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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히로시마(廣島) 후도인(不動院) 소장 비로자나불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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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불화 이야기 - 김현정 2014년 03월 385호

<비로자나불도>(부분), 비단에 채색, 고려시대 13세기 중반, 히로시마 후도인 소장, 일본.

고려불화의 여러 가지 특징 중에 하나는 그림들이 모두 비슷한 도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모두 같은 그림이 아닐까 할만큼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한 작품도 똑같지 않다. 불보살의 자세, 배치 등은 같아도 세부 표현의 차이를 보면 각 작품의 특징이 드러나 있다.
그런데 이 비로자나불도는 지난 호에서도 강조한 바와 같이 자세가 매우 특이하다. 양손으로 오른편 무릎을 감싸 안고 편하게 바닥에 앉아 허공 위 어딘가를 응시하고 계신다. 보통 불화 속의 부처님은 연화대좌 위에 앉아 가부좌, 정면관正面觀을 하고 눈은 뜬 듯 감은 듯 내려깔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는게 일반적이다. 이 작품의 비로자나부처님은 여느 부처님이나 갖추고 있는 연화좌도 없이 바닥에 앉아계시는 것은 물론이고, 시선의 방향 또한 다르다. 솔직하게 나도 그저 늘 그런 작품인가보다 하였는데, 이렇게 글을 쓰고 보니 그 이유가 정말 궁금해졌다. 자비로운 부처님이라면 하계下界의 중생들에게 그 눈길을 주셔야 마땅하다. 그런데 비로자나부처님이 어떤 분인가. 부처님 자체가 화엄장엄세계華嚴莊嚴世界이고, 우주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지권인의 여러 의미 중에 하나가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닌 것을 상징한다. 부처님이 세상 중생들에게 눈길을 주고 있다면 부처님과 중생의 경계와 위치가 분명이 나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비로자나불이 우주 자체라는 화엄의 세계를 깨달으면, 부처와 중생의 경계는 그 순간 무너져 버리고 온 세상의 삼라만상과 내가 하나가 되어버리니 바라볼 곳은 단지 허공虛空 뿐일 것이다. 깨달음은 번뇌에서 시작되므로 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아, 저 시선 하나로 해결해버렸구나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든다. 누군지 비록 알 수 없지만 이 작품을 그린 그 분과 내가 저 우주 공간 어딘가에서 조우遭遇 한 느낌이다. 이런 시각으로 이 비로자나불도를 다시 한 번 보니 화면에 가득 차 있는 수 많은 부처님도 달리 보이고, 비로자나부처님을 크게 감싸고 있는 둥근 광명이 이제야 어디인줄 알겠다.
이 불화의 제작 시기는 양식적인 특징을 통해 13세기 중반을 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현존하는 고려불화 중에서 아주 이른 시기에 제작된 작품이라는데도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당시 고려를 살펴보자. 몽고(元)가 첫 번째로 고려에 침공한 때가 1231년이고, 이후 고려는 30년을 버티고 항전하였다. 왕실과 귀족은 강화도로 도성을 옮겨 피난하였지만 온 나라가 힘을 합쳐 불타버린 팔만대장경을 다시 판각하였다. 그것이 1236~51년 사이의 일이다.
보조지눌(普照知訥 1158~1210) 스님께서 조계산 송광사(당시는 송광산 길상사라 하였다)에서《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팔표하고, 정혜결사를 이끌기 시작한 것이 1200년 초의 일이다. 이때 정혜결사에는 많은 백성들은 물론이려니와 수백의 왕족과 귀족도 참여했다고 한다. 지눌선사는 화엄사상을 통해 교敎와 선禪이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고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은 화엄의 세계를 설명하였다.
앞서 이야기 하였듯이 13세기 전반기 고려는 정치적으로는 무인정권이 끝나갈 무렵이었고, 그 혼란 중에 원나라의 등장으로 국제 정세 또한 고려에 불리한 쪽으로 치닫고 있었다. 불교는 교敎와 선禪이 대립,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이때 이를 화해와 회통會通으로 이끈 것이 보조지눌 선사의 정혜결사였던 것이다. 바야흐로 선종禪宗을 통한 불교의 혁신운동의 시대가 되었다. 고려불화에 있는 수많은 수월관음보살과 비로자나불은 화엄의 세계를 설명하고 있는 한편 또 다른 의미에서는 수선修禪을 앞세운 당시 불교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후도인(不動院)의 비로자나불도는 13세기 고려 불교의 모습을 설명할 수 있는 그런 현미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