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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제행무상諸行無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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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장영섭┃불교신문 기자 2014년 01월 383호

알다시피 서양철학은 고대 그리스에서 출발했다. 시간적으로는 기원전 6세기 무렵이다. 노예를 밑천으로 한 농경제 사회에, 해상무역으로 한몫 잡은 신흥 상공업자들이 등장하던 시절이다. 도시가 생기고 사람이 모였으며, 도시에서 성공하려면 논리와 ‘말빨’이 필요했다. 그들의 철학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기 위한 도구이면서, 돈맛에 취한 정신을 가다듬는 망중한忙中閑과도 같았다. 부지런히 물건을 팔고 수금을 하는 틈틈이, 만물의 본질에 관해 논쟁을 벌였다. 탈레스는 ‘물[水]’, 아낙시만드로스는 ‘무한자無限者’, 데모클리토스는 ‘원자原子’, 피타고라스는 ‘숫자’를 내세웠다. 에페소스의 귀족이었던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이라고 주장했다.
불의 붉음이나 뜨거움은 관심사가 아니었다. 타오름과 사그라짐의 무한한 반복에 주목했다. 불은 공기와 나무를 만나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타오르다가도, 물을 붓거나 흙으로 덮으면 순식간에 소멸한다는 사실에,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불은 공기의 죽음으로 살고, 공기는 불의 죽음으로 산다. 물은 흙의 죽음으로 살고, 흙은 물의 죽음으로 산다.” 만물 각자는 그것과 반대되는 성질의 사물로 끊임없이 바뀐다는 것이다. 또한 “싸움은 만물의 아버지다” 물질은 서로 간의 투쟁 속에 굴복했다가도 보란 듯이 재기하며, 이러한 각축전은 영원하다.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는 말이 가장 유명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생성과 변화야말로 궁극적인 진리이며, 사물의 고정적인 모습은 단지 일시적이고 방편적인 것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유작은 단행본이 아니라 파편적인 잠언으로만 전한다. 생각도 독특한 편이지만, 생애는 더욱 유별났다. 기원후 3세기 그리스의 저술가였던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기행奇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군중을 혐오했으며 공동체생활에 진저리를 쳤다. “사람들은 서투른 시인들을 믿고 천민을 스승으로 삼는다”며 현자들에게조차 독설을 퍼붓는 게 취미였다. 산 속에 은둔해 초근목피를 뜯으며 고독하게 살았다. 그러다 불운하게도 풀을 잘못 먹어 온몸에 수종水腫이 났고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죽기 전 자신의 철학을 몸소 실천하는 모습은 장관(?)이다. ‘홍수를 가뭄으로 바꿀 수 있겠냐’는 둥 의사에게 이상한 질문을 해대더니, 열기로 몸을 말리기 위해(몸에서 수분이 빠지면 물혹도 없어질까 해서) 외양간으로 가서 쇠똥에 몸을 비벼대는 기염을 토했다. 당연히 효험은 없었으며, 아프고 아쉬워서 씩씩거리다가 60세에 죽었다. 다수의 철학자들은 헤라클레스의 어두운 사유는 조심스럽게 해석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얼핏 염세와 냉소의 철학자이지만, 곰곰이 되짚어보면 따뜻한 염세이고 유익한 냉소임을 알 수 있다. 그에게 끝없이 변화하는 만물은 덧없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었다. “질병이 있기에 건강이 달콤하고 배고픔이 있기에 배부름이 달콤하다”는 한 마디는, 변화하므로 세상은 질서를 이루고 인간은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격려로 읽힌다. 아울러 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은 오르막길, 불이 사그라져 꺼지는 것은 내리막길에 빗댔다. 그리고 포괄적인 관점에서 보면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은 같다.” 오래된 비유인 인생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에 대입하면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는 <잡보장경>의 경구가 어렵지 않게 떠오른다. ‘힐링산업’의 선구자였던 오쇼 라즈니쉬는 헤라클레이토스를 두고 ‘서양의 붓다’라고 평가했다.
철학은 만물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 존재하지만, 만물의 근원을 그리워하는 인간을 위해서도 존재한다. 세계의 존재원리를 규명하려는 동기는 사람들에게 지혜를 통한 해탈을 안겨주기 위함이다. 예수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외친 이유도 이런 까닭이다. 만물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면, 지금 당장 괴롭다고 무너지지 않는다. 불교의 공空은 허무의 공이 아니라 희망의 공이며, 나태를 변명하기 위한 공이 아니라 정진을 독려하기 위한 공이다.
1월1일이 되면 모든 사람의 가슴에 희망이 꽃핀다.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인생을 다짐하고 기약한다. 각계에서 쏟아내는 신년사를 읽으면, 당장이라도 노사화합과 남북통일과 세계평화가 이뤄질 것 같다. 물론 반짝이던 기대들은 머지않아 실망으로 중화된다. 그러나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꿈을 꾸었다는 기억만으로도 밥맛이 달라지는 건 본능이다. 희망을 갖는다는 건 변화를 믿는다는 이야기다. 내일은 오늘보다 한결 나아지리란 믿음은, 내일을 준비하는 힘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소원(所願)보다는 원력(願力)이란 행위를 권장한다. 소원은 남이 가져다주는 복이고 얻어걸리는 복이지만, 원력은 스스로 만드는 복이고, 오래 지킬 수 있는 복이다.
선사들은 무시무종無始無終을 역설한다. 시작과 끝이 본래 없다는 순환적 시간관의 반영이다. 따로 시작이 없으니 대충대충 살라는 말이 아니라, 언제든 시작할 수 있으니 성실하게 살라는 권고다. ‘끝’에 좌절하거나 서글퍼하지 말고, 끝을 시작으로 알아 위안 받고 용기를 내라는 덕담이다.
다만 희망에 희망만 넘치면 망상이나 야욕으로 변질되기 쉽다. 일생일대의 삶에 전전긍긍하다 보면, 순간순간의 삶을 건성건성 지나치게 마련이다. 마조 선사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를 말했고, 운문 선사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을 말했다. 일상이 행복하면 천상(天上)을 궁금해 할 이유가 없고, 하루하루에 충실을 기하면 굳이 희망을 들먹일 필요가 없다. 진정한 안심安心은 무심無心이다. 무엇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므로, 인생은 살 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