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바람이 흘러든다. 사람들의 바람들이 모인 여울목. 기왓장에 풀어낸 깊은 바람을 덮고 사는 해인사. 품고 돋아나는 흐름의 시간이 짙어지는 5월이다. 김영자 님께 인터뷰를 허락받으러 갔다 할 말 없으시다며 등 떠밀려 나왔다. 따님이신 종합접수실에 재직하시는 이토실 님과의 반쪽짜리 인터뷰로 해인선우의 문을 연다. 교무국장스님께서 해인사의 마스코트라고 칭찬하시는 맑고여린눈을가진토끼띠아가씨. 이토실님
특유의 반달눈웃음이 편집실에 연신 유쾌하게 퍼졌다.
현재 어머니와 함께 종무원으로 재직하시는데요. 어떻게 시작하시게 됐는지.
오게 된 동기가 한편은 마음이 아프기도 한데요. 제가 중학교 졸업할 무렵부터 엄마는 기와접수처에서 일을 하셨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를 진주에서 다녔기 때문에 가족과는 떨어져 지냈었죠. 그곳에서 자리 잡으려는데 어느 날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손을 다쳐서 한 달간은 일을 할 수 없으시다고. 기와접수처 일을 봐 줄 사람이 없어서 난처한 상황이 되었다구요. 엄마의 부탁이었죠. 하는 수 없이 정리하고 돌아왔어요. 그렇게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 일을 도와드렸죠.‘기와 불사 하시고 가세요!’하고 열심히 했어요. 그런 저를 과장님께서도 기특하게 봐주셨는지 접수처 일을 해보겠냐고 하셨어요. 가족과 떨어져 있던 시간들도 있었고. 엄마도 함께했으면 하고 내심 바라시는 것 같기도하고. 월급은 사회보다 적긴 해도 한번 해볼 만하다
싶었어요. 엄마가 기와접수처로 돌아오던 날, 전 종합접수실 동판 담당으로 시작하게 되었죠. 스물네 살의 여름이었어요.
해인사 종무원 중에 최연소이신데요. 잘 어울리시는 모습이 보기 좋아요. 처음 적응하는 데 힘들진 않았는지.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있으면서 달라진 점이 있는지.
처음에는 적응을 잘 못했어요. 이모, 삼촌 격이신 종무원 분들과 일을 해야 하다보니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가 어렵더라구요. 그래서 처음엔 건방지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죠. 지금처럼 지내게 되기까진 시간이 흘러야 했어요. (사석에서 토실 씨가 어머니를‘영자씨~’라고 능청스레 부르면 그 자리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엄마는 유독 둘째언니를 더 좋아하셨고, 막내인 전 아빠의 사랑을 더 받으며 자란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저는 엄마와 가깝단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하지만 해인사에서 함께 일을 하면서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알게 되고 나니, 엄마를 점점 이해할 수있게 되고, 이젠 엄마가 편찮으시다면 더 좋은 약을 구해드리고 싶고 그래요. 엄마도 저를 점점 의지하시는것 같고. 덕분에 엄마와 더 친해졌달까요.(웃음) 제가 가끔 엄마에게‘영자씨~’하고 부르면 엄마도 은근 좋아하시는 것 같고.(웃음)
김영자 님께서 지난해‘올해의 종무원상’을 받으셨잖아요. 그 친절함이 남다르다고 소문이 자
자합니다. 소개해 주세요.
어느 날 몇 분이 동행해서 오셨대요. 기와불사를 하고 싶은데, 돈이 없다고. 송금해주면 안 되느냐고 부탁하셨는데 엄마는 선뜻 그렇게 하시라고. 그런 일이 있은 후 종무소로 편지 한 통이 왔대요. 엄마의 친절함에 대한 고마움을 편지에 담아 보내셨다고 하시더라구요. 한번은 제가 기와보살님의 딸인 줄 모르고(웃음) 보살님들께서 말씀을 나누시는 걸 들은 적이 있어요. 기와보살님이 커피라도 한잔 더 내주시려고 하시니 기와 한 장이라도 더 쓰고 가야겠다고. 그럼 전 (피식) 속으로‘내 손님 다 뺏기겠네’했죠. 접수실에 오시는 보살님들에게 저도 잘한다고 하는데, 엄마의 친절은 저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나 봐요. 그리고 공양 때 나온 떡을 잔뜩 싸들고오시는데, 절집에서나 흔한 떡이지만 밖에서는 귀한지라 관람객들에게 시식하게 권하신대요. 사소하지만 성심껏 다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전 아직 엄마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더 많은 것 같단 생각을 하게 됐어요.
김영자 님의 친절함에는 진심이 묻어나는 것 같아요. 보람이 있으시다면.
한 아가씨가 기와접수처에서 머뭇거리길래 불사를 권하셨대요. 그래서 시험에 합격하게 해달란 소원을 적었나봐요. 몇 년 후에 그 아가씨가 찾아왔대요. 그때 기와에 썼던 축원이 이뤄졌다고, 기와보살님 덕분이라고, 고맙다고. 그리고 새로운 소원을 담아 또 썼다고. 그때 엄마는 보람을 느끼셨다고 하시더라구요. 전 다른 부서를 옮겼다 접수실 동판으로 자리 잡은 지 일년이 지났는데요. 이젠 절 찾아오신 분들이 점점 많아지고 칭찬해 주실 땐 보람을 느끼죠. 좋은 데 시집가야 될 텐데라며 걱정도 해주시고.(웃음) 이젠 안정이 되어간다 싶고 일도 재밌기도 하고. 특히 자부심이라면 해인사 본사에 있다는 거요?(웃음)
엄마와 딸로서 그에 대한 이야기 들려주신다면.
몇 해 전 대장경축전 때, 기와 불사가 하루에만 몇 백장이 나갔대요. 수백 장의 기왓장을 들고 나르고. 많은 스님들께서도 도와주셨지만 엄마도 손목이 많이 약해지신 것 같아요.(한숨) 그럴 땐 옆에서 보면 마음이 아프죠. 지금까지도 직업병처럼 지니고 계신 것 같아요. 그리고 절에서는 엄마를 엄마라 부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죠.‘보살님’이라고 부르라고. 나도 모르게 입 밖에 나오면 바로‘엄마라고 부르지 말랬지’라고 매섭게 혼내시다가도, 정작 무슨 일 있으면 (웃음) 바로 딸을 찾으시더라구요. 한번은 종무소만 회식을 한 경우가 있었어요. 제게 그래요. 기와보살님에게는 말 하지 말라고.(웃음) 순간 모호한 상황에 고민을 잠깐 하게 되는데, 기와보살님에게는 말하지 않지만 (웃음) 결국 엄마에겐 말하게 되죠. 또 그런 적도 있어요. 사무실의 제 책상이 지저분하다면서 여느 엄마처럼 잔소리를 하시면서 대신 정리해주시곤 할 땐, 보살님이 아닌 영락없는 엄마죠.(눈웃음이 활짝 핀다)
김영자 님과 함께한 자리였다. 유학 보낸 자녀를 둔 어느 아버지와 어머니의 간절한 바람이 기왓장에 풀어질 때면, 당시 떨어져 있던 당신의 딸들이 생각나서 아프다고 하셨다. 품고 있지만 더 품어주지 못한 어머니의 마음이었으리라. 툭. 터지듯 나온 한 덩이 응어리진 아프고 진한 딸들에 대한 사랑이 흘러나왔다. 그 앞에 앉았던 딸은 엄마를 붉어진 눈으로 그저 바
라보고 있었다. 겨우내 품고 품었을 가야산 나목은 쉼 없이 돋아나고 있다. 푸른 열정을 찰나에 온전히 쏟아내고 있다.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이 머문 자리에 순이 움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