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가 남긴 유명한 문답이 있습니다. 한 학술회의를 마친 뒤 20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하나를 얘기해 달라는 한 청중의 질문에 그의 대답은 미처 예상치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동양의 불교가 서양에 들어온 것을 20세기 최고의 사건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밖에 아이슈타인은 그간 서구의 문명은 자연을 객관 대상으로만 인식해 이를 이용하고 소모하는 식의 역사적 발전을 이루었다고 파악하여, 그런 이유로 자연 세계와 영적 세계가 합쳐질 수 있으면서 현대의 과학적 요구에 상응할 수 있는 범우주적인 종교는 바로 불교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제가 이러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었던 것은 2000년에 <불교의 이해>라는 강의를 들으면서였습니다. 당시에 저는 서양에서 불교가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문헌적인 자료조사나 몇몇 귀동냥을 통해서만 파악하고만 있었습니다. 외국에 다녀가거나 살아본 적도 없었고, 서양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접한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었기에 굉장히 먼나라의 요연한 이야기로만 들렸습니다. 사실 강의를 듣고 자료를 조사해가면서도 저는 불교가 그렇게 서양세계에 넓고 깊은 영향력을 보이고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가에 대한 회의를 가졌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불교를 연구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엘리트’의 위치에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사회 저변에 이들이 미칠 영향력이 상당할 것은 짐짓 가늠하겠으나 그것이 과연 일반 대중들의 삶에까지 들어설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관점으로 가진 회의 중의 하나는 불교를 대하는 방향에서였습니다. 서양의 엘리트들은 기독교 중심의 세계관과 문명 발전 과정들에 비판을 가하고 이를 자연과 우주를 인간의 역사 진보 과정에서 원융적으로 조화하려는 과정에서 불교를 ‘선택’했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선택은 언제든 상황 따라 바뀔 수 있습니다. 결국 ‘엘리트의 선택’이라는 점이 과연 불교가 그렇게 서양에 큰 영향력을 미칠 것인가라는 회의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2013년 여름과 가을. 석달 남짓한 기간 동안 저는 유럽을 다니면서 불교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며, 불교의 받아들이고 더러 수행하고 있는 몇몇의 불자들을 ‘직접’ 만나 그들과 대화를 했습니다. 이것은 유럽에서 사람들에게 불교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알아본 ‘제한적 경험’이기에 이를 염두해 주시고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유럽에서 만난 대부분의 불자들은 수행과 명상에 관심을 둔 이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가보게 된 관음선원의 사람들이나 독일 베를린의 남묘호랭개교에서 수행을 하는 불자들의 경우 단체로 신행생활을 하지만 일주일에 한두번씩 일정 시간에만 서로 모이고 수행을 한 뒤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집니다. 그들 사이에서 지속적이고도 긴밀한 유대관계가 형성된 듯 보이지는 않고, 수행차원에서의 경험 공유가 주기적으로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는 듯 했습니다. 이밖에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개인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이고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이들은 학문이나 관심 차원에서 불교를 먼저 접하고 난 뒤에 수행을 경험해본 이들도 많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니면 지인들의 소개로 불교를 받아들인다던지 정신적인 어떤 체험을 통해서 이를 알아보려는 과정에서 불교 수행에 관심을 기울인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제가 매번 물어본 것은 무슨 이유로 불교 수행을 하는지였습니다. 그러면 그들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그 미묘한 정신의 세계를 알고 싶어서라든지, 수행을 하고 나면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것 같아서, 행복감을 느끼기 때문에, 나를 좀 더 평온한 마음으로 이끌어주기 때문에, 고통으로부터 나를 벗어나게 해주고 나를 바꿔주기 때문에 등등의 답들이 들어옵니다. 사성제에서 밝히는 바대로, 사실상 불교는 고통과,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깨달음이란 두 가지 요소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현실 생활에서 괴로움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 괴로움을 벗어나게 하고 나를 바꿔주는 불교수행은 당연히 가뭄에 단비처럼 그들에게 좋은 처방이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만나본 많은 이들이 불교의 교리를 듣게 되고 이를 수행을 통해서 차츰 깨달아가는 과정에 있습니다만, 그들이 알고 있는 불교나 수행은 사실상 대개가 입문의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수행을 통해서 마음의 미묘한 작용과 모습을 얼핏 경험한 과정에 있지만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계발할지는 잘 모르는 상황에 있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세계 곳곳의 명상센터에서 열흘간의 단기 안거를 통해 수행이란 걸 처음 접해보았습니다. 정진하는 동안 어쩌다가 이전에 느낄 수 없던 마음의 고요한 상태를 느끼곤 다시 이를 지속하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렇게 수행을 시작한 사람들을 만나며 가장 절실하게 느꼈던 것은 바로 스승의 역할인 듯 했습니다.
제가 만난 많은 이들은 스승 없이 수행을 해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은 불교와 수행이란 광활한 대지에 들어섰지만 방향을 모른 채 무작정 걸어가는 사람들처럼 느껴졌습니다. 불교나 수행에 대한 이해가 그리 체계적이지도 않았고 잘못된 경우도 많아서, 그 중 몇은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을 오해하여 스스로를 스승이라 믿어야 한다는 식의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했습니다. 수행은 사실상 스승의 가르침 하에 지속성과 집중력을 가지고 해나가야 그 빛을 발하게 됩니다. 불교가 서양 엘리트들의 예상대로 서양 세계에 어느 정도 파급이 된 듯 하지만 그 방향성이나 깊이는 좀 석연치 않습니다. 그나마 있는 불자들도 스승이라는 가교 없이 불교를 임의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을 많이 접해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런 배경에는 서양특유의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불교를 받아들이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 듯 보입니다.
스승의 가르침 부재와 점검되지 않고 개인화된 수행 풍토. 생활불교며 수행불교란 말이 유럽의 불교를 설명하는데 종종 쓰이지만, 제가 접한 현실은 여러 면으로 참 난제처럼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