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마련해 놓은 공간은 깊고도 높다. 산새 우는 소리, 쏴아~ 바람이 전나무숲 쓸어가는 소리. 아마 시간의 갈피를 타고 오르는 소리이리라. 그리고 빛살, 나리던 빛살은 꽃잎의 물방울에 부딪쳐 스러지고, 스러진 햇발은 내 눈으로 들어와 일순 사위가 환해진다. 이윽고 나는 다른 세계로 가는 틈새를 엿본다. 박물관 입구는 적멸로 들어가는 입구와 같구나. 내 휘청거리지 않으리. 다만 사무사思無邪의 마음으로 천천히, 발자국을 꾹꾹 눌러 걸어들어가리.보득이 금강지에서 설한 가르침을 / 步得金剛地上說
부살들이 철위산에서 결집하였네 / 扶薩鐵圍山間結
필추가 해인사에서 강경하였으니 / 苾蒭海印寺講經
잡화가 이로부터 삼절을 이루리라 / 雜花從此成三絶
용당의 묘설을 용궁에서 들여온 뒤 / 龍堂妙說入龍宮
용맹이 용종의 공을 제대로 전했네 / 龍猛能傳龍種功
용궁의 용왕이 정녕 환희함은 물론이요 / 龍國龍神定歡喜
용산은 의룡의 걸출함을 더욱 표하리라 / 龍山益表義龍雄
마갈제성의 광명이 두루 비치고 / 磨羯提城光遍照
차구반국의 불법이 더욱 빛나네 / 遮拘盤國法增耀
오늘 아침 부상에서 떠오른 지혜의 해 / 今朝慧日出扶桑
문수가 동묘에 강림한 것을 알겠도다 / 認得文殊降東廟
천언의 비교를 하늘에서 전수받고 / 天言祕敎從天授
해인의 진전을 바다에서 꺼내 왔네 / 海印眞詮出海來
멋지도다 해인의 뜻 해우에서 밝힘이여 / 好是海隅興海義
천의는 단지 천재에게 맡기려 할 뿐이라오 / 只應天意委天才
도수의 고담은 용수가 해석했고 / 道樹高談龍樹釋
동림의 아지는 남림이 번역했네 / 東林雅志南林譯
빈공이 피안에서 금성을 떨쳤다지만 / 斌公彼岸震金聲
가야에서 불적을 이은 것과 같으리오 / 何似伽倻繼佛跡
삼삼의 광회의 숫자는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 三三廣會數堪疑
십십의 원종의 뜻이야 잘못될 리가 있겠는가 / 十十圓宗義不虧
유통을 말한다면 현험을 밀고 나가야 하리니 / 若說流通推現驗
경의 미진한 해석은 문자가 이상한 탓이로다 / 經來未盡語偏奇
(※ 시 전문과 번역, 주석들은 모두 한국고전종합DB(http://db.itkc.or.kr)에서 가져왔다.)
용왕龍王의 용궁에 불경들이 소장되어 있다는 전설이 있다. 사람들이 더 이상 불법을 믿지 않는 시대가 도래하면, 용왕이 용궁에 세상의 모든 불경을 거두어 모아놓고 지킨다는 것이다. 고운집 번역본 주석에 따르면, 용당의 묘설은 《화엄경》을, 용맹은 “용궁에 들어가서 《화엄경》을 가지고 왔다는 용수龍樹의 또 다른 이름”을 가리키며, 용산龍山은 가야산 해인사를 뜻한다. 의룡, 필추는 희랑조사를 가리킨다.
건칠목조희랑조사상(보물999호).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상. 희랑조사의 위대한 업적에 걸맞지 않게 소박하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 학문으로 커다란 성취를 이루었으니 어찌 부럽지 않으리. 한국 불교의 역사에 이러한 승려가 계셨다는 사실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범점할 수 없는 인물에 대한 강렬한 기억을 안고 성보박물관을 나선다.
참담하게도, 나는 유물들이 통과해온 살육과 파괴와 약탈의 시대를 생각한다. 누가 이것들을 귀하게 여길 수 있을 것인가? 바로 곁에서 유물을 볼 수 있는 자들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너와 내가, 만물의 흐름에 드는 자들이, 추상화된 우리, 모두가 귀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보는 자들만이 볼 수 있을 뿐이요, 모르는 자는 모를 뿐이다. 정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