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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인가 족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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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스님의 세계 만행 26 - 원제스님 2014년 08월 390호
볼리비아를 찾는 많은 사람들은 대표적인 관광지로 아마도 우유니 사막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입니다. 저 역시도 극도로 심한 파업 상황에서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우유니에 들어갔고, 몇몇 사람들이 모여 어렵사리 소금 사막 투어를 마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우유니를 빠져 나와 수크레로 가는 길에 들르게 된 포토시가 저에겐 볼리비아를 대표하는 인상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그 곳, 해발 4090미터의 해발에 있는 포토시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은광산이 있습니다.
포토시(Potosi)라는 도시의 이름이 지니는 역사적 연원은 다음과 같습니다. 잉카 제국의 11대 왕인 와이나 카팍은 신하들에게 포토시의 산에서 은을 캐오라 명령합니다. 이 명령에 따라 광물을 캐러 온 잉카인들이 은광맥을 파려는 순간, 굉음과 함께 어디로부턴가 울림을 듣습니다. “이 산에서 은을 가져가지 말라. 이는 다른 주인을 위한 것이다” 거대한 울림에 압도된 잉카인들은 왕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고하고, 은을 채굴하는 것을 중단합니다. 고대 잉카 언어인 아이마라어에는 ‘우레와 같이 큰 굉음’을 뜻하는 포톡시(Potocsi)라는 말이 있는데, 아마도 이것이 현재의 포토시가 이름을 갖게 된 연원이라 추정되고 있습니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며 신에 대한 믿음을 갖춘 잉카인들은 이렇게 은 채굴에 조심스러웠지만 스페인 정복자들이 이 은광산을 그냥 놔둘리 없었습니다. 1545년, 그들은 은을 채굴하기 위해 포토시에 대규모 광산촌을 건설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1546년부터 1783년까지, 근 200년 남짓한 시간동안 이 \'부유한 산‘이라는 뜻의 세로 리코(Cerro Rico)에서 총 45000톤의 순은을 채굴해갑니다. 이는 이 당시 전세계 은 생산의 절반도 넘는 양이었습니다. 이중 7000톤은 스페인의 왕가로 들어갔고. 나머지는 아시아와 인도와의 교역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610년 즈음하여 이 해발 4000미터 고산의 도시는 인구 16만명이 밀집한 사치와 향락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이 은으로부터 발생한 막대한 부는 에스파냐를 16~17세기 동안 세계를 제패하는 강력한 국가로 만드는 데 큰 일조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 풍요의 이면에는 이 은을 채굴하는 과정에서 정복자들이 안데스의 원주민들을 강제로 징집한 어두운 역사가 있습니다. 정복자들은 은 원석을 정련하기 위해서 수은을 사용했는데 이에 동원된 수많은 원주민들이 수은 중독으로 목숨을 잃어갔습니다. 원주민들의 죽음으로 노역이 부족해지는 상황에 처하자 정복자들은 해마다 2000명 정도의 아프리카 노예들을 이곳으로 데리고 와서 안데스 원주민들의 자리를 대신 메꾸었습니다. 이렇게 유럽의 부흥이 절정이 된 시기의 이면에는 인디오와 아프리카인들의 막대한 희생이란 안타까운 사실이 함께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세로 리코의 은이 고갈되는 상황에 처하면서 은 생산 또한 줄어들었고 도시도 점차로 쇠락의 길을 걷습니다. 그럼에도 포토시의 은은 아직도 100년을 지속할 정도로 충분하다고 합니다.
포토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광산을 투어로 활용하자는 한 광부의 제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세로 리코 광산은 이들 포토시 광부들에겐 일터가 되지만 동시에 관광객들에겐 그들의 힘겨운 삶을 엿볼 수 있는 경험이 됩니다. 광산 투어는 광부처럼 옷을 입고 난 뒤에 광산 안에서 일을 하는 광부들에게 줄 코카잎과 음료수, 96도 순도의 알콜 등을 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광부들이 다람쥐마냥 볼에 한움큼 집어넣고 다니는 코카잎은 고산의 갱도 안에서 지치지 않고 일을 하고 졸음을 쫓는데 특효약입니다. 비교적 쌀쌀한 바깥 날씨와 달리 35도를 웃도는 갱도 안에서 일하는데 음료수는 필수였습니다. 높은 순도의 알콜은 그만큼 높은 밀도의 은광석을 바라는 광부들이 일을 시작하기 전 대지의 신 파차마마와 지하의 신 엘 티오에게 바치는 의례에 사용되고, 일을 하다 지치는 광부들이 마시기도 합니다.
고산의 시원한 공기와 달리 갱도 안은 후덥지근했습니다. 고산이라 산소도 부족하다 느끼는데 갱도 안은 조금 더 심했습니다. 저를 가이드해준 여자는 부지런히 갱도를 오갔지만 저는 중간중간 쉬면서 숨을 골라야만 했습니다. 지금에야 갱도 어느 정도까지 산소를 공급해주는 파이프가 들어가 있었지만 수백년전 사람들이 이곳에서 일했을 때에는 얼마나 척박한 환경이었을까요. 이미 채굴된 은광석 보따리 60킬로 정도를 손수레로 뛰어다니듯 운반하는 광부들을 보면서 저는 자연히 그들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광부들을 만나면서 저는 미리 준비한 음료수와 코카잎을 나눠드렸습니다.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도와줘서 고맙다는 이유로 힘겨운 노동의 현장에서 광부들은 관광객들을 반겨줍니다. 두시간여동안 갱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다이나마이트로 갱도를 뚫는 현장도 보고 지하의 신인 엘 티오의 석상을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지금에야 세로 리코 광산은 이 지역민들의 소유가 되어서 그들이 광물을 채굴하고 근처의 공장에서 원석을 정련하고 있습니다. 인구 20만의 포토시에 지금에는 만 여명 남짓한 광부들만이 있습니다. 게중에는 20대 초반의 친구도 있고 40대의 광부도 더러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도 다른 일보다 보수가 많다는 이유로 이 광산에서 삶을 보낸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기껏해야 마흔이 좀 넘는다고 합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오랜 세월 갱도에서 일한 탓으로 나중에는 진폐증으로 고생한다고 하고요.
세로 리코는 그들의 광산이었지만 수백년을 아껴온 은은 결국 거대한 음성의 예언대로 스페인 사람들에게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들만의 광산이 되었지만 어쩐지 삶의 조건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본래는 축복이었을 은광산이 정복자들의 침입으로 그들을 노예로 전락시킨 족쇄가 되었습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물러난 지금에는 다시 축복이 되어야 하지만 은의 가치 하락에 따른 국제적 정세며 그들의 노동 환경이나 육체적 고통이 나아진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양상은 이전 <차마고도> 다큐멘터리에 소개된 바 있는 옌징의 염전에서 일하는 여인네들의 삶을 연상케 합니다. 티벳의 고산에서 채취하는 천연 소금은 그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축복의 원천이지만 동시에 그들 스스로 무거운 소금물을 긷고 생산하고 교역해야만 하는 고된 노동에 얽메이도록 하는 족쇄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 삶의 이렇게 축복과 족쇄가 함께하는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축복과 족쇄가 아주 오묘한 형태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는 공존과 조화로 더욱 강하게 느껴집니다. 깊고 어두운 갱도 안에서 일하는 광부들에게 음료수를 건네는 순간 그들이 보여준 검은 얼굴의 하얀 미소가 자꾸 떠오르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