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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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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정진희┃마포 연화어린이집 원장 2014년 03월 385호

누구나 살다보면 자의든 타의든 돌부리에 거려 호되게 바닥에 내동댕이쳐 질 때가 있다. 남 말하기 좋은 사람들은 쓰러진 김에 쉬어 간다느니 아픔만큼 성숙한다느니 할지 모르지만 정작 넘어져 무릎이 다 깨지고 피를 철철 흘리는 이에게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말이다. 오히려 그것처럼 재수 없는 훈수도 없다. 세상이 온통 저주이고 지옥이고 내편은 아무도 없이 철저히 혼자이고 모든 사람은 웬수같기만 하니 말이다.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삐뚤어져 볼 요량으로 옆에 남은 사람들에게 포악질을 해대기 시작한다. 물론 내 포악질을 견뎌야하는 상대는 죽을 맛이다. 가족이 그렇고 직장동료들이 그렇고 죄 없는 아이들이 그렇다. 하지만 단단히 벼루고 삐뚤어질 준비를 이미 마친 내 눈엔 그 누구도 들어오지 않는다. 마지막 연민의 정마저 탈탈 털어 끊어낼 심산이다. 그때 쯤 어깨를 두드리며 잠시 떠나라 일려주는 친구가 있었다. 그때다.
비로소 안막에 걸려있던 마구니가 떨어져 나가고 세상과 미쳐 돌아가는 자신을 보게 되었을 때. 그때 해인사를 찾았다. 지난 일기에선 아무 희망도 아무 기대도 없이 잠시 떨어져 있으면 되겠다 싶어 해인사행을 잡은 듯 하다. 그저 바람이나 맞을 생각으로, 시간이나 죽일 생각으로…내가 그렇지 뭐.
역시나 큰 기대 없이 출발한 여행.
하지만 가야산 언저리가 멀찍이 보이고 마을 자체가 가야스러운 해인사 아랫마을을 지날 때 죽어 있는 줄 알았던 가슴이 요동을 쳤다.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어떤 자극도 없었다.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가슴은 먹먹해지고 자꾸만 삐져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난 어쩌면 아무도 모르게 울 공간이 필요했었나 보다.
그때부터 내 마음은 처음 불교에 귀의하던 초등학생 3학년이 되었다. 좋은 것에 열망하고 싫은 것에 단호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나보다 남을 더 배려했던 쑥스럽고 사랑스러운 순수의 나, 그땐 그랬다.
새벽예불의 혹독한 기운은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매섭고 따가웠다.
지금 너 자신을 보라고. 미친 망아지 한 마리가 미쳐 날뛰는 꼴을 보라고, 정말 네가 원하는 삶이 이런 모양이었느냐고…. 108배를 마치니 호되게 혼쭐이라도 난 냥, 몸은 고단한데 머리는 맑았다. 힘들다 생각되는 일도 언젠가는 끝나게 마련이고 이 또한 지나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알지 못했는데 조금은 믿음이 가진다. 그렇게 108배를 또 올리니 한번 터진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눈물을 감추려 또 108배를 올리니 머릿속에 웅크리고 있던 못된 어리석음이 새벽 맑은 기운에 꼬랑지를 감추며 사라졌다. 묵혔던 설움을 쏟아내고 참선에 임하니 한결 호흡이 안정되었다. 이젠 조금 살 것 같다. 아직 장담은 할 수 없고 언제 또 내 마음이 정신 줄을 놓고 나를 흔들지 모르겠지만 귀한 예방주사 덕분에 한동안은 살겠다. 잘난 것도 없으면서 늘 잘난 척 살아왔던 나. 부모 탓, 남편 탓, 세상 탓만 했던 나. 내편은 아무도 없는 참 그지같은 인생이란 생각했었다. 참 못나고 어리석다. 물론 이런 어리석음이 절 몇 번에 정화가 되었다거나 참선 몇 분에 해탈을 했다거나 하지는 분명 않지만 가슴 속 깊이 값진 믿음과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나에겐 세상 누구보다 든든한 백이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내 속을 천길만길 알아봐주고 들어주시는 든든한 백,
한결같은 믿음과 지혜를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따뜻한 멘토,
나 힘들 때만 찾아와 투정을 부려도 여전히 손 벌려 환영해주시는 든든한 보험 같은 스승.
항상 옆에서 나를 지켜보셨지만 외면해도 그저 기다리는 바보 같은 망부석.
잊었던 옛 애인이라도 다시 만난 듯 다시 천천히 사랑가를 시작해도 되겠다는 설레임과 기대감에 가슴이 따뜻해진다. 나도 사람이었다. 나를 찾았다.

해인은 그렇게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나를 절복시켰다. 기쁘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