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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종무소 총무과장 노재정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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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선우海印善友 - 무구 2014년 02월 384호

해인선우는 해인사 재가불자인들의 삶 속에서 품어져 나오는 향기에 귀 기울여 본다. 청년이 어느덧 중년이 된 시간. 해인사에서 스무해를 보냈다고 한다.
종무소 총무과장 노재정 님을 해인사의첫 번째 선우로 소개한다. 인터뷰를 약속한 시각,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편집실에 들어선 노 과장님을 만났다. 달고 쓴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해인사 종무원 첫 급여 43만원, 가장으로서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 시작이 절로 궁금해집니다.
34살 무렵이었을 겁니다. 아버지와 장인어른의 봉양을 위해 부산에서의 살림을 정리하고 이곳 고향으로 왔어요. 처가와 인연이 깊었던 해인사에서 종무원의 생활을 시작했었구요. 95년 당시 부산에서 180만원의 급여를 받다가 해인사에서는 43만원을 받았습니다. 생활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지만 장모님께서 보이지 않게 많이 도와주셨죠.
첫 업무는 통제소였어요. 일 년 이후에는 교무주임으로 행자 교육을 담당했고. 그 당시에는 행자 한 기수가 50여명이나 될 때였어요.(회상하던 노 과장님의얼굴에 살짝 미소가 비친다) 어느 날 업무 때문에 마음이 상해서 집에 왔는데, 선물이 왔다고 하더군요.
행자교육을 마치시고 사미계를 받으신 스님께서 보낸선물이었어요, 그 순간 느껴지던 위로와 보람들. 덕분에 지금까지 이렇게 있는 것 같네요.
그럼 20년의 세월을 지탱하게 한 힘은 보람과 자부심이었군요. 더 소개해 주시죠.
밀레니엄의 해라고 전국이 떠들썩했던 2000년을 맞이하던 새해 아침이었죠. 종무원 가족동반으로 가야산 새해 일출을 보러 갔던 기억이 납니다. 구름 속에 가려져 일출은 보진 못했어요. 하지만 산을 오르면서 가족과 함께했던 그 시간들이 기억에 오래 남아 있어요. 좋았죠. 겨울 산을 오르려면 아이젠이 필요했는데 재무스님께서 전원 선물해 주셨죠. 그 아이젠 아직도 간직하고 있어요, 그땐 종무원식구도 지금보다 단출했지만 가족 같은 분위기였구요.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 이곳에서 과장님의 흑백사진 같은 오랜 추억을 보여주세요.
현재 가야산에는 소나무가 상당히 많고 보존도 잘 되어 있어요. 아마도 부모님 세대에 산지킴이였던 산감과 도찰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 그 당시는 누구나 참 어려웠죠. 가야산에서 땔감을 몰래 해다가 도공들에게 팔고 하던 시절이었어요. 그래서 땔감서리를 방지하기 위해 감시하는 산감이 있었고, 그 산감을 관리하는 도찰이 있었어요. 도찰은 해인사 스님이셨거든요.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아버지께서 땔감을 하시다가 산감에게 톱을 빼앗기셨는데, 톱을 찾기 위해 저를 도찰스님에게 보내셨어요. 왜냐하면 스님이시다보니, 아이들을 참 이뻐해주셨거든요. (웃음) 톱을 찾으러 간 저에게도 춤 한번 춰보면 돌려주시겠다고 하셨어요. 그러다보니 마을 아이들에게‘너 커서 뭐 되고싶냐?’하고 물어보면‘해인사 도찰이요!’하고 대답할 정도로 우리 어린 시절에는 영웅이었죠.(웃음) 그리고 어릴 적 모친이 청량사를 다니셨죠. 동짓날에는 그 전날 밤이나 새벽에 길을 나서야 했어요. 쌀을 인 모친과 함께 4Km 되는 그 캄캄한 오솔길을 걸어갔죠.
그리고 동지 불공을 드릴 때 어린 마음에 어른들 하시는 대로 절을 따라 했었죠. 무려 세 시간 동안요.(웃음)
그리고는 학교도 못 가고 앓아누워버렸죠.
어린 시절 호되게 불심의 끈을 맺어놓으셨나 봅니다.(웃음) 지금도 절일을 하시고 계시니까요.
과장님께서는 종무원을‘특수집단’이라고 표현하셨는데요. 특별한 직업(?)이기 때문에 고충과
어려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월간해인> 독자들에게 풀어봐 주시죠.
30대 중반에는 의욕이 대단했죠. 요즘 말하는 돌직구처럼 바른 소리도 하면서. (웃음) 그런데 이곳은 스님들의 수행처소이다 보니 수평적 관계보다는 수직적 관계 속에서 움직이더란 말이죠. 그런 스님들의 분위기가 종무원들에게도 전해지고, 그러다보니
군대 아닌 군대처럼 일방적인 업무 지시와 통보를 통해 움직였어요. 참다 못해 그 당시 주지스님께 한 말씀 드렸죠.‘우리 종무원들은 스님들의 종속이 아닙니다!’라고요.(웃음) 오랫동안 굳어진 시스템이 쉽게 바뀌지 않듯 저도 점점 포기하면서 순응해 갔어요. 그
러다 보니 수동적인 모습으로 변해 있던 자신을 발견했을 땐 참 씁쓸하더군요.
그리고 총무과장으로서 사측과 직원 양측에서 중간자 입장이 되어 잘 조율해야 한다는 점이 어렵습니다.
지난해 대장경축전 45일 동안 종무소 직원들은 쉬지 못했어요. 주말은 통제소, 매표소 업무를 교대로 봤구요. 정말 힘들었죠. 그래서 제가 먼저 나서서 업무를 보면서 직원들의 고충을 함께 나누려 애썼죠.
그리고 하루 중에서 통화 업무가 제일 많아요.(지금도 휴대폰의 진동소리가 울린다.)

마지막으로 청마의 해를 맞아서 종무원분들에게 전하고 싶으신 말씀도 함께 부탁드립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큰 일, 작은 일이든 함께 참여한다는 마음을 내주셨음 좋겠습니다. 그러면 해인사 종무원으로서의 자부심과 애사심愛寺心이 생기지 않을까요.(웃음)
‘희사심喜捨心’은 즐거움을 버린다는 의미이다. 이는 나만의 즐거움보다 우리의 즐거움을 지향한다는 뜻이다. 양보와 희생의 미덕으로 희사심은 빛난다. 조금은 손해 보는 것 같고 억울한 마음 한 조각 털어내고 나면, 그 자리에 넉넉한 미소가 남을 것이다. 이십여 년 시간의 흔적은 노재정 님의 얼굴에 선한 미소로 자리잡고 있다.
눈이 내린다. 가야산 푸른 소나무에도 뿌연 하늘이 내려앉는다. 그리고 서서히 해가 드러나면 해인사 처마 끝, 고드름이 길어진다. 해인사에도 이렇게 겨울이 흘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