하셨다. 그렇게 해서 좁은 단칸방에 여덟 명의 자식을 키우셨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데려온 아이들에게는 새 옷을 입히셨지만 친자식에게는 받아 입히셨다. 그리고 어머니가 해인사 일을 하시면서는 집은 행자님들의 피신처였다. 혹독했던 행자생활에 못 견뎌 하산을 감행하는 행자님들이 집 대문을 두드리는 일이 많았다. 그러면 어머니는 따뜻한 밥 지어 대접하고는 아들의 새 옷을 그렇게 꺼내주신 것이다. “내가 사둔 운동복입고 행자님들 많이 가셨어요” 라며 또 그렇게 웃고 만다. 지금도 어머니는 “십만원 줘봐, 사람들 밥 사줄 돈이 없다. 어차피 니한테는 술 한번 사묵으면 없어질 돈이다이가”라고 말씀하신다. 어김없이 “안 고맙나”로 끝맺으시면 한없이 다 내주시는 모습에 자식으로서 속상하기도 하면서 내심 진정한 보살이야말로 어머니란 생각이 절로 든단다.

여름의 따가운 햇볕에 푹 익어 쓰러질 것 같더니. 그렇게 견뎌낸 시간은 곱고 달다. 어김없이 가을이 온다. 더도 덜도 없이 여름의 시간이 잎사귀에 번지고 있다. 가야산은 가을을 입으며 한층 깊은 색이 번진다. 음미吟味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