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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연구원 연구팀장 한홍익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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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선우海印善友 - 무구 2014년 08월 390호
가시 돋친 듯 쪼아대는 햇살에도 더욱 짙푸른 꿈을 꾼다. 청년의 꿈도 그렇게 영글어져간다. 사하촌寺下村에서 자라 해인사에서 보낸 십여 년은 청년의 여름이었다.

해인사와 사하촌의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모색하던 분이 계셨다. 당시 보존국장 남일 스님이었다. 스님의 눈에 한 청년이 들어왔다. 대장경의 데이터베이스 사업이 한창이었다. 연구원 수십 명이 매달렸다. 일원으로 참여했다가 10년째다. 지금 청년에서 어른으로 거듭나고 있는 대장경연구원 팀장 한홍익 님이다.
업무상 학계 분들을 만나면 으레 지도 교수님이 누구시냐 부터 질문들이 이어진단다. 이런 상황들이 빈번했다. 연구원이란 직함에서 비롯된 호기심이었다. 건축과 푸드 스타일링 쪽으로 전공했던 이력에 반해 다른 의지가 생겨갔다. 두 해전 일본 어느 불교대학교에서 해인사 대장경연구원이 초청 받았다. 한국과 일본 간의 인경시연을 위한 자리였다. 그곳에서 일본 측 노장과 대면했다. 인경 도구와 과정이 달랐다. 시연이 끝나고서 그 분께 살짝 여쭸다. 일본 측 관계자들이 그분께 극진히 예를 다하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이 방면의 업적이 궁금했다.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전무하단다. 일본에서는 한 분야에 10년 이상 종사하게 되면 전문가로 존중한다는 한 박물관 관계자의 귀띔이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후 결심이 확고해졌다. 약간의 오기도 있었다.
역사학을 전공해보겠다고 보존국장 성안 스님께 말씀드렸다. 적극적인 응원과 후원이 이어졌다. 스님은 대장경연구원의 장기적인 발전가능성을 그리셨다. 서서히 밑그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성안 스님도 박사과정 중이셨고, 이승훈 연구원도 문화재를 응용한 콘텐츠를 연구하기 위해 문화콘텐츠 공부를 시작했다. 스님께서 이끌어 주셨기에 가능했던 밑그림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주말이면 그 날의 기억이 일어난다고 했다. 너머의 정을 주셨던 분이었다. 엄부자모 嚴父慈母같은 은사였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곳으로 끌어주셨던 남일 스님 그리고 인생의 밑그림을 그려 주셨던 성안 스님께서 떠나셨을 때. 그렇게 두 번을 크게 울었다. 마음에 자리했던 중심축이 사라졌다. 털썩 주저앉았다. 이러고 있는 걸 바라지 않으실 거다. 그려주신 밑그림을 마주해야 했다. 아니면 호통 내리셨을 테니까.

업무로 다가갔다. 뜻밖에 앎의 즐거움과 자부심으로 되돌아왔다. 특히 장경판전에서의 작업은 그 공기에서도 전율이 전해졌다. ‘…봉칙조조奉勅雕造, 임금의 명을 받들어 새겨 만들다.’ 간기刊記 장경판에서 이 문구를 봤다. 각수가 느꼈을 감정이 이입되었다. 벅차올랐다. 이 일이 쉽진 않지만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 제일 큰 보람이란다. 감출 수 없는 그 감정이 얼굴에 미소로 퍼졌다. 시작한 공부는 학사 졸업이후 석·박사 통합과정으로 들어간단다. 현장실무 경험의 내공과 학문적 기술을 다듬어갈 것이다. 그리고 업무이자 대장경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한참을 신난 듯 막힘없이 풀어놓는다. 갈증이 나는지 식어버린 차를 그제야 마신다. 쉼표가 새겨지고.
차의 쓴맛처럼 안타까움과 고충도 이어진다. 장경판전에서 안내부스를 운영했던 때였다, 수학여행을 인솔하는 선생님들의 한결같은 대사. “여기가 팔만대장경이 있는 곳이야. 둘러보고 와.” 학생들은 그저 장난치며 뛰어다니고. 간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설명을 해나가는데 장경판전을 보는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런데 중단되고 만다. 인솔하던 선생님이다. 시간도 부족한대 뭐하냐며 오히려 화를 낸다. 스승의 부재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 아이들 중에 훗날 대장경 연구자가 나올지도 모를 일이지 않나. 이런 의구심이 스친다. 아이들에게 도화선이 되고 싶었던 것뿐이었는데. 촬영요청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장경판전 마당에서 작가가 법보전이 어디냐며 묻는다. 촬영요청에서부터 촬영이 진행되기까지 과정이 복잡다단하다. 그렇게 힘들게 도왔는데. 작가는 간편한 인터넷 정보검색도 하지 않았는지. 문화재를 대하는 기본적인 예의도 없어보였다. 이런 일은 다반사였다. 판전 내에서 촬영할 때에는 촬영기구들의 뾰족한 모서리를 다 감싸야하고. 촬영자도 밑창이 평평한 신발을 신어야 한다. 자칫 흙바닥 파이거나 흠이 날 수 있다. 발걸음도 조심조심 옮겨야 한다. 이러한 각별한 주의는 우리세대의 의무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을 몸소 배웠기도 했다.
초임시절 장경판전 내에서 한창 작업 중이었다.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 순간 수건이 날아왔다. 남일 스님께서 닦으라며 건네주셨다. 속으로 적잖이 감동했다. 그런데 이후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경판을 위함이었다. 땀이 떨어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또 세뇌가 될 만큼 누누이 스님께서 강조하신 말이 있다. 떨어져도 경판을 안고 떨어져야 한다고. 그럴 때마다 사람보다 경판이냐며 스님에 대한 서운함이 쌓여갔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씀들을 스스로가 체감하며 또한 말하고 있단다. 그리고 이어서 힘주어 말한다. 장경각이 아니라 ‘장경판전’이어야 한다고. ‘각閣’은 누각처럼 작은 집을 뜻할 때 쓰는 한자이다. ‘전殿’이 붙어야 적확하다.
문화재청에서 재제하고 있는 인경도 되살아났으면 좋겠단다. 문화재 보존의 의미, 가치 그리고 기준을 다시금 되새겨 볼 필요성을 말한다. 인경이 살아나면 먹 장인과 한지 장인도 대를 이어 전수될 테니까. 더구나 각수도. 유형문화재뿐만 아니라 무형문화재도 함께 보전될 수 있지 않을까. 요즘 한지에 대한 관심도 생겼단다. 공부하고 또 공부하겠단다. 포부가 넓고 깊다. 거기다가 묵직한 울림도 더해진다.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
12월 21일. 청년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날이다. 평생의 반려자와 함께하는 날이란다. 이 날은 성안 스님께서 유발상좌에게 주시는 마지막 선물이 될 것이다. 사하촌에서 자란 청년의 마음 속 깊이에는 자부심과 신념으로 나이테를 만들어 나아가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해인사의 하늘은 회색과 푸름 사이에서 왔다갔다. 비도 살짝 흩뿌렸다가 여름의 한가운데에 섰다. 8월. 올해의 마지막 여름이다. 쨍하다. 피부와 귓가에 여과 없이 전해지는 햇볕과 매미소리. 마음에 소낙비처럼 흘러내리는 땀이 그리울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