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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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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김성철┃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 2014년 01월 383호

오래 전 얘기다. 동국대학교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모 교수님의 대학원 강의를 한 학기 청강하였다. 교수님께서는 당신의 연구원으로 학생들을 불러 모아 강의를 하셨다. 첫 강의가 끝나고 점심식사 시간이 되었다. 모두들 인근 음식점으로 갔다. 냉면을 시키면서 불고기와 맥주를 추가하였다. 글라스에 맥주를 따라 함께 건배를 한 후 불고기와 냉면을 맛있게 먹었다. 매스컴에서만 뵈었던 원로 불교학자 분을 설레는 마음으로 직접 뵙는 자리였지만, ‘의외’라는 생각에 놀라움과 실망감이 교차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수님께서 술을 드시는구나! 고기도 드시는구나!’ 그러나 필자가 불교학자들의 음주와 식육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은 그날뿐이었다. 크게 발심하여 불교공부를 시작했지만 그 이전과 다름없이 음주와 식육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다들 그러니까’라고 자위하면서 …
우리나라 불자들은 오계 가운데 음주에 대해서만은 관대하다. 오계 가운데 불음주계는 차계遮戒라는 이유를 들어 합리화하기도 한다. 즉 불음주계는 ‘악업을 막는(遮)계’로 그 자체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음주 후 살생, 투도, 사음, 망어 등의 악행을 짓기 쉽기에 이를 방지하려고 계가 제정되었을 것이라고 변호하는 것이다.
‘부처님과 스님과 가르침’의 삼보에 귀의하겠다고 다짐할 경우 불자로서의 삶이 시작된다. 삼귀의는 불자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조건이다. 이에 덧붙여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의 오계를 수지하면 보다 신실한 불자가 되는데, 다양한 생업에 종사하는 재가불자로서 이 모두를 철저히 준수하기가 쉽지 않다. 오계를 받으려고 해도 그 모두를 제대로 지킬 자신이 없어서 망설이는 불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특히 불음주계의 경우 마음에 걸리는 거사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우바새계경≫이나 ≪대지도론≫에서는 다섯 계목 낱낱의 수지受持 여부를 자율에 맡긴다. 자신이 지킬 수 있는 계목만 받으라는 것이다. 네 가지 계목만 수지한 불자는 다분행자多分行者, 두세 가지 계목만 수지한 불자는 소분행자少分行者, 하나만 수지한 불자는 일분행자一分行者라고 부르며 다섯 계목을 모두 수지한 불자를 만행자滿行者라고 부른다. 여기서 더 나아가 부부생활도 하지 않고 출가한 스님처럼 살겠다고 다짐한 불자는 단음자斷淫者라고 부른다. 단음자의 경우 오계 수계를 마친 후, 계사 앞에 나아가 “저는 앞으로 어떠한 음행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스스로 맹세하면 된다. 이상과 같은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삼귀의를 다짐한 재가불자인데 업무상 술을 끊을 수 없어서 오계 받기를 망설이는 사람은, 수계식에 참석하여 네 가지 계목만 받으면 된다. 소위 ‘다분행자’의 수계다. 물론 이러한 ‘선택적 수계’는 재가불자에게만 가능한 지침이다.
출가한 스님이 받는 계율은 목숨과 같다. 비구 스님의 250계, 비구니 스님의 348계와 같은 구족계의 율(律)은 스님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범’이며, 이를 어길 경우 그에 상응하는 제재를 받는다. 세속 규범에 대비하면 구족계의 율은 법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사분율≫을 보면, ‘스님으로서 술을 마시는 행위’는 ‘바일제법(pācittiyādhammā)’의 범계(犯戒)에 포함되는데, 3인 이하의 비구 앞에서 참회하면 죄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참회하지 않을 경우 내생에 지옥에 떨어지는 과보를 받는다고 한다. 혹자는 “대승불교권에서 ≪사분율≫과 같은 소승계를 받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구족계는 소승이든 대승이든 금강승(밀교)이든 스님들이라면 반드시 받고 지켜야 하는 ‘출가계’다. 출가계에 대소승이 따로 없다. 구족계에 덧붙여 대승불교권에서는 보살계를 받고, 금강승불교권에서는 다시 그에 덧붙여 삼마야계를 더 받는다. 구족계와 보살계와 삼마야계는, ‘소승→ 대승→ 금강승’으로 가면서 누적적으로 수지하는 것이지 불교권에 따라서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받는 것이 아니다.
계와 율에 대해 이렇게 정리할 때, 재가불자가 술을 마시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술을 끊지 못한 불교학자로서 항상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았다. 불교학자는 일반 학자들과 달리 능력 이상의 존경을 받는다. 포교현장에서 신도들로부터 합장, 반배를 받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크게 머리 숙여 답례를 했지만 과분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또,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식사할 때면 간혹 “고기를 잡수시나요?”라든지, “혹시 술을 하시는지요?”라는 질문을 받곤 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전하는 불교학자는 그 행동에서 뭔가 다르리라.”는 ‘기대’가 담긴 물음이었다. 그런 질문에 대해 “술도 안 마시고 고기도 안 먹습니다.”라고 부정하지 못하는 나의 마음 한 구석에는 언제나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남아 있었다. 일반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혹여 ‘훼불’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죄책감으로…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몸에서 이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학교 안팎의 업무에 시달렸고, 연구에 욕심을 부려서 과로했기 때문이었다. 담배를 끊었다. 재작년에는 “평생 이렇게 바쁜 적은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많은 일을 했다. 매주 연재되는 신문의 칼럼, 매달 보내야 하는 잡지의 연재물, 각종 학회나 단체에서 주문받은 논문들을 쓰느라 1년 내내 거의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야 했다. 자판을 두드리며 새벽을 맞이한 날이 부지기수였다. 그러다가 결국 몸에 이상이 생겼다. 갑자기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심한 부정맥이 왔다. 몸의 엔진인 심장에 과부하가 걸려 고장이 난 꼴이었다. 의사 말에 의하면 부정맥에는 “술이 독과 같다”고 했다. 그래서 몇 달 전에 술도 완전히 끊었다. 술자리에 어울려도 잔에 맹물을 담아 건배한다. 분위기도 어색하고 재미도 없지만 양심은 편안해졌다. 새벽마다 일어나 요가하고, 명상하고, 좌선한다. 고장 난 몸뚱이가 술도 끊게 하고 계, 정, 혜 삼학을 저절로 닦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