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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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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이명규 2014년 08월 390호
절집을 찾는 일은 퍽 즐겁습니다. 전각에 모셔진 부처님을 뵙고 그 彫像의 디테일을 발견하며 아름다움을 느끼는 즐거움도 좋고, 전각에 걸린 현판에서 뜻 밖에 추사의 글씨를 발견하거나, 기둥에 걸린 주련에서 한 소식 듣는 기쁨도 큽니다. 그렇지만, 절집 깊숙이 터잡은 전각에 이르기전에 우리를 먼저 맞이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절집의 나무와 꽃입니다.
해인사 초입의 아름드리 느티나무들을 아십니까. 그 거대한 몸피에서 오는 무거운 생명력과 경이로운 존재감만으로도 능히 살아있는 팔부신중이라 부를 만합니다. 그리고 학사대의 전나무는 또 어떻습니까.금강역사 못지 않은 드센 힘을 갖고 있지만, 새봄이면 여리디 여린 새순을 제 몸밖으로 밀어내는 섬세함도 갖고 있습니다. 절집을 에워싼 아름드리 나무들이 부처님을 호위하는 신장들이라면, 절집에서 피는 꽃은 부처님께 바치는 공양물인 것 같습니다. 제가 가끔 읽는 묘법연화경에는 꽃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무량의처 삼매에 드신 여래를 위하여 하늘에서 만다라꽃, 큰만다라꽃, 만수사꽃, 큰만수사꽃을 공양하는 대목이 서품에 나오고, 법사공덕품에서도 꽃이름이 쏟아집니다.수만나꽃,사제화,말리화,첨복화,바라라꽃,적련화,청련화, 백련화,피리질다라나무꽃,구비타라나무꽃,마하만다라꽃, 마하만수사꽃. 부처님을 공양하는 꽃들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부처님께 대한 공양 중 꽃 공양이 역시 으뜸입니다.
그런 이유로 절집에서도 꽃나무와 꽃을 많이 심습니다. 부처님을 모시는 전각 앞에는 목백일홍을 가장 많이 심는 것 같습니다. 목배일홍은 배롱나무라고도 불리는데,나무가 자라면서 수피의 껍질이 벗겨지고, 갈수록 매끈해지는 성질이 있는데, 수행자도 그렇게 번뇌에서 벗어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서울 수도산 봉은사 종루 앞에는 명품 수수꽃다리가 있습니다.
수수꽃다리는 고목으로 자라기 쉽지 않은데,아름드리 고목으로 자라난 그 樹形이 퍽 기특하고 장엄할 뿐만 아니라, 4월이면 한가득 꽃을 달고 뿜는 향기 또한 일품입니다.아산 인취사의 연못에서는 여름이면 청련, 백련, 적련이 피어오릅니다.연꽃은 꽃 중의 으뜸이라 경전에도 자주 나타납니다.무더운 여름은 꽃을 피우기 적합하지 않은 때이지만, 연꽃은 무려 열가지 공덕을 갖추어 꽃을 피워냅니다.연꽃의 열가지 공덕 중에서 저는 진흙탕에서 피지만 단 한방울의 오니도 꽃과 잎에 묻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놀랍습니다.과학자들이 연꽃과 연잎의 표면구조를 연구하여 오염물질이 묻지않는 lotus effect란 원리를 알아냈다고 합니다.
즉, 나노수준의 표면물리학에서는 표면이 거칠면 거칠수록 발수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연꽃에는 수용성 오염물질이 잘 묻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입니다. 연못에서만 꽃이 피는 것은 아닙니다.못을 지나면 절집 화단에서도 꽃이 피어납니다. 절집의 화단은 전각 주변 이곳 저곳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불두화, 능소화, 나리꽃, 부처꽃도 볼 수 있습니다.
불두화는 수국과 비숫하지만,잎모양이 세갈래로 나뉘어 있고,초파일 무렵 꽃을 피우고, 꽃을 피우고도 열매를 남기기 않아, 절집에서 즐겨 심습니다.능소화는 임을 사모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처자의 전설이 있는 꽃인데, 사대부집이나 절집에서 즐겨심던 여름꽃입니다.나리꽃도 백합과의 식물로 여름에 꽃을 피워내는데, 도발적인 모습으로 강한 원시적 생명력을 갖고 있습니다.부처꽃이란, 어떤 마음씨 착한 불자가 연꽃을 따서 부처님께 공양하려고 하였는데 물이 불어 연꽃을 딸 수 없게 되자, 한 도인이 부처꽃을 가리키며 이 꽃으로 대신 공양하라고 해서 이름이 부처꽃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름난 꽃들만 절집 마당을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절집은 들꽃을 받아 키우는 데도 전혀 인색하지 않습니다.
들꽃들은 특히 ‘부도’라고도 불리는 ‘승탑’들이 모여있는 승탑밭을 즐겨 찾습니다. 고승,대덕들의 공력을 받아서 그런지 승탑밭에서는 들꽃들이 잘 자라납니다.개양귀비 씨를 받아 키우기도 하고, 애기똥풀, 망초, 도라지꽃, 보리뺑이, 패랭이, 괭이밥 등이 넉넉하게 각자 제자리를 잡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절집 마당은 어느 것도 물리치지 않고 이렇게 늘 나누기 때문에, 꽃이 끊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절집에서는 어느 계절이나 꽃을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을 갖고 절집 구석구석을 돌아보면, 겨울의 복수초에서 시작되어, 연이어, 동백, 목련, 매화,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 수수꽃다리,나리꽃,능소화, 목백일홍으로 늦여름까지 이어집니다. 가을이 되면, 국화과의 꽃들이 대세를 이루는데, 쑥부쟁이, 벌개미취, 구절초 등이 자리를 잡습니다. 물론 코스모스도 빼놓을 수 없지요. 부처님에 대한 꽃 공양이 잠시도 끊어지지 않게 하려는 뜻이겠지요. 자연이 키우는 꽃만으로 부족하면 이제는 사람이 나서서 꽃을 팝니다.
시인 이진명은 삼각산 ‘도선사 입구에서 뻘건 플라스틱 동이에 몇다발 꽃’을 ‘지질러 앉아’ 파는 ‘아줌마’한테 흰소국을 사놓고도, ‘부처님 앞에는 얼씬도 않고’ 그냥 내려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젠장, 꽃을 이런식으로 사나’라는 시로 적었습니다.부처님께 올리는 공양 중 꽃공양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이번 여름에는 승탑밭에 올라가, 그곳에 피어난 나리꽃을 찾아서, 몇송이 솎아낸 다음, 정성스레 다듬어 공양으로 올려볼까 합니다.
연꽃 공양만은 못하더라도,부처님께서 기쁘게 허락해주시지 않을까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