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르네상스를 부른 선두주자들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철학산책 - 종안┃해인사승가대학 강사 2013년 11월 381호

십자군 원정遠征은 중세유럽을 여러모로 변모시켰다. 원정 전, 서로마제국은 이미 자취를 감추었고 대신 들어선 게르만의 프랑크 왕국도 프랑스, 독일, 이태리 등으로 갈라선지 오래인 상황에서, 당시(11세기 후반) 근동의 헤게모니를 움켜쥐고 있던 셀주크 투르크(Seljuq Turks)가 이슬람의 지도력을 새롭게 확보하고 동방에서 대외세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비잔틴(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점령했다. 기독성지 ‘예루살렘’마저 결국 1077년 투르크의 손 안에 맡겨졌다. 그 많던 서유럽 기독순례자들은 위협을 느꼈고 발길을 끊었다. 비잔틴 황제는 모욕을 느꼈고, 정신적 뿌리를 나눈 형제인 로마 교황청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때마침 같은 해(1077), 독일의 국왕 하인리히 4세가 추운 겨울의 카놋사 성문 밖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7세 앞에 무릎을 꿇은 사건으로 미루어, 왕권과 교황권의 다툼으로 다른 곳에 눈길 줄 수 없이 바쁜 서쪽이었다. 시차를 두고 망설이던 서유럽은 그러나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가 자리에 오르자마자 클레르몽 공의회(Council of Clermont)를 소집하여 비잔틴을 돕기 위한 군사적 원정을 촉구하였고, 수많은 서유럽인들은 각자의 셈법에 따라—교황과 교회권력은 기독교 확장을 위해, 봉건영주와 기사들은 동방의 재물과 땅을 얻으려고, 상인과 일반인들은 경제적 욕구와 봉건지주의 수탈과 가난으로부터 벗어나려고—교황의 동방(비옥한 지중해 동부 연안지역)원정 선동에 기꺼이 동참하였다. 그러나 물론 명목은 성지 예루살렘의 탈환이었고, 이슬람 이교도異敎徒로부터 핍박받는 ‘형제’를 구하는 일이었고, 미개하고 계몽이 필요한 비문명의 동방을 해방시키는 부름이었다. 십자군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신앙적 광기로 휩싸인 식민전쟁이 갑자기 성전聖戰으로 둔갑하였다. 성전은 오랜 기간(1096–1270) 수 세대에 걸쳐 기독과 이슬람에 헤아릴 수 없는 희생을 요구하였지만 결과는 누구에게도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사실, 예루살렘은 21세기 아직까지도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성지로 혼합 분할되어 각축되고 있다.
원정 후, 신의 뜻을 앞세우고 오랜 성전을 치르고도 결과적으로 ‘성지 회복’에 실패한 교황청과 왕정은 당연히 권위와 신뢰에 손상을 입었다. 영주와 기사들로 이루어진 봉건제도도 원정 실패로 인한 경제적 피폐로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설상가상 당시에 유럽 인구 세 사람 중 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 무서운 흑사병으로 병구원을 위해 교회에 모인 이들이 오히려 더욱 많이 희생되면서, 신의 선善의지에 대한 믿음도 꺾여버렸다. 반면에 상인들은 전쟁을 통해 부가 축적 되었을 뿐 아니라 전쟁물자 보급에 연계된 동서방 무역 거래선線을 얻게 되어 더욱 활발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독자적 세력을 결집하여 지중해 무역의 헤게모니를 쥐고 초기자본주의 시대를 열어젖히며, 동시에 문화, 예술, 학문일반을 후원하면서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원동력을 제공하게 된다. 예컨대,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Medici family)의 사업영역은 세월을 타고 서서히 유럽 전역으로 확대 재생산되었고 교황청과의 거래로 막대한 부를 쌓으면서 정치와 종교권력의 숨은 실력자로 또 문예부흥의 적극적 후원자로 귀족과 평민 모두의 지지를 받으며 다가 올 “새로운” 시대정신—즉, 신에서 벗어나 인간 위주의 삶을 추구하는 인본주의 이념—을 한껏 배양시키게 된다. 결과적으로 훗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먼 단초를 제공하기 시작한 셈이 된 것이다.
그러나 성전을 치르고 온 모든 이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징벌해야한다던 ‘미개한 동방’이 전혀 미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세뇌되어 믿었던 이교도의 비윤리적이고 비문명적인 삶이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배울만한 아니 배워야만 하는 훌륭한 문화를 놀랍도록 풍부하게 갖추고 있다는 체험적 직시直視였다. 의복과 가구와 같은 생활류는 물론이고 철학(과학), 수학, 의학, 천문학, 지리학, 건축학 등 훨씬 다양하고 뛰어난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하여, 그들은 결코 비겁하지도 나약하지도 않았으며 목숨을 걸고 ‘그들만의 성전(Islamic holy war)’을 치룰 준비가 완벽히 갖춰진 존경할만한 적이었던 것이다. 사실상, 십자군이 맞닥뜨린 투르크 이슬람은 이미 7세기 이후 수세기 동안 승승장구한 유서 깊은 사라센(아랍)제국 문화에 뿌리를 내린 종족으로, 제국의 팽창기에 마주친 페르시아, 그리스, 비잔틴, 인도, 중국 등의 우수한 문명을 과감히 자신들에게 흡수 융합시킨 일종의 “세계문화”를 만끽하고 있던 터였다. 그 만끽의 이면裏面에는 외래문화와 사상을 적극적으로 ‘아랍어화’시키는 번역작업이 국가적 사업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제지製紙기술이 중앙아시아 비단길을 타고 들어와 그 번역작업에 힘을 보탰다. 예를 들면, 페르시아의《천일야화》를 《아라비안 나이트》로 번역 독서케 하여 무슬림muslim의 정서를 가꾸었고, 인도의 수학과 천문학 서적도 번역 학습되어 제국의 과학 수준을 한껏 끌어올렸고, 특히 그리스 문명권에 속해있던 시리아(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 후예, 비잔틴의 일부)를 합병하고 그 곳에서 빼어난 헬레니즘 문화를 간직한 “그리스 고전”—특히 문학과 철학, 그 중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백미白眉—을 발견 번역 탐구하여 서양고전의 진수를 깊이 음미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이슬람 철학은 적어도 서유럽의 ‘신학의 시녀’보다는 훨씬 다양하고 합리적인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동방 이슬람 문화를 접하기 전의 중세유럽 철학은 헬레니즘과의 교류가 단절된 채 헤브라이즘에 기초한 기독교 신학을 절대시하기 위한 교부철학으로 대변된다. 그러나 십자군전쟁을 통해 아랍으로부터 그리스 고전철학을 역수입한 12세기 이후, ‘절대 신학’은 갑자기 혼란에 빠진다. 교부철학인 ‘플라톤 신학’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형이상학이 라틴어로 번역되어 읽히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신의 권능과 인간의 절대복종의 정당성이 플라톤의 이원론적 이데아론—즉 완전한 이데아의 세계(universals 보편자)와 불완전하며 이데아를 동경하는 이승(individuals 개별자)으로 구분되는 독립적 두 존재계의 상정—으로 정초되어 있는 교부철학의 정통성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계시와 권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교부들의 입장에서는 ‘개별 이성과 합리성’을 앞세운 당시의 아리스토텔레스는 근세의 갈릴레오나 브루노(G. Bruno, 1548-1600)처럼 신앙과 교리에 위험한 인물이었다. 결국, 두 그리스 고전 거장들로 인해 ‘신학논쟁’이 마련될 소지가 보였고 더불어 ‘보편논쟁’의 철학마당이 펼쳐질 역동적 찰나였던 것이다.
보편普遍논쟁은 12-13세기 중세 스콜라철학을 정의하는 핵심 테마로, 우리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개념에 해당하는 실체substance가 존재하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철학적 성찰—즉, ‘소크라테스’나 ‘영희’나 ‘이순신장군’과 같은 구체적이고 일상의 경험적 대상인 개별자를 넘어 ‘인간’이나 ‘남자’와 같은 보편자(류類, 종種)도 실재實在하는지?—을 다룬 것으로 흔히 실재론實在論(Realism, 보편도 실재한다!)과 유명론唯名論(Nominalism, 개별만이 실재하고 보편은 ‘유사성’을 가리키는 오로지 명칭일 뿐이다!)으로 대분된다. 생각하건대, 개별자들(모차르트, 베토벤, 모리코네Ennio Morricone)은 끊임없이 발생 소멸하지만 그들이 보여준 보편적 특성(천재 작곡가)은 변함없이 존속하며 해당 개별자가 나타나면 득달같이 그 성격을 부여한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보편자를 영구적 실재라고 이해하고 싶고 개별자들은 이 ‘보편실재’를 충분히 닮아있지만 그래도 아주 완벽하지는 않은 출중한 모상模像처럼 여기게 된다. ‘완벽에 가깝다’거나 ‘신의 경지이다’라는 말들 속에는 그러한 보편-개별에 대한 이해가 숨어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방식의 “실재론적” 이해와 세계관이 플라톤의 이원론적 현실세상(미혹가상迷惑假相)과 이데아의 세계(진여실상眞如實相)의 설정인 것이다. 이에 반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유명론”에 가까운 이해를 담아, 개별자만이 체體(substance)를 갖춘 실재이며 보편자는 체는 없는 용用과 상像으로써의 유식적唯識的 쓰임새 일뿐 비실재라는 것이다.
스콜라 논쟁의 반대진영 논증자들—대표적으로 유명론자 Roscellinus(1050-1125)와 실재론자 Guillaume(1070-1121)—은 때때로 목숨을 잃거나 구금이 되는 일도 마다않았다. 왜 그토록 ‘보편논쟁’은 치열하게 전개되었을까? 대답은 단순하고 권력지향적이다. ‘신학논쟁’에 결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신앙의 근간엔, 마치 불교의 제행무상이나 제법무아처럼, 삼위일체설과 원죄설이 진제眞諦로서 자리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받아들이면, 삼위일체가 아니라 삼위삼체설이 될 것이며 원죄설은 터무니없는 연좌제가 될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일 터이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1932- )의《장미의 이름》이 떠오르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