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불교와 민간신앙 3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기획연재 - 진철승 1988년 04월 74호
1
미륵신앙은 대승경전인 미륵경에 근거한 신앙이다. 이는 대략 4세기쯤에 성립된 것으로 보이는 상생(上生) 신앙과 그 이전에 성립된 하생(下生) 신앙으로 구분된다. 이 미륵신앙은 과거불-현재불-미래불로 이어지는 인도의 불타관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부처님의 제자로 실존 인물이었던 미륵이 요절한 뒤에 미래 성불의 수기를 받음으로써 불교적 미래불의 관념이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미륵신앙에서 중심을 이루면서 좀더 민중적인 소망과 만나는 것은 상생 신앙이 아니라 하생 신앙이다. 상생 신앙은 십선도(十善道)를 잘 닦고 선업을 지으면 미륵이 천주(天主)로 있으면서 중생을 교화하는 도솔천에 태어날 수 있다는 신앙이다. 그러나 이는 그 경전의 내용상 아미타정토신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그 결과 민중적 신앙이 되지 못한 채, 현세의 복락을 내세에서도 누리려는 일부 지배층의 신앙으로 국한된 것으로 추측된다.
미륵신앙, 특히 하생 신앙은 중국을 거쳐 한반도의 삼국에 전래되면서 보다 독특한 신앙으로 전화된다. 미륵신앙은 백제의 미륵불국사상(彌勒佛國思想)이나 신라의 화랑과 미륵을 동일시한 미륵의 인격적 구현 등, 국가적 통치 이념으로 수용․전개된 측면이 있으나, 그것은 실제 고통 속에서 굴종의 삶을 살던 대다수 민중의 욕구와는 그다지 관계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의 생산 담당 대중은 봉건제적 수탈과 억압의 삶을 이겨 나가기 위해 이미 국가적으로 전개되었던 미륵신앙을 자기화시켰다. 그리고 그것은 한편으로는 기층 민간신앙과 접맥된 일상적 신앙이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변혁기의 사상적 기초로 활용되었다. ‘민간신앙화’와 ‘변혁 사상화’,이 양면이야말로 민중적 미륵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민간 신앙화된 미륵은 지금도 반도 곳곳에서 만나 볼 수 있다. 때로는 장승의 모습에서 미륵을 볼 수 있으며, 초라한 돌미륵의 짤려나간 코에서 민중의 기자(析子)신앙-이는 가부장제의 여성 수탈이면서 동시에 생산력 증대의 소망과도 상징적으로 연결된다-을 엿볼 수 있다. 때로는 자씨미륵존불(慈氏彌勒尊佛)의 모성적(母性的) 분위기 때문에 미륵이 마을 부녀자의 수호신이 된 신앙 형태도 볼 수 있다.
신라 하대 이래로 봉건 지배 구조가 약화될 때면 어김없이 이 미륵신앙은 민중운동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이는 나말여초의 궁예, 견훤(甄萱, 이는 견훤이 아니라 진훤으로 읽는 것이 옳다), 왕건 등에 의해 외화(外化)된 미륵신앙, 고려 말의 이금(伊金)․신돈, 조선 숙종 때의 미륵반단 사건, 정감록과의 관련, 동학․증산교 둥 신종교에 미친 영향등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각 사건은 각각 일정한 차별성이 있지만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생산 대중들의 강렬한 열망과 비원이 그 근저에 흐르고 있음을 공통적으로 인지할 수 있다.

2
먼저 민간신앙화된 미륵신앙의 면모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신라의 삼국통일과 발전에 있어 주도적 역할을 한 화량도는 전래의 가무유오(歌舞遊誤)의 제천의식(祭天儀式)과 불교에서 특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불교에서는 미륵하생 신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신라는 도솔천에서 설법하던 미륵이 하생하여 세 번 법회를 열어 중생을 구제하고 이 세상을 이상경으로 만든다는 내용을 자기화하여 나라의 대들보인 화랑을 미륵과 동일시하였다. 즉 미륵보살의 화신인 화랑에 의해 신라를 중심으로 이상세계가 이룩되길 기대했던 것이다. 이는 특히 삼국유사의 미륵신화(彌勒仙花) 미시랑(未尸郞) 전에서 잘 알 수 있는 바, 미시는 곧 미륵이며 미륵대성이 미시랑으로 화현하여 화랑도를 이끌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화랑 미시랑이 하생한 미륵이면서 동시에 물과 비를 다스리고 나라를 수호하는 용신적(龍神的) 존재라는 점이다. 이는 아마도 전래의 수신(水神) 개념이 용신으로 전화되었고 용의 발음이 ‘미리’, ‘미르’ 였다는 점과 관련될 것이다. 즉 발음에 있어 미륵과 미리(용)가 유사하고, 그 신이(神異)한 호국적 역량의 유사성, 그리고 미륵경에서의 ‘용화삼회(龍華三會): ‘용화수’, ‘용화세계’ 등 다양한 용례로 인하여 용신신앙과 미륵신앙이 습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륵의 화현인 화랑은 삼국통일 후 그 역사적 역할이 쇠잔해졌고 기층 무속에 화랭이(남동부 남자 무당)라는 명칭으로 자리잡으면서 불교와 무속의 습합을 일러 주고 있다. 또 용신은 계속 기층신앙의 대상으로 이어지다가, 조선조 숙종 때의 미륵반란 사건 때 또 다시 용왕을 섬기는 무당 용화부인(龍華婦人)으로 등장함으로써 용신신앙과 미륵신앙의 끊임없는 결합을 증명해 주고 있다.

2) 미륵은 때로 장승이나 입석(立石)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이는 특히 하체매몰불(下体埋沒佛)이 나타난 고려조 이후 오늘날까지도 계속 전승되고 있는 신앙 형태이다. 입석은 거석(巨石) 문화의 영향인 바, 때로 미륵과 동일시된다. 그것은 아마도 불교 탄압의 이조 시대에 불상의 파괴를 피하면서 계속 미륵을 신앙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인 바, 민간신앙화된 미륵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이런 입석이 있는 지역은 미륵골이라 불리웠으며, 입석은 미륵님으로 불리웠다.
미륵의 민간신앙화는 바리데기 설화 등의 무가에서도 확인된다. 바리공주는 죽은 이를 편안하게 저승에 보내는 씻김굿에 나오는 황천무가(黃天巫歌)의 주인공이다. 바리공주는 왕이라 정조신의 일곱째 딸로 태어나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그러나 바리공주는 신이나 자연, 또는 동물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한다. 막내딸을 버린 후 모두 불치의 병에 걸리는데, 타계의 생명수로만 고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첫째에서 여섯째까지 모두 험하고 위험한 타계에의 여행을 두려워하고 회피한다. 결국 버림받았던 일곱째가 타계로 가서 장승 또는 미륵님과 혼인하여 생명수를 구해온다. 바리공주는 가져온 물로 모든 사람을 되살리고 무선(巫神)이 된다.
이 바리데기 설화는 전형적인 재생(再生) 설화의 구조이면서 동시에 미륵신앙의 내용과 관련된 면도 보여 준다. 즉 바리대기는 말법 시대에 미륵의 하생을 갈망하는 민중들의 상징이며, 바리데기가 타계에서 만난 이도 미륵 혹은 미륵과 동일시되던 장승이고, 바리데기와 미륵의 혼인은 바로 미륵의 하생으로서 생명수는 하생한 미륵의 용화삼회 설법이며, 병든 이들의 나음은 곧 구원이며 이상세계의 실현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바리데기 설화와 미픅 신앙과의 습합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이와 같은 구조상의 유사성, 때로 타계(도솔천)의 주인으로 미루어 등장하는 점등으로 미루어볼 때 미륵 하생신앙이 전래되던 무조신화(巫租神話)에 영향을 주면서 그대로 민간신앙화된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3) 미륵과 민간신앙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여말선초의 매향(埋香)신앙이다. 매향신앙은 향나무를 땅에 묻어 얻어진 침향(沈香)을 매개로 하여 하생한 미륵과 만나고, 미륵이 주관하는 용화회에 참여함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신앙이다. 지금까지 향나무를 묻고 그 이유와 주도집단을 밝힌 매향비(埋香비碑)는 모두 5종이 소개되어 있다. 강원도 고성 삼일포(三日浦, 1309), 평안도 정주(1335), 경남 사천(泗川, 1387), 충남 해미(海美, 1427), 전남 암태도(1405)의 매향비가 그것이다.
이 매향비들은 단순히 신앙결사로서의 의미 외에도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향촌공동체의 성격과 규모를 밝혀 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국사학계에서도 최근 주목을 받고 있다. 즉 매향을 주도했던 조직으로서외 보(寶) 결계(結契), 향도(香徒) 등에 대한 연구를 통해 향촌 공동체조직의 성격과 그 변모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 중 삼일포의 장등보(長燈寶), 사천 지역의 천인결계(千人結契)와 암태도의 만불향도(萬佛香徒), 그리고 해미의 리중고로남녀유아(里中古考男女幼兒) 등 주도 집단을 명시한 비문을 살펴보면 매향집단의 성격을 보다 명백히 알수가 있다. 즉 삼천포나 사천의 경우는 수개 지역이 연합하여 치르던 신앙행사였으나 억불의 이조에서 이루어진 해미의 매향은 일개 마을의 신앙행사였다. 이는 바로 마을 공동체가 지연을 중심으로 일정한 성격과 내용을 가질 만큼 성장했음을 증명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변화는 농업기술상의 변동으로 인하여 사회구성 자체가 대단위적(수개 마을이 연대하여 신앙행사를 치르는 것-고려 초기 이후 향도 조직)인 것에서 소단위적(한 마을공동체를 중심으로 생산 및 신앙 활동이 이루어지는 것) 인 것으로 이행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소위 마을 공동체가 성립되면서, 더구나 억불의 이조에 들어 공개적인 불교 행사는 어려워짐으로써, 생산과 관련된 마을 중심의 마을굿이 주도적인 마을행사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미륵과 관련된 신앙집단으로서의 향도(香徒)는 향두꾼, 상두꾼 등의 민중직으로 전화되면서 보다 기층화되고 조선 후기의 각종 민중운동과도 직간접적인 관련을 맺게 된다.

4) 민중의 삶은, 더구나 봉건제하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던 대중의 삶은 엄청나게 고달프고 괴로운 것이었다. 이에 따라 당연히 그들의 소망은 지금의 고통에서 벗어나 보다 안락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미륵신앙도 선행을 하여 도솔천에 태어나자는 상생신잉이 아니라 하생신앙, 그것도 지금 여기에 미륵님이 하생하길 갈망하는 하생신앙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대상이 하체매몰불이든, 입석이든, 장승이든, 대사찰의 미륵불상이든 모두 지금 현생의 고통을 덜어 주고 소명을 들어 주는 자비롭고 영험한 부처님으로 섬기고 비나리하는 신앙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미륵의 현실 구복적(救福的) 민간신앙화는 기자(祈子), 치병(治病), 수호(守護), 기복(祈福) 등 미륵신앙의 현실적 목적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기자는 말할 것도 없이 아들 없는 부녀자가 가부장적 봉건사회에서 받는 고통과 수모와 미륵신앙이 결합된 것이다. 치병은 미륵불상의 얼굴 전면을 파서 삶아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속신(俗信)과 관련되며, 현존 돌미륵의 상당수가 이런 즐거운( ?) 수난을 당한 불상이다. 수호는 주로 마을의 수호인 바 미륵계(契)를 결성하여 미륵에 치성드리는 사례가 많이 보고되어 있다. 또 미륵신앙은 장승․서낭당 등과 같이 소원성취를 비는 대상으로 민간에 정착됨으로써 불교의 각 신앙 중 가장 기복적인 민간신앙이 되었다.
이와 같이 기충 대중 속에 일상화된 미륵신앙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리고 계급 소멸. 사유재산 소멸의 용화 세계를 예정한 혁명적 내용으로 하여 격동기에는 항상 변혁의 사상적 기초, 혹은 대중 동원의 효율적 방편으로 역사 뒤에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