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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갑오년 해맞이 템플스테이’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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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권택룡┃상주고등학교 교사 2014년 02월 384호

지난 2013년 계사년은 하늘의 한 쪽이 무너진 해였다. 연초부터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시던 아버지가 여름의 끝자락인 8월 말에 여든 살을 일기一期로 끝내 돌아가셨다. 시골의 가난한 농부로 불쌍하고 아름다운 삶을 사셨던 아버지. 일제시대 좀 더 나은 삶의 꿈을 안고 만주로 갔지만 풍토병으로 돌아가셨다는 할아버지로 인해 아버지의 삶은 어릴 때부터 고행일 수밖에 없었다. 학교는 먼 풍문으로 들었을 것이며 어깨는 어린 시기에 구부러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당신께서는 못 입고 못 먹고 못 쓰시면서 사남매를 길러 내시었다. 형님께서는 공무원을 하시고, 누님 두 분은 가정을 꾸리고 안정된 삶을 살고 있으며, 막내인 나도 시골 학교의 교사를 하며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있으니 아버지의 소원은 어느 정도 이뤄진 셈이다.
막막한 가슴을 정리하고 복잡한 머리를 비우고자 해인사 템플스테이를 신청하였다. 해인사는 삼사년 전, 다니시는 것을 좋아하시던 아버지와 갔던 마지막 여행지이기도 하였다. 학교에서 종업식을 끝내자마자 아내, 세 아이와 함께 해인사로 향했다. 해인사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 때에 안내를 하시는 처사님께서 산에 눈이 많아 아이젠이 꼭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절 앞에 있는 상가에 들러 아이젠을 구입하는 것으로 해맞이 템플스테이는 시작되었다.
오후에 거의 모든 참가가자 도착했을 무렵 우리를 담당하시는 영무 스님께서 오셔서 불교의 예의와 그 의미에 대해 알려주셨다. 스님께서는 방으로 들어올 때 자신이 벗어놓은 신발을 본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셨다. 20여명의 참가자 중에서 한 분에 불과했다. 물론 나는 19명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스님께서는 신발을 보라고 하며 한 줄로 정리할 것을 말씀하셨다. 엉망인 신발을 한 줄로 정리하자 보기가 한결 말끔하였다. 스님은 이 작은 것 하나에도 의미를 담을 수 있다고 하시며 그것은 차별이 없는 공평함과 일체감이라 하셨다. 한 줄로 신발을 놓았으니 그것은 평등이며, 색과 모양과 크기가 다르지만 모두 일정하게 배열되어 있으니 그것은 일체감을 의미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신은 나갈 것을 대비하여 밖으로 향하는 것이 아닌, 그 안에 몸과 마음을 쏟고 있다는 의미로 항상 안을 향하라고 하셨다. 신발 하나 놓는 것에도 이렇듯 의미를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였고 다음부터는 신발을 잘 벗어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으로 배운 것은 절하는 방법이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평소에 가끔씩 절에 다니며 곁눈질로 보았던 스님들이나 다른 신도들의 절하는 모습을 본 적은 있지만 역시 그렇게 배우는 것이 한계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일어선 채로 바르게 합장을 하고 목과 허리를 굽혀 절을 한 다음, 무릎을 굽혀 바닥에 닿게 하고 두 손을 바닥에 짚고 머리도 땅에 닿고 부처님에 대한 공경의 뜻으로 두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귀까지 올리고 다시 손을 뒤집어 짚고 합장하며 일어서는 것이 한 번의 절이었고, 삼배의 경우 마지막 세 번째 절은 엎드린 상태에서 합장한 두 손을 머리에 대는 동작을 추가한다는 것이었다. 절을 한 번 제대로 하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니었다. 허벅지가 뻐근하게 당겨와 정확한 자세를 유지하며 절하는 것이 매우 힘이 들었다.
그리고는 저녁 공양이었다. 뷔페식이었다. 절에서는 밥을 남겨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절의 밥은 맛도 있고 내일 해맞이 산행을 대비하여 나는 평소보다 밥을 많이 먹었다. 갓김치와 나물로 이뤄진 반찬은 재료 원래의 맛을 간직하고 있어서 싱싱한 느낌이었고 청국장은 어릴 때 집에서 먹던 맛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인 막내가 입맛에 맞지 않는지 많이 남겨서 아내와 내가 반씩 먹었다.
저녁 예불을 마치고 영무 스님과 참가자들 간의 대화의 시간이 있었다. 많은 말이 오갔지만 스님이 하신 그 말이 인상적이었다. 부처님 말씀인 팔만대장경의 내용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사람은 죽는다”라는 스님의 말씀이었다. 내일 죽을 수도 있고 60년 뒤에 죽을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모두 죽는다는 이야기이다. 그것을 인간들이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윤회와 극락왕생 등의 불교적인 교리를 떠나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안다면 좀 더 거짓과 불의를 덜 행하고 남을 더 배려하는 삶을 살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시작은 나부터이다. 또한 세상은 전쟁터 같은 것이라고 스님은 말씀하셨다. 갑옷과 방패를, 창을, 날렵함을 갖추지 않으면 자신이 전사戰死할 수밖에 없는 곳이라는 것이다. 또 내가 무언가를 얻고 싶다면 그것을 가져다 줄 사람에게 많은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짜가 없다는 말씀이셨다. 모두 맞는 말씀이었다. 현실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집착에서 비롯된다는 말씀을 하셨다. 모든 집착을 끊기에는 나 자신이 너무 부족함을 알기에 쓸 데 없는 집착부터 끊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스님과 차담이 끝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아내와 나 같은 어른이나 아이들 역시 내일 해맞이에 대한 기대로 잠이 오지 않았다. 이렇게 잠을 설치고 나서 아침 예불을 하였다. 어제의 저녁 예불과 마찬가지로 스님 세 분이 번갈아 북을 치는 모습을 보고 난 후에 많은 사람이 모인 대적광전에 들어갔다. 그 곳에 모인 약 백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모두 일곱 번에 걸쳐 절을 하였다. 어제 영무 스님의 설명으로 그것이 불교의 교리를 만드신 석가모니부처나 이를 중국에 전한 달마 대사 등에 대한 감사의 예불이란 사실을 알게 되어 더욱 신성해 질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그리고는 아이들을 깨워 갑오년 해맞이를 위해 해인사의 앞산인 매화산으로 향했다. 캄캄한 어둠을 후레시 불빛으로 뚫으며 앞으로 위로, 매우 긴 거리를 걸어갔다. 아이젠이 없었다면 걸어가기 힘든 눈과 얼음이 많은 길이었다. 가는 도중에 우리를 안내하신 처사님께서 매화산의 매화는 꽃이 아니라 묻을 매埋에 불 화火를 쓰는 풍수의 의미가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중에 해인사 안내문을 보니 조선 후기만 해도 해인사에 아홉 번 불이 났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그 말이 이해가 되었으며 멀리서 가야산을 바라보면 그 모양이 서울의 관악산 같이 불꽃 모양 같기도 하였다. 오직 앞길을 조심하며 한 발 한 발 한참을 걸어 바위산인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는 ‘남산제일봉’이라는 표지석이 있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동쪽의 산 위 붉은 기운 속에 동그랗고 빨간, 잘 익은 밤 같은 것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였고 이내 동그란 해가 우리에게 모습을 보였다. 우리 일행을 비롯한 그곳에 모인 약 50여명의 사람들은 새해의 서광을 온몸으로 받으며 모두 각자의 소원을 빌고 있었다. 나 또한 우리 가족 모두가 지난해를 말끔히 떠나보내고 새해에는 건강하고 공부를 잘 하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또 우리 학교의 학생들 또한 좋은 대학 입시 결과가 있기를 기원하였다. 매화산을 내려와 늦은 아침으로 떡국을 먹었는데, 그 맛에 모두가 감탄하며 너도 나도 반 그릇 정도는 더 먹게 되었다. 피곤한 몸으로 숙소에 들어온 우리 가족 5명은 죽은 듯이 두 시간 여를 잤다. 자고 일어나 씻은 다음 팔만대장경을 모신 장경판전 등을 둘러보았고 팔만대장경의 가르침이 있다는 해인도를 한 바퀴 돈 다음 해인사와 이별하였다.
‘2014 갑오년 해맞이 템플스테이’는 나에게 지난해 이별한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다시 다가온 새해를 열심히 바르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의 시간이었다. 또 아내와 아이들 역시 각자 삶의 영역에서 자신들의 삶을 추스르고 새로운 다짐을 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중학교 1학년, 초등학교 5학년과 1학년의 어린 나이에도 기꺼이 새해 일출을 보기 위해 어두운 밤의 산길을 걸은 우리 아이들이 대견스럽기만 하다. 제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결국 부처님 손바닥이란 말이 있듯이 결국 세상사는 밝혀지게 되어 있다. 이를 안다면 바르고 밝은 마음으로 세상을 아니 살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힘들고 깨끗하지 않아도 마음 하나만은 그것을 지향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풍파와 같은 세상의 번뇌가 모두 사라져 세상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비춰지는 바다이며, 새해에 떠오르는 태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