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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스님의 자취를 찾아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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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장천추寶藏千秋 - 종현 2014년 02월 384호

해인사와 홍류동의 흔적들

외나무다리 하마비下馬碑
1946년 환경 스님께서 해인사 주지가 된 후 1948년에 용탑선원입구 외나무다리에 하마비를 세웠다. 해방 후 새로운 교통수단이 많이 보급되지 않던 시절 있는 사람이나 기관장들이 가마와 말을 타고 해인사를 출입하는 일이 그때까지도 빈번했던 모양이다. 이에 주지이신 환경 스님의 글씨로 말에서 내려 들어오는 곳이라는 하마비를 세우고 여기에 “더이상 첨가하거나 덧붙이지 말라”는 엄명까지 내리신 비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스님들의 수행분위기를 지키려는 소임자들의 노력은 철저했던 것 같다. 늘 편리를 쫓고자 하는 것은 현실과 부딪치게 되어 있다. 그때의 말이 지금의 자동차가 되어 해인사 온 도량을 뒤덮어 여러 가지를 고민스럽게 하고 있다. 지금은 70년 전 소임자들이 내렸던 “신물가첨보愼勿加添補”를 다시 한번 새겨볼 때이다.

교기통마우橋忌通馬牛 다리에 소와 말이 지나는 것을 꺼림이니
후인신차규後人信此規 후세 사람들은 이를 본보기 삼을지니라.
고래가일조古來架一條 옛날부터 한 가닥으로 건너지름이니
신물가첨보愼勿加添補 삼가 첨가하거나 덧붙이지 말도록 하라.


사문환경沙門幻鏡
홍류동에 자주 오가면서 유난히 나의 관심을 끄는 암각문이 있다. 알듯말듯 한 것이 그 크기도 대단한 것이어서 많은 흥미를 유발시켰다. 홍류동 석문 사진을 찍으면서 가장 많이 와서 보고 촬영을 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글씨의 정체를 알기가 쉽지 않았다. 주변사람들의 증언도 없고 아시는 스님들도 없었다. 바위 석문이 정자체가 아니라 그림형태로 각刻이되어 있었고 여름에는 계곡의 물과 바위에 더부사는 풀들이 자라고 있어 알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계절이 바뀌고 겨울이 되니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어졌다. 눈이 살포시 내린 어느 날 다시 찾은 바위 각刻위에는 눈이 내려않아 글씨를 따라 하얀 선이 드러났고 전에 보지 못했던 부분이 선명해져 바위글씨의 전체 형태가 나타났다. 네 개의 글씨가 도장 관지款識로 쓰여 있었고 알아볼 수 있는 자는 문門자와 경鏡자뿐이었다.
다시 사진속의 그림과 나의 추리로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홍류동 절승대의 ‘사문환경沙門幻鏡’이란 낙관이 생각났고 沙門幻鏡을 연결시켜보니 바위의 석문이 그것임을 알 수 있었다. 환경 스님께서 직접 쓴 것으로 보이는 당신의 서명석각인 것이다.
다시 문제는 이 각을 왜 했으며 혹시 깨져나간 바위부분에 또 다른 글이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홍류동 주변분들의 연락을 기다릴 뿐이다. 이 석각은 해인사 주유소 계곡에 있다.

경학원經學院
‘경학원’ 편액은 지금의 진영전 건물 동편에 걸려있다. 해인사에서 이렇게 이름이 많이 바뀐 건물로는 1등감인데 최초 왕실의 안녕을 비는 ‘경홍전’으로 건립되었다가 1946년 해인사 주지를 맡은 환경 스님이 경학원이라 붙이고 스님들이 책을 보며 공부하는 도서관으로 쓰였으며, 그뒤 2006년 해인사 역대 스님들의 진영을 모셔놓은 진영전으로 지금까지 쓰이고 있다. 1947년 쓴 이 글씨는 ‘해방후이년 병술지추 사문 환경(解放後二年 丙戌之秋 沙門幻鏡)’이라는 관지款識가 편액에 쓰여 있다.

선불장選佛場
해인사는 환경 스님이 주지로 취임하면서 효봉 스님을 방장으로 모시고 최초의 총림을 설치하였다. 총림이란 선원, 율원, 강원, 행자실등 기초교육기관부터 참선 수행하는 선원까지 스님들의 종합적으로 수행하는 수도도량이다. 그곳에서 대선사가 나오고 대강백이 나오고 대율사가 나오는 것이다. 선지식, 부처를 뽑는 총림이 바로 선불장이다.
‘위없는 깨달음’을 구하고자 삭발염의한 수행자들이 진리를 구하기 위해 치열히 정진하는 곳. 이 선불장 편액이 강원 궁현당 마루에 걸려있다.

해인총림海印叢林
지금 소개하는 것은 환경 스님의 글은 아니다. 이 편액은 환경 스님과의 인연으로 해인사 봉황문에 걸려있다.
해방 후 1946년 주지로 임명된 환경 스님은 왜색화된 불교에서 벗어나는 길을 수행뿐이라는 것을 늘 강조하셨고 해인사의 수행가풍을 되살리고자 효봉 스님을 방장으로 모셔 한국불교 최초의 총림을 설치하였다.
당시 서예 국전심사위원을 맡고 있었던 유당 정현복 선생에게 부탁하여 해인총림 편액을 쓰고 봉황문에 걸었다. 한국불교 최초의 총림이 이때 탄생하였으며 이후 6.25동란이 발발하여 총림은 흐지부지 되었다. 하지만 수행가풍을 바로 세우고자 했던 스님들의 노력은 1967년도에 결실을 맺어 성철 스님을 방장으로 모시고 현대적의미의 총림을 해인사에 세웠으며 1946년 수행가풍을 살리고자 내걸었던 해인총림 편액은 지금까지 이어져 봉황문(사천왕문)에 당당하게 내 걸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종합수행도량으로 지금도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