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판전과의 인연, 첫 매듭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당시 판전 분위기도 들려주세요.
96년에 마을 사람의 소개로 왔어요. 허리를 다치지 않았다면 인연이 닿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와보니 무성한 잡초와 돌멩이들, 황무지 그 자체였어요. 여긴 눈도 많이 내려요. 그 해에는 눈이 내려서 차도 다닐 수 없는 길을 집에서 꼬박 1시간 반을 걸어 왔죠, 무려 20일을. 끝없이 쏟아 붓는 눈도, 매서운 바람도 피할 공간이 없었죠. 그래서 어렵게 지금의 초소를 짓게 되었구요. 눈을 헤치고 와서 또 하루 종일 눈을 치우는 일로 업무가 끝났을 정도였죠. 정말 그때 고달프고 힘든 자리여서 눈물도 많이 흘렸어요. 종일 밖에서 있다 보니 온몸이 얼어붙고, 지금까지 풀리지 않는 것 같아요. (추위에 언 듯 지금도 볼이 붉다) 그래서 보따리를 몇 번이나 쌌죠. 관광철에는 10만 명이나 몰려요. 고스란히 혼자 감당해야했지요. 5년 8개월을. 그래서 일기도 쓰게 됐죠.
첫해 어느 날이었죠. 침을 뱉는 사람, 나무나 판전 건물을 함부로 차고 훼손하는 사람. 관람객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는 태도들이 눈에 보였죠. 그래서 결심을 했어요. 판전 주변 환경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으면 함부로 행동하는 관람객도 줄어들지 않을까, 하고.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관리도 깔끔해야겠단 생각을 하게 됐죠. 그래서 그날부터 판전 주변 정리와 청소, 자기관리에 힘을 쏟았어요. 막중한 책임감이 없인 안 될 자리란 걸 알게 되었죠.
지난해 대장경 축전기간 수많은 관람객들이 다녀가셨죠, 어떠셨는지.
제가 있는 동안 두 번의 축전을 치르면서 마음이 참 뿌듯하고 좋았어요. 한 번 더 맞이할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웃음) 우리나라 최고 국보이며 유네스코 등재도 되고 자부심이 커요. 하지만 관람객들의 문화인식과 태도는 외국인 관람객에 비해 많이 뒤떨어집니다. 아직도 팔만대장경에 대해 모르는 이들도 있어요. 단체 관람으로 왔다가 기웃거리는 것처럼 보다 가죠. 안내판과 안내용 책자를 유심히 보지도 않고. 한 낮에 얼굴 벌개 진 만취객들도 오고. 특히 학생들의 관람태도가 심각해요. 장난치며 뛰어다니기는 일쑤고 창살을 차거나 쓰레기 집어넣기도 하고. 그럴 땐 마음이 참 아파요. 그리고 판전 안에 청소하다보면 쓰레기뿐만 아니라 심지어 성경책도 나옵니다.
관람객들의 태도도 천차만별이어서 관리도 정말 중요해요. 노선이 생긴 후, 불만 섞인 목소리도 있지만 관람태도는 좋아졌어요. 흙먼지도 훨씬 줄어 깨끗해지고. 다만 간혹 호기심이 많은 분들은 노선을 벗어나기도 하는데. 그럴 땐 잘 이해시켜서 그 상황을 잘 넘겨야 해요. 가끔 민원을 넣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다양한 관람객들이 많으실 것 같네요. 어떻게 맞이하시는지요.
4,5년 전이었나. 유독 그 당시에 기독교신자들의 방문(?)이 빈번했어요. 어느 날 기독교 신앙을 가진 60대 노인 열 분이 오셨는데, 제게 질문을 하는 겁니다. 왜 이런 곳에서 일을 하냐고. (웃음) 그래서 전, 기독교신자라고 했죠. 일 끝나면 예배당에 간다고. (웃음) 이러지 않으면 쉽게 물러나지 않아요.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종교와 무관하다. 역사적인 곳이다. 우린 기독교도와 불교도의 입장으로 관람해선 안된다. 조상 없는 자손이 있을 수 있나. 고려인 없이 현재 우리가 어떻게 있나. 그러니 불자가 아니어도, 이곳엔 경건함과 감사한 마음으로 와야 한다고. 조상들의 지혜를 함부로 말하고 행동해서도 안 된다고. ‘난 단지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이곳에 있고 지키는 것뿐이다,’ 라고.
제일 염두에 두시는 점은 무엇인가요.
나에겐 자나 깨나 화재예방이 최우선이죠. 온 신경을 쏟아야 해요. 축전 45일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매일 매일이 중요합니다. 난 지금까지 업무에 충실했지만, 한 번의 화재 때문에 내 18여년의 공든 탑은 한순간에 사라져요. 그렇기 때문에 관리자 입장에서 관람객들 관리가 중요하죠. 특히 손에 든 것을 유심히 봐야 합니다. 생수병을 들고 있는 관람객들이나 분위기가 이상하면 꼭 따라 붙어야 하고요. 그 사람이 나가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죠. 화재 예방, 관람객 관리, 도량을 정결하게 하는 것. 그 어느 것 하나도 놓칠 수 없어요. 그래서 출근부터 퇴근까지 긴장과 집중을 놓을 수 없죠. 이젠 원형탈모까지 생겼어요.
이 문화재는 더 이상 만들 수 있는 국보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더 소중하고, 우리 집 보물이라고 생각해야 해요. 대한민국 온 국민이 지켜야 하구요.
그리고 후임자가 잘 왔으면 좋겠어요. 저도 언제까지고 이 일을 계속 할 순 없잖아요. 지금의 보수를 받고 일하긴 쉽지 않지만. 그래서 해인사에서는 후임자 교육에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막중한 책임감을 지닌 사람이었음 좋겠습니다.
보람은 언제 느끼시는지.
당시 첫 월급이 40만원이었어요. 아이들 셋을 키우기에는 부족했지만 지금까지 잘 성장했고 결혼도 시켰고. 지금은 막내가 곧 박사학위를 받아요. 참 뿌듯합니다. 판전에 쏟은 정성과 희생에 대한 또 다른 공덕 덕분일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관람객들 중에 날 알아보시고 격려해주시는 분들이 계세요. 덕분에 힘이 많이 나죠.
인터뷰의 끝이 보일 무렵까지 안진만 팀장님은 초소 안의 CCTV모니터와 장경판전을 수시로 살핀다. 그 매서운 시선 끝에는 장경판전 지킴이로서의 신념이 진하게 묻어난다. 해인지를 건넨 손이 부끄럽게 한 말씀 하신다. “여기에 책이 있으면 안되는 기라. 책을 보면 업무가 흐트러져. 그래서 여기엔 책을 두지 않아요.(그러고 둘러보니 한 권쯤은 있을 법한 책이 보이지 않는다) 업무 철칙 중 하나야.”
가야산에도 어렴풋하게 푸른빛이 감돌고. 장경판전 마당 흙 위로 슥슥슥. 비질이 지나간다. 고운 결이 그려진다. 비질한 이의 가지런한 마음결도 잔잔히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