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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내원사 주지 영산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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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정영 2014년 09월 391호
지리산 자락을 타고 내려오는 두 물줄기가 내원사를 가운데에 두고 양 옆으로 흐른다. 절 마당에 서니 드나드는 이 하나 없이 고요한데 물소리가 기운차게 도량을 에워싼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석조비로자나좌불이 놓여 있는 이 고요한 절에 영산 스님이 살고 계시다. 어찌 지내시는가 여쭌다.
\"밥 먹고 정진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평생 참선 수행만 하다가 주지 소임을 맡은 지 3년이다. 은사 스님이 창건한 절이지만 걸망 지고 선방에 다니던 시절에는 일 년에 한 번 올까 말까한 곳이었다. 칠불선원에서 3년 결제를 할 때는 아예 오지도 않았으니 머물던 곳은 아니다. 헌데 내원사의 살림을 수습해야 하는 상황이라서 소임을 맡고는 해야 할 일들을 하고 있다. 처음에 삼존불을 조성하고 도량을 가꾸고 부도를 조성하고 사적비를 세우는 일까지 일만 하며 3년을 보냈다. 그런데도 아직 정리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으니 스님은 오늘도 고단하단다. 그렇게 힘겹게 주지 소임을 살면서도 스님은 저녁이면 수행 정진을 하신다.
\"순일하게는 못 해도 생각나면 챙기고 그런 것이지요.\"
스님은 열일곱 살의 나이에 고성 문수암으로 출가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터라 절에 가면 마음껏 공부할 수 있다는 말만 듣고 집안의 어른을 따라나섰다. 그렇게 들어선 절집은 편안하기만 했다. 문수암에서 행자를 살고 밀양 무봉사를 거쳐 범어사에서 수계를 받았다. 그러고는 쌍계사에서 3년을 살고 해인사 강원을 졸업하고 나서부터는 걸망 지고 지리산 상무주암, 극락암, 용화선원, 칠불선원 등 제방 선원을 다녔다. 몸이 아파서 잠시 함양 보림사 주지를 할 때에도 여름이면 극락암 선방에 가서 주로 살았다. 주지 소임을 내려놓고는 또 다시 대승사, 보성암, 극락암, 수덕사를 비롯한 선방에 다녔다.
\"그냥 좋으니까요. 출가했으니 우리도 마땅히 부처님처럼 수행해야하지 않겠어요. 중이 할 일이 그거 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하니 \'행주좌와行住座臥 어묵동정語默動靜\', 스님이 걷고 멈추고 앉고 눕고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가만히 있을 때에 이 모든 것이 선禪이 아닌 것이 없으리라. 헌데 중생은 저 산 아래에서 무엇이 업인지도 모른 체 업장을 더 두텁게 쌓고만 있으니 스님이 조금만 손을 내밀어주시면 안되는지 여쭌다.
\"날카로운 송곳은 주머니 안에 있어도 드러나게 되어 있고 짙은 향기는 보자기에 싸여 있어도 밖으로 풍기게 되어 있어요. 굳이 내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나서지 않아도 인연 따라서 가고 오는 이들이 있지 않겠어요.\"
아무리 가까이에 있어도 그 향내를 맡지 못 하는 사람이 있고 아무리 멀리 있어도 그 향기를 맡고 찾아오는 이도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니 스님은 늘 그 자리에서 열심히 정진하면 된다는 말씀이다.

영산 스님은 강원에 있을 때 다락에서 떨어져서 크게 몸을 앓았다. 큰 이상이 없다고는 했지만 앉아 있는 것도 힘이 들 만큼이었다. 그렇게 몸이 아픈데도 계속 선방에 다녔다. 그러고는 해제비를 받으면 병원이나 한의원에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선암사에서 설봉 스님을 모시고 살 때였다. 몸이 아파서 밖에 나가 뜸을 뜨고 들어와서는 쉬고 있는데 후원 식구들과 소임을 보는 스님들이 후원에서 배구를 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어울려 배구를 하는 영산 스님의 모습을 설봉 스님이 보시더니 불러 앉히셨다. 3일 동안에 걸쳐서 당신이 살아오신 이야기를 하시더니, 그렇게 중노릇 하려거든 속세로 돌아가라 하셨다. 늘 선방에만 계셨던 설봉 스님은 그 모습만으로도 영산 스님에게 귀감이 되었고 그때의 호된 가르침은 스님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일러주셨단다. 그래서 영산 스님은 오늘도 수행 정진하신다. 그런데도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공부한다고 애는 썼지만 세월만 보내면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게 살았어. 다만 우리가 부처라는 사실과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확신은 갖고 살았지. 난 불가능은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 않아서 못 하는 것이지 해도 안 되는 것은 없어요. 지금도 그런 마음으로 정진하고 있고. 그러니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하면 된다고.\"
헌데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단다. 도는 무위법無爲法이니 다 놓아야 한다. 집착이 끊어지고 해도 하는 바가 없으면, 즉 모든 상을 여위면 곧 부처라 이름 한다는 것이다.
\"살면서 물질과 사람에 집착하잖아요. 그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다 놓아버려도 살 수 있어요. 나는 아무 것도 없이 걸망 지고 다닐 때가 제일 편해요.\"
하지만 지금은 주지 소임을 사는 만큼 거기에 힘을 쏟는다. 지금의 내원사는 본래 신라시대 말에 창건된 것으로 덕산사라고 하였다. 그것이 400년 전에 전소되고 나서 논밭이었던 것을 은사스님이신 원경 스님께서 법당을 짓고는 내원사라 이름 하셨다. 그러니 영산 스님이 은사스님을 처음 만난 것도 이 내원사였다.
영산 스님이 현재 노력을 기울이는 일은 비로전에 모셔져 있는 석조비로자나좌불을 국보로 지정하는 것, 그리고 석불의 대좌 중대석에서 발굴된 사리함인 석합이 국보로 지정되어 현재 부산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을 제자리로 찾아오는 것이다. 이것들은 지리산 중턱에 있던 것이 도굴꾼에 의해 파헤쳐지고 골동품상들 사이에서 판매되면서 흩어진 것이다. 그러니 석불과 대좌와 석합이 본래의 모습대로 하나로 뭉쳐져서 국보로 지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의견이다. 석합에 새겨져 있는 명문銘文에 따르면 이것은 신라 혜공왕 2년에 제작되었고 석조비로자나불 좌대에 모셔진 것이라는 내용이 정확하게 남아 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몸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니 이 내용을 근거로 석합 \'영태2년명납석제호 永泰二年銘蠟石製壺\'를 내원사로 모셔 와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못 하더라도 자료를 남겨 놓으면 누가 해도 언젠가는 하게 되겠지요.\"

영산 스님의 말씀에는 바쁨도 성냄도 없다. 그저 가는 곳으로 가는 것이고 가는 만큼 가는 것이란 듯 여여히 가고 계신다. 그런 스님께 원력은 무엇인지 여쭙는다.
\"수행자는 마땅히 도가 익어져야 하는 것인데, 그것은 누가 알아주기보다 스스로 이 정도면 이제 가도 되겠다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금생에 아직 수행자로써 온전치 못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여생이라도 내실을 좀 갖추다가 갔으면 하는 생각뿐이지요. 하던 그대로를 다음 생에도 이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스님은 사는 동안 힘닿는 대로 정진하고 누가 부르면 가서 힘닿는 대로 도와주고 또 누가 얘기해달라면 힘닿는 대로 얘기하면서 살고 싶단다. 마치 부설거사의 \'팔죽시八竹詩\' 처럼 말이다.

\'차죽피죽화거죽此竹彼竹化去竹 이런대로 저런대로 되어가는대로 / 풍타지죽랑타죽風打之竹浪打竹 바람 부는대로 물결 치는대로 / 죽죽반반생차죽粥粥飯飯生此竹 죽이면 죽 밥이면 밥 이런대로 살고 / 시시비비간피죽是是非非看彼竹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른대로 보고 / 빈객접대가세죽賓客接待家勢竹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 시정매매세월죽市井賣買歲月竹 시정 물건 사고파는 것은 세월대로 / 만사불여오심죽萬事不如吾心竹 세상만사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도 / 연연연세과연죽然然然世過然竹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보낸다\'

그러니 영산 스님에게 있어 노후 걱정이 있기나 할 것인가. 그런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재물이나 탐하고 몸뚱이나 아끼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노후 걱정을 하신다.
\"발에 걸리면 누군가 묻거나 태워 주겠지요. 그런데 그것도 남에게 신세가 될까 걱정이 되긴 해요.\"
그러나 스님에겐 그런 걱정도 허공에서 사라지는 바람처럼 잠깐 스쳐갈 뿐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니 후회할 것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걱정할 것 없이 현재에 충실하면 되지요. 그렇게 살고 싶어요.\"
스님과 가만가만 도량을 거닌다. 그저 걷기만 할 뿐 아무 말씀이 없으신 스님을 따르며 그저 편안하다. 아무 말 없어도 스님 뒤를 따르다 보니 이 깊은 산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알 것만 같다. 저 가볍고도 무거운 걸음의 깊이는 평생을 수행 정진하신 스님의 도력이 아닐 것인가 생각 하는데, 스님은 말씀하신다.
\"도력은 무슨.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먹고 살았어.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