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시를 들으러 동쪽으로 가다(聞詩徹東行)>, 종이에 담채, 30.5×23.2, 간송미술관 소장, 서울.
숙종 이후 영, 정조 시대의 조선 사회는 흔히 문예부흥시대라고 불릴만한 때였다. 양란이 끝나고 사회와 경제는 빠르게 안정되었다. 사회의 안정은 문화 인프라를 풍부하게 하면서 사상은 물론이고, 문학, 미술 등 문화계에 선순환적 구조를 가져왔다. 지난 회에서도 언급했듯이 당시 지식인들에게는 사상적 자신감이 충만하였는데, 세상의 중심이 바야흐로 조선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때의 문인들은 불가佛家와 도가道家의 유토피아로 금강산을 지목하였고, 금강산은 많은 유람객으로 넘쳐났다. 금강산 순례자들은 저마다 기행문과 금강산 그림을 그리던 시절이었다.
현재 불교사 연구자 사이에서 조선 후기 불교계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하지만 이 시기의 민간 불교는 세속화라고 하는 지렛대를 통해 저변에 폭넓게 그리고 깊게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고, 교단은 서산대사 이후 형성된 문파門派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승려들의 교육인 강학講學이 강조되고, 선과 염불念佛 삼매 수행의 저변도 확대되었다. 당시 고승들의 저작은 고도의 불교사상을 담고 있었는데, 당대의 지식인들과 선사들의 교류는 일상적인 것이기도 하였다. 불가와 유가의 교류는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고 있었다. 산중처사山中處士를 자처하는 선비들이 서원 대신 작은 암자에 의탁하여 공부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나고 교류하였던 것이다. 18세기에 활동했던 인악 의첨(仁嶽義沾,1746~1796)스님의 《인악집仁嶽集》을 보면 장처사라는 선비에게 염불삼매에 대한 경지를 설명한 〈여장처사與張處士〉라는 글이 전해지고 있고, “은적암 산령각에 대한 글(隱寂庵山靈閣記)”은 강인수姜麟秀라는 선비의 산령각 시주를 칭송한 글로 그가 은적암에서 글을 읽고 수행한 정황을 알 수 있다. 유학들의 불서와 불교수행의 섭렵은 단순히 이조참판 이덕수만의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황에 대해서 다시 김홍도의 그림에 의지해봐야겠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화첩 그림이다. 나귀를 탄 선비가 가던 길은 멈추고 장삼에 고깔을 쓴 승려에게 길을 묻는 장면이다. ‘시를 들으러 동쪽으로 가다(聞詩徹東行)’는 화제畵題가 적혀있는데, 많은 은유가 담겨 있는 그림이고 문장이다. 선비가 향한 동쪽엔 금강산이 있을 것이다. 관동팔경을 포함한 금강산 유람은 도석道釋 공히 이상향이었으며 많은 시인들이 금강산에서 오도송悟道頌과 비슷한 기행시를 남겼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림 속 선비의 동행길은 금강산이 분명할 터였다. 그런데 굳이 그 길을 우연히 만난 것 같은 스님에게 물었는가에 대해서는 승려들과 선비들 간의 교류를 배경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스님은 이미 동행東行의 길을 알고 있다는 사실도 깔고 있는 것이다. 금강산에 있었던 팔만구암자는 각설이들의 사설 속 말이기도 하지만, 금강산 비로봉은 불교의 최고 법신불인 비로자나부처님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또 달마스님이 천축국에서 동쪽으로 왔을 때처럼 나귀 탄 선비의 목적지도 동쪽이 아닌가하는 점이다. 또 동쪽은 봄을 상징하는 방향이다. 봄처럼 새로운 진리의 소식을 기다리지 못해 스스로 떠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화제 속 ‘철(徹, 뚫다, 밝히다)’의 의미 또한 범상치 않은 것이 동쪽으로 가는 길을 밝힌다 혹은 뚫고 간다는 ‘철’의 의미이다. 선비는 스님에게 길을 묻고 진리의 여행을 떠나는 것이 틀림없다. 화면의 구성 자체만으로는 그저 그럴 수 있는 그림이 그 내용을 더하여 음미해보니 아주 오묘한 화의畵意를 담고 있어 참 재미있다. 화가는 그림 속에 자신의 생각과 뜻을 담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지금 이 순간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과 그림 속에서 스님과 선비로 만날 수 있다는 감상의 묘한 즐거움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