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신앙화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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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 종림
1988년 04월 74호
불교는 기본적으로 무신론적인 태도를 가지며, 신앙적인 종교가 아니다. 신, 신심이라는 말이 있고 신․해, 행, 중의 교리적인 체계도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신은 이해나 의지를 포함한 믿음이지 신앙은 아니다. 신은 도의 근원이고 공덕의 어머니라고 한다. 이 믿음은 증(깨달음)을 위한 하나의 요소이지, 수행의 교리 체계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인격적인 절대적 타자에 대한 신앙의 태도도 아니다.
타력적인 종교에서의 자기 무화의 태도나 신앙은 자각을 통한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교와는 기본적인 태도에서 차이가 있다. 신앙화된 불교가 가지는 타력적인 태도나 기원, 기복의 태도는 어떤 의미에서는 비불교적이다. 종교는 시대나 상황에 따라 변화, 발전되어 가는 것이다. 역사적 종교로서의 불교의 본질과 비본질적인 요소를 가린다는 것은, 그것이 양파의 껍질을 벗기는 것만큼이나 곤란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가치 판단의 문제가 따른다.
불교의 신앙화나 기복화가 불교 역사에서 끼친 공과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원시 불교의 자등명 법등명이나 신적인 대상도 계시의 내용도 부정하는 선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비불교적인 요소이다. 이러한 불교의 신앙화 경향은 타락인지 발전인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불교의 본질적인 면을 변화시켰고 불교의례에 기복적인 민간신잉을 습합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이것은 한국불교가 통불교라고 자랑하는 일면도 되지만, 불교적 이념이나 행동방식에 혼란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고 있다.
현존의 고등 종교-유태계의 유태교, 기독교, 회교 및 조로아스타교, 그리고 인도계의 힌두교, 불교-가운데에서 불교(대승불교의 유신론적인 경향을 제외한다면)를 제외한 모든 고등 종교가 유신론적인 종교이다.
그들 각 종교가 궁극적인 실재를 인격적인 신으로 보느냐 비인격적인 존재로 보느냐 하는 것이 절대적 실재에 접근하는 방법의 차이를 낳는다. 궁극적 실재가 인격적인 존재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그 실재에게 숭배의 감정을 가지는 신앙의 형태를 취하게 되고, 인격적인 신의 가피나 은총으로 구원되기를 바라는 타력적인 경향을 가진다. 이러한 신앙적인 종교가 외향적이고 정적이라면, 지적이고 내향적인 종교로서의 불교는 인격적인 신의 은총이 아니라 열반을 추구하는 무신론적인 종교이다. 지적인 종교가 이성이나 직판에 근거한 지혜의 종교라면, 정적인 종교는 감정에 근거한 사랑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원시 불교가 열반에 이르는 실천에 그 중점을 두었다면, 여기서 파생된 대승불교는 보살적인 행위에 그 중심적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 기독교적 의미에서의 창조신은 아니더라도 보살은 인격성을 갖는다. 중생은 보살의 가피에 의해 구원받기를 바라는 신앙적인 종교의 형태를 가지게 되고, 그럼으로써 불교의 기본적인 태도의 변모를 가져오게 된다. 초기 불교에 있어서 불타는 교단의 카리스마적인 지배자도 아니었고, 숭배받는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신적인 존재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이 원시 불교의 무신론적인 성격이 유신론적인 경향을 가지게 되고 석존의 신격화로 인한 불타관의 변화로 말미암아 법에 따르는 실천적인 행위가 신에게 기도하는 신앙의 행위로 바뀐 것이다.
이러한 신앙적인 형태가 현세 이익과 관련될 때에는 인간과 신 사이에 이익 교환의 거래 형태의 관계가 성립된다. 이것이 공덕의 관념이나 기복 의례, 주술과 같이 기복화되고 무속화된 불교의 모습이다.
불타의 가르침은 무상한 것을 무상한 것으로 보고 자아에 집착하지 않으며, 욕망을 제어하고 실천을 통하여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부처님은 다시 태어나지 않기를 바랐다면 그와 반대로 자아에 집착한 중생은 영원히 살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죽어서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생천의 관념은 공덕과 업의 이론과 함께 윤회 전생의 기본적인 교리로 체계화된다.
부처님은 영혼의 유무나 사후 세계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 대답을 회피하였는데, 무아나 영혼 등의 교리적 갈등을 겪으면서도 윤회설은 불교의 중심적인 교리로 정착하게 되었다. 그것이 인간적인 요구에서 나온 한 방편으로 채택되었다 하더라도, 어찌하였든, 인도불교에서 정착된 윤회설은 중국어나 우리나라에 전해지면서 대환영을 받았다. 막연한 저승이라는 관념이나 귀령 신앙밖에 없었던 민간 신앙에서 윤희설의 도입으로 사후의 미래를 보장받은 셈이다. 윤희를 믿지 않으면 불교도가 아니라 할 만큼 크게 환영받은 윤희설은 천상에 태어나기 위하여 공덕을 쌓고 선한 행위를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영혼의 전도를 위한 49재, 미리 천상에의 길을 닦는 예수재의 의례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욕망의 불이 꺼진 니르바나가 불교의 이사이라면, 현세적인 욕망의 직접적인 충족을 위한 행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기복의 의례는 일상생활에서 발생되는 어려움을 초자연적인 힘을 빌어 해결하려는 행위이다. 결국 청원태로서의 기복, 구병, 예언, 주술 따위의 다양한 민간 신앙적인 요소가 습합된 모습이 한국 불교도의 생활인 것이다.
청원태의 신앙에서 초자연력과 관계할 때에는 기복적인 신앙이 되지만, 신적인 인격과 관계될 때에는 건전한 믿음이 된다. 불교 신앙화의 문제는, 감정적인 행위나 이성적인 진리 사이의 갈등의 문제만이 아니라, 세계관의 차이를 가져온다. 인간의 자아 중심성은 생존의 조건이기도 하지만 모든 죄의 근원이기도 하고 업에 의한 윤회의 원인이다.
이러한 자아 중심성을 벗어나는 길은 자아를 우주대로 확대하는 것이다. 이기적 욕망을 신적인 의지로 바꾸는 것이다. 개체보다 의미있다고 생각되는 어떤 것-국가, 민족, 이념, 신 따위에 자신을 맡겨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를 확대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으며, 자기를 무화시켜 원리나 법의 바다나 신의 품속에 뛰어들어도 자아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국은 이데올로기적인 자아에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비인격적이고 무신론적인 행위는 비록 자아 중심에서 벗어나게는 하지만 역사의 의미를 박탈한다고 한다. 이러한 비판은 역사의 진보가 있느냐 없느냐는 논쟁에서도 나타난다. 불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신의 의지이든 우주의 원리이든 필연적인 역사의 발전 법칙은 없다. 역사가 도전과 응전의 관계 속에서 엮어져가고 연기적 논리나 무유정법(無有定法)이라는 불교적 사고에서 본다면 역사의 발전 법칙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실재의 실상이 무상한 것이라는 것이 불교의 기본 태도이기는 하지만, 인과에 의한 필연이나 불변의 법이나 영원한 실재에 대한 믿음을 추구하는 일면도 있다.
사마천은 사기의 서문에서 천명이 있느냐 없느냐고 물었다. 천명이 있다면 세계는 이럴 수 없었을 것이라는 의미에서다. 인간은 끊임없이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 무엇인가를 추구해 왔다. 이와 같이 불변의 법칙에 천착하게 하는 것은 역사에 그같은 필연의 법칙이 없다면 역사의 방향도 노력에 대한 가치도,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이다. 역사에서 필연이라는 요소는 행위에 대한 지향점을 주고 미래에 대한 불안을 해소시켜 주는 역할도 했다.
아인슈타인도 신이 주사위 놀이를 했을 리가 없다고 하여 우주의 설계자로서 신적인 의지나 질서를 말하지만, 업자의 운동은 불확정성의 원리에 의해서 질서를 갖는다고 하였다. 생물학적인 진화에서 보아도, 비록 유전인자가 완전한 복제의 기능을 가지고는 있지만, 생물의 진화는 우연적인 요소 즉 돌연변이의 변종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육체상의 진화와 함께 관념 구성상의 진화가 함께 진행되는데, 관념은 관념 자체로서 독립적으로 진화가 진행되어 관념의 선택이 인간의 삶의 형태를 조건짓고 인간의 생존을 결정짓게 되는 것이다.
현대는 사회의 가치관이 다양화되었다. 이는 다양한 가치관이 허용되는 자유로운 세계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하나의 통일된 세계관이 없다는 혼란을 의미하기도 한다. 현대철학이 통일된 세계관을 낳을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첨예화된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해소하는 데에는 유신론적인 종교나 실재론적인 사고보다는, 화엄의 논리나 선의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태도가 강조되어도 좋을 것 같다.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라는 정치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민족이나 국가간의 국가주의적인 대립을 해소하려면, 자기 이데올로기를 앞세우거나 제국주의적인 태도를 갖기보다는, 초이데올로기적인 태도에서 해결의 관건을 찾을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 종교의 전시장이라고 할 정도로 여러 가지 종교가 혼재하고 있다. 원시 종교적 샤마니즘에서부터 현대의 신흥 종교 및 동서의 세계 종교들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다원화된 종교적 상황에서는 나의 종교만이 절대적이고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취하는 태도에 따라,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과 보편화를 추구하는 것의 두 가지 태도가 나뉘어진다.
신앙적인 종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절대성을 주장하는데, 이러한 절대성의 추구는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고 다른 종교에 대하여 제국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보편화를 취하는 입장은 포용적인 태도를 가지고 다른 종교의 존재를 인정하고 때로는 다른 종교의 진리를 수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수용의 과정에서 지적 오만을 범하거나 아니면 자신을 무화시켜 버리는 것이다.
종교를 초월적인 경험의 표출로서의 상정 체계라고 본다면, 경험된 세계는 실존적 의미(경험된 개인)에서는 절대적이다. 그러나 상징의 체계나 제도화된 교회는 역사적이다. 문제는 역사적 존재로서 종교를 절대시하는 데에 있고 경험된 세계에 관한 한 선택이나 가치 판단의 문제로 남는다. 상정 체계의 다양성이든 경험된 세계의 다양성이든 다원화된 종교적 현실에 있어서는 다른 종교의 진리 체계를 인정하고, 열린 마음으로 이해와 화해의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신적인 어떠한 대상도 가지지 않고 경험된 내용(깨달은 바가 없는)도 부정하는 불교적 태도는 절대성을 표방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종교의 각축장에서 하나의 장(場)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