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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의 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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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스님의 세계 만행 - 원제스님 2013년 11월 381호

2012년 9월 티베트 카일라스 순례를 기점으로 시작된 2년간의 세계 만행. 그 중간 1년을 유럽에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산술 단위의 1년이지만 그래도 만행의 절반을 지날 때쯤 되니 여러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중에 과연 만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뭘까 하는 되짚어 보는데, 저의 결론은 결국 ‘사람’과 ‘만남’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람 그 자체일 수도 있고 그 사람과 함께 나눈 이야기, 혹은 함께 나눈 시간이며 경험들입니다. 루브르 박물관의 유리관 안에 모셔져 있는 3000년 가까이나 된 오래된 미라가 큰 의미를 주는 건 아닙니다. 유럽 만행 초반부터 시작한 카우치서핑이나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 모두 제각기 다양한 환경과 모습, 삶의 철학을 가진 이들이었고 그들과 나눈 이야기며 경험들이 가장 큰 기억으로 남습니다. 여행의 제반 시설이 너무 잘 갖춰져 있어서 여행이 아니라 꼭 투어를 하는 듯한 유럽에서 아쉬움과 다소 지루함을 느껴가는 와중에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아주 특별했던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때 저는 이탈리아를 벗어나 알프스의 스위스로 출발을 하려는 기차 안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창문 밖에서 한 청년이 다가와 저에게 꺼진 핸드폰을 들이댔습니다. 퍼뜩 생각되기로 핸드폰 배터리가 나가서 시간을 묻는 듯 했습니다. 저는 7시 10분이라며 시간을 알려주었지만 그는 잘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손목시계까지 보여주고 입을 뻥끗거리며 시간을 알려주었습니다. 곧 있잖아 그는 별다른 대꾸 없이 훌쩍 자리를 떠나버렸습니다. 그를 보며 아마도 기차 시간을 놓쳤나보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고 난 몇 분 후, 유레일패스를 꺼내려 하는 순간 저는 옆자리에 있던 제 가방이 사라진 걸 알게 되었습니다. 여권이며 현금, 카메라, 렌즈, 유레일패스 등등 만행에 있어서 가장 귀중한 물건들을 보관한 가방을 통째로 도난당한 것이었습니다. 후에 가방 분실에 대한 경찰 조서를 쓰면서 알게 된 것이었지만 저에게 시간을 물어본 사람은 전문 도둑 일당으로 창문 밖에서 한 사람이 주의를 흩뜨리고, 그 같은 순간에 기차 안에 있던 다른 사람이 가방을 가져가는 수법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요새 유행처럼 번지는 말 ‘멘붕’이라는 단어를 듣기는 했어도, 실제 제가 멘붕을 겪게 되리란 생각은 못했는데 그리 됐습니다. 가방이 없어졌단 사실을 안 뒤에 아찔하게 눈앞이 하얘지더군요. 단 몇 초 사이에 벌어진 도난으로 저는 제 만행을 중간에 그만둬야 할지도 모르는 심각한 위기를 맞은 것이었습니다. 온갖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어서 저는 기차에서 내려와 역에서 같은 곳을 계속 맴돌았습니다. 머리가 수많은 생각으로 복잡했고 마음은 털썩 주저앉아버렸습니다. 제게 일어난 도난 사건이 도무지 꿈같아서 믿겨지지가 않았습니다. 머리며 마음이 가뜩 심난한 가운데서도 저는 어떻게 상황을 파악하고 수습할지를 궁리했습니다. 수순으로 따지자면 경찰 조서가 우선이었고 그 다음에 어떻게든 여권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우선 밀라노 역 안에 있던 경찰서 안에서 조서를 작성했습니다. 임시 여권을 만들기 위해 로마로 가야하는 생각에 머리가 되게 복잡해졌으나 다행히 밀라노에 영사관이 있어서 오후에 그곳에서 임시로 단수여권을 만들었습니다. 그런 뒤 낙담한 채로 숙소로 돌아가 그냥 자리에 누워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녁이 되어서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뒤 저는 만행에 있어서 꼭 필요한 물품들을 한국에서 주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독일로 들어올 한국분들을 알고 있었기에 그분들을 통해 물건들을 조달받으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어쨌든 가방을 도난당한 ‘지금, 여기’가 가장 중요했고, 그 과거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도난당한 그날 저녁 저는 다시 만행의 복구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던 그 때의 상황처럼, 그리고 험한 꿈을 꿨던 그날 밤처럼 마음은 암울하기 짝이 없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게 밀라노에서 도둑을 맞은 약 한 달이 지났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거리를 거닐며 가볍게 흥얼거릴 정도로 마음은 편안해져 있습니다. 비록 모든 게 이전 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만행을 중간에 그만둬야 할 정도로 극악한 상황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형식적으로 저는 도난 사건을 당한 것이겠지만 며칠간의 숙고를 통해서 얻은 결론은 제가 유럽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 만남이 비록 저에게 대단한 역경계로 다가와서, 제가 만행에 정말로 중요한 물건들을 손실한 사실에 고통을 느껴야 했음에도 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제가 느꼈던 고통과 그 원인이 되었던 집착은 단지 물건의 손실 그 자체만은 아닌 듯 보였습니다.
제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다른 게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시주의 은혜를 입고 있는 수행자로서 저는 바른 과정을 통해 근검절약하는, 그러면서 모범적인 만행을 해야 한다는 믿음과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만남을 통해서 저는 그런 믿음과 자신감이 한 순간에 무너진 것에 대해 고통을 느꼈던 것입니다. 제가 가졌던 생각이 물론 당연한 것이겠지만, 아무리 올바르고 정당한 생각이라고 해도 그것 또한 상황에 따라 고통을 불러들이는 집착이 되기도 합니다.
법상응사法尙應捨 하황비법何況非法. 어느 선사의 말을 따르자면 불교는 단지 인과며 연기이지 그 외에 다른 게 아닙니다. 바른 법 혹은 정당한 믿음마저도 바르고 그름의 분별심에서 발원한 것이라면 이 또한 집착의 대상이 된다는 점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저는 그런 바른 법에 대한 집착을 강하고 가지고 있었고, 이것이 저를 고통스럽게 했다는 것을 이 만남을 통해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온전히 바른 이해는 아닐 터입니다. 인과를 분별이 없는 진리라 한다면 저는 지난 생에서 지게 된 빚을 지금에서야 갚는 인과의 과정을 겪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애초부터 도난이란 표면적인 모습이나 제 마음 안에서 느껴졌던 역경계가 아니라, 삼세를 걸쳐져 지게 된 업을 받아들이는 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 만남은 제 마음을 계속 주시해서 살펴보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제가 과연 ‘지금, 여기’에 어느만큼 집중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점검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수선하게 일어난 마음들을 차차로 정리해가며 제 집착의 근원이 무엇인지 면밀히 파헤쳐 보는 기회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애초에 세계를 만행하며 단지 볼거리 즐길 거리를 찾는 게 아니라 제 마음이 반영된 세계를 경험하고자 했던 제 처음의 원력이 이런 만남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만 같기도 합니다. 마음은 이렇게 참 妙하구나, 하여 지금에 있어선 혼자서 피식 웃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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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圓帝 스님은 2006년 해인사로 출가 후 선원에서 정진하였으며 2011년 해인사 퇴설당에서 은사스님을 모시며 수행하던 중 2012년 가을, 유라시카(Europe, Asia, Africa) 만행을 기획하여 2012년 9월부터 세계 만행 중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