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는 신라 말 진성여왕과 최치원의 발원과 체취가 살아있는 사찰이다. 진성여왕은 대각간 위홍의 등신불을 기원하는 발원으로 두분의 비로자나불(883중화3년 계묘) 을 조성하여 해인사에 모셨으며, 해인사에 출몰한 도적들로부터 해인사를 지키다가 사망한 스님들을 위로하기 위해 최초의 위령탑(비석거리 길상탑 895 진성9년 )을 조성하고 그 탑 기록문을 최치원에게 쓰게 하여 기록된 지석이 지금껏 내려오고 있다. 최치원시
광분첩석후중만狂奔疊石吼重巒
인어난분지척간人語難分咫尺間
상공시비성도이常恐是非聲到耳
고교유수진농산故敎流水盡籠山
미친물 바위치며 산을 울리어
지척에서 하는 말도 분간 못하네
행여나 세상시비 귀에 들릴까
흐르는 물시켜 산을 감쌌네.(해인사지 지관)
1579년 한강 정구가 기록한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에는“최고운崔孤雲의 시 한 수가 폭포 곁의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장마철이면 물이 불어나 소용돌이치며 바위를 깎아 내는 바람에 지금은 더 이상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한참 동안 더듬어야 어렴풋이 한두 자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又刻崔孤雲詩一絶於瀑傍石面 而每年霖漲 狂瀾盪磨 今不復可認 摩挲久之 依俙僅辨得一兩字矣)”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1725년 정식이 쓴 〈가야산록伽倻山錄〉에는“글씨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쓴 것이다. 승려가 ‘시내 가운데 돌에 최치원의 친필이 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글자가 마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에 옮겨와 다시 새긴 것입니다(卽尤庵筆也 僧曰溪中石上 有孤雲親筆 而年久字剜 故移刻于此云)’”라고 되어있다. 이후 조선의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이 풍랑에 점차 마멸되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맞은편 암벽에다 최치원의 둔세시를 자신의 글씨로 다시 새겨 넣었다.다시 새긴 암각문이 홍류동 계곡 맞은편 암벽에 전해 내려온다.
이증원 이시원
광분첩석후중만狂奔疊石吼重巒
인어난분지척간人語難分咫尺間
상공시비성도이常恐是非聲到耳
고교유수진농산故敎流水盡籠山
우암서尤庵書
지관스님이 쓴 해인사지에는 암벽에 둔세시와는 전혀 다른 글씨체로 두인에 이증원 이시원이라 쓰여 있고 관지부분에 우암서尤庵書라 적혀있다고 밝히고 아마도 송시열의 글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후학들이 다시 기록해둔 것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일부에서는 둔세시와 관지의 글씨체가 달라 우암이 쓴 글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으나 정식의 유가야산록(1725년)의 기록과 해인사지의 기록으로 보아 우암 송시열의 필체로 보는 것이 무난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