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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圓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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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향기 - 장나영┃해인사수련동문회 2013년 11월 381호

먹물 같은 하늘에는 별들이 쏟아져 내립니다. 별빛의 징검다리를 밟으며 일행들은 앞선 이가 남긴 자취를 따라 줄을 지어 길을 갑니다. 두 팔을 엇물려 수평으로 잡고 팔등 위에 좌복(방석)을 드리우고 말없이 바지런히 내딛는 발걸음들입니다.
이윽고 일행들이 돌계단을 오르자 숲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넓게 펼쳐진 평지 한가운데 구 모양의 사리탑이 시선을 강렬하게 끕니다. 사리탑 주위에는 매끈한 석재로 토성의 환(띠)처럼 넓게 둘레가 쳐져 있습니다. 판판한 검은 석재는 바닥보다 한 층 높여져 있었고 일행들은 그 위에 올라가 가운데 모셔진 사리탑을 향하며 환의 모양대로 일렬로 원을 그리며 섰습니다. 법당에서 가지고 온 좌복(방석)을 펴고 사리탑에 삼배를 드리고 가부좌로 앉았습니다. 죽비 소리가 나자 모두 고요한 명상에 들어갑니다. 둥근 사리탑처럼 원만한 마음을 나타내는 일상관(日想觀)을 해봅니다. 정신을 모았나 싶으면 금세 잡념이 끼어들고 다시 집중을 해보려 합니다. 그러다 또다시 한 기억이 슬며시 떠오릅니다.

삶에 대한 진지한 의문으로 번민 속에 헤매던 이십 대 무렵, 나는 큰스님께서 입적하셨다는 기사를 접했습니다. 기사를 통해 그런 분이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분에 대한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일생에는 뭔가 남달랐고 어려운 말씀들이 담겨 있었지만 보통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는 수행력을 지니신 그분에게 나는 어떤 경지에 도달했을 것이라는 외경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리친견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땅도 꽁꽁 얼어붙게 만드는 매서운 칼바람이 불었습니다. 빨갛게 언 볼을 양손으로 감싸고 하얀 입김을 쏟아내며 산을 올랐습니다.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문에 들어서자 천왕님들께서 무거움을 잔뜩 지고 온 나를 눈을 크게 뜨시고 지켜보시는 것 같았습니다. 들어가도 되는지 허락을 구하듯이 합장을 드리고 대적광전으로 향하는 돌계단을 올랐습니다. 절 앞마당에는 사리친견을 안내하는 플랫카드도 없었고 천년 이끼를 안은 고탑만이 외로이 서 있었습니다. 사리를 친견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지만 연이은 강추위 때문에 사람들의 발길이 얼어붙었나봅니다. 아마도 오전에 일찍 회향식을 마쳤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몰아쳤습니다.
‘앗 따가워.’
순간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움츠렸습니다. 흙 알갱이를 가득 담은 바람이 매서운 침으로 변해 얼굴과 온몸을 후두둑거리며 때렸습니다. 한 차례 흙바람이 훑고 지나간 뒤 먼지를 뒤집어 쓴 나는 찌푸렸던 눈을 떴습니다. 왠지 나는 사천왕님께서 공부가 덜 된 나를 혼내주시는 것 같다는 생각을 들었습니다. 추운 겨울날 나름대로 마음을 먹고 이곳에 왔지만 사리를 친견할 만큼 덕과 수행을 쌓아놓지 못한 철부지라는 것을 흙 매를 맞는 순간 알게 되었습니다. 사리를 남기신 성철 스님은 생전에 삼 천 배를 한 신도만 만나주신 분이셨습니다. 아직 그 정도 공부에 근처에도 가지 않고 세상 번민을 다 짊어진 듯 괴롭다하며 이곳까지 찾아왔습니다. 그러니 성철 스님께서도 너는 아직 공부가 아직 멀었다고 하시며 만나주시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오자마자 한 차례 매서운 침을 맞고 나서야 조금은 자신을 느끼고 수그러든 마음으로 법당에 들어갔습니다.
절을 하면서 공부를 해보자 하는 생각이 저절로 일어났습니다. 법당을 나설 때는 괴로움으로 굳었던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탁 탁 탁”
스님께서 수마가 찾아온 법우에게 죽비 침을 놓는 소리가 들립니다. 나도 정신이 번쩍 듭니다.
생전에 큰 스님을 뵐 수 없었지만 ‘자기를 바로 봅시다’라는 강렬한 말씀에 이끌려 찾아온 발걸음이었습니다. 세속에 살면서 어리석은 마음으로 아직도 헤매고 있지만 여기 이 순간만이라도 나를 찾아 가려고 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머릿속에 원을 그리다 원융(圓融)이라는 말이 저 아래에서 떠오릅니다. 고요히 자신을 바라보고 차분히 세상을 바라봅니다.
어두움이 서서히 걷히며 주위가 파르스름하게 밝아옵니다. 하늘이 서서히 깨이고 검은 실루엣이었던 산도 모습을 드러내고 주위에 우거져 있던 나무들도 푸르른 빛깔을 찾아갑니다.
“짹 짹”
아! 새들이 눈을 뜨나 봅니다. 세상에서 가장 먼저 들려오는 소리입니다. 이어서 여기저기 새들이 눈을 뜨고 점차 새들의 중창소리 들립니다. 하늘이 밝아오고 우주만물이 깨어나는 것을 자연 속에서 그대로 느끼고 맑은 기운이 가득해졌습니다. 상쾌하게 밝아오는 아침 기운처럼 모든 무명이 사라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새 산 위에 붉은 기운이 솟아오르는가 싶더니 해가 떠올랐습니다. 내 마음도 둥근 모습을 찾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