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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장스님의 기사로 재직하시는 성계웅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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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선우海印善友 - 무구 2014년 06월 388호
길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찾아야 했고 만들어서 다녔어야 했다. 고달팠던 살림살이에 막 봄바람이 불어왔던 시절에도 절집은 여전히 매서운 겨울이었단다. 30여년 전이 그랬다한다. 산문을 나서는 스님을 보필하며 길을 따라 함께했다. 스물네 살의 청년이었다. 그 길을 따라 30여 년흘러왔고 지금은방장스님을 모신지 스무해가 지났다. 이젠 돋보기안경 너머로 그날을 회상한다.

해인사에서의 시작과 당시 정경이 궁금합니다.

1982년 겨울이었어요. 집안 작은할머니께서 권유하셨죠. 당숙 되시는 원명 스님도 계시니 일도 돕고 수양도 해보며 지내는 게 어떻겠냐고. 그렇게 해서 기사로 들어왔지요. 당시 기사 대우는 좋았죠. 보시금이 30만원 정도에다 철마다 양복을 해줬고. 사무장이 8만원 정도였다고 들었는데 기사가 흔치 않았던 시절이어서 가능했죠.

해인사에서는 산판을 했었죠. 당시 낙엽송 벌목을 하고 대체식수로 잣나무를 심었다더라구요. 그때 제가 했던 일은 새벽 산에 가서 나무를 실어내리는 것이었죠. 화석연료에 의존했던 시절이었으니까. 겨울, 동이 틀 때 땅이 녹아 차가 올라갈 수 있을 때까지 올라가죠. 이후에는 원주스님을 따라 시장을 보거나 스님들 관공서 업무 보실 때 모시고. 24시간 모자랄 정도로 정신없이 바빴어요. 당시 종무소는 지금의 접수처자리 한 칸 정도. 단촐했죠. 사무장, 서기, 기사 각 1명이 전부였고. 외부에 산감 4, 5명이 있었어요. 산감은 밤에 주민들의 벌목을 감시하던 도찰업무를 봤죠. 매표소 직원 분들도 계셨고. 그리고 도감스님이라고 논과 산을 관 리하는 일명 농감스님이 현재 홍제암에 계시는 종성스님이셨고 아래 산감을 거느리셨죠. 농감스님께서 전반적인 일을 다 맡아보셨는데 스님을 따라 다니며 일도 많이 배웠어요.

기사로서 스님들을 수행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들려주세요.

입적하신 명진 스님, 일타 스님을 모시고 가다보면 뒤에서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머리 깎으라고. 그땐 총각이라 바깥세상이 좋아보였었죠.(웃음) 그리고 83년부터 해마다 겨울에 말사감사를 다녔을 때예요. 지금 우화당에 계신 정원 스님이 총무국장이셨을 때인데. 공양을 하러 식당에 갔어요. 한창 공양 중인데, 정원 스님은 공양을 끝내시고 일어나서 가자고 하시거든요.(웃음) 그런데 된장국이 늦게 나오는 바람에 빨리 먹어야 되니까, 입천장을 홀랑 데기도 했죠.(웃음)

요즘은 골짜기마다 길이 나 있고 내비게이션도 있고 차가 못 들어가는 곳이 없죠. 하지만 당시 산청, 함양, 거창 산골짜기에 있는 암자를 찾아다닐 때는 길도 없고 걸어 다녔어요. 저 산에 있다, 하는 것만 알고 나서는 거죠. 어딨는지 모르니까 (웃음) 국장스님하고 산세를 보고, 저도 서당개가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저기가 양명하니 저쯤에 있겠다하고.(웃음)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가도 못 찾기도 했었죠. 지리산에 있는 어떤 절은 3년 동안 찾지 못한 적도 있었어요.그 이후에 찾긴 했는데, 알고 보니 근처에 있었더라구. 우거진 숲에 가려 보지 못한 거죠.(웃음) 옛날엔 눈도 많이 와서 차도 못 가고. 하루에 한 군데나 많으면 두 군데를 다녔어요. 도로정비도 안 되었던 때라 90년 전까지 말사감사에 참 애로점이 많았어요. 스님들은 절 찾으려 새벽같이 나와서 하루종일 굶으며 찾아갔는데 그곳 스님이 식은밥에 짠지를 내어주시더라구요. 허겁지겁 먹었던 기억이 나요. 그것도 어찌나 고마웠던지 나오면서도 인사를 몇 번이나 했어요. 한번은 지리산 영원사에 감사를 갔을 때예요. 매해 걸어서 다녔거든요. 재무스님과 당시 권부현 씨가 사무장이었을 때. 새벽 어두컴컴할 때여서 영문도 모른 채 갔죠. 왠지 길이 푹푹 빠지는 거예요. 밤에 내려왔는데.마을 입구에 사람들이 모여 있어요. 손에는 몽둥이나 빗자루 같은 걸 들고. 새벽 지나왔던 길이 전날 밤에 막 도로포장을 해서 채 마르지 않은 길이었던 거죠. 마을의 숙원사업이었는데 그 포장도로를 세 사람이 엉망으로 만들어놨으니 얼마나 화가 났겠어요.(웃음) 그래서 마을사람들과 합의를 봐서 재정비하는 데 2, 30만원을 드리고, 막걸리 두세 말을 받아드리기로 했죠. 뒷꼭지에 대고 무슨 말씀을 하실까 싶어 얼른 빠져나 왔는데, 사무장이 감사서류를 두고 와서 다시 찾으러 갔다가 애먹었죠.(웃음)

80년대 중반 농지개량사업을 했죠. 농지개량조합에서 해인사 경지정리작업을 해준다고 해서. 흩어졌던 해인사 땅을 모아야 되는데 그러려면 마을사람들과 협상을 해야 했어요. 현재 홍제암에 계시는 종성 스님께서 매일 저녁에 마을에 내려가서 협상을 하셨죠. 많이 고생하셨어요. 그리고 방장스님께서 주지소임을 보실 때 해인사 토지전산화 작업을 하셨는데 지금 해인사 토지관리에 큰 힘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보람을 들려주신다면.

마장동, 초막골에 대체식수를 했거든요. 손가락만 큼 작은 나무를 심었는데 지금 아름드리 숲을 이루고 있잖아요. 기분이 좋죠. 그리고 지금의 청화당 자리가 옛날에 방앗간이 있었죠. 명진 스님이 계실 때 방앗간을 허물고 청화당을 지었거든요. 겨우내 지게차로 석축작업을 했어요. 그런데 어떤 문화재위원이 그 석축을 보고 문화재라고 하니까, 속으로 웃었죠.

해인사의 종무원으로서 수십여 년을 함께해 오시면서 아쉬운 점과 바람들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한때 직원들 복지차원에서 해인사에서 임대해주는 식당이나 불교용품판매점이 있었죠. 적은 보시금이지만 도움이 컸죠. 지금은 유명무실해져서. 저는 그 혜택을 받았지만 현재 40대 종무원들은 혜택을 못 받게 됐죠. 가정을 꾸려나가기가 많이 힘들 겁니다. 자녀를 대학교에 보내려면 맞벌이를 해도 빠듯하죠. 등록금 천만원시대잖아요. 최소한 최저임금제라도 보장해 줘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합동매표소를 하던 때였는데, 해인사와 가야산국립공원 직원들이 함께 일을 했어요. 월급 차는 4, 5배 정도. 상대적 박탈감이랄까, 허탈했죠. 당시 원택 스님께서 총무국장으로 계실 때 이런 격차를 줄여보겠다고 하셨는데, 잘 안 됐죠. 현실적 여건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종무원도 해인사에 기본적 소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심과 열정이 있어야 하는데 급하게 사람을 구하다보니. 그런 아쉬움은 있어요. 스님들께서도 지나가는 말이라도“참 힘들지요”“고생이 많습니다”따뜻한 말 한마디가 재가종무원에겐 힘이 되죠. 작지만 따뜻한 배려가 중요한 것 같아요.

가야산은 여름을 향한다. 더 진한 녹음綠陰이 번진다. 앙상한 가지 끝에 풀어내는 초록이 늘어지고. 그늘의 품도 넓어진다. 새소리를 품고, 커나가는 이파리들을 안고. 세차게 내려붓는 비바람에도 뿌리는 더욱 땅을 딛고 있다. 해인사에도 잘 보아야만 보이는 뿌리들이 있다. 흙 속의 양분을 받고, 햇살을 받고, 빗물을 받아 단단한 흙 속에 뿌리내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