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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기하학적 여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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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산책 - 종안┃해인강원 강사 2013년 03월 373호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는 한때 전쟁터에서 젊음을 보냈다. 조국 아테네를 위해 그렇게 좋아하는 학문을 내려놓고 창과 방패를 들고 분연히 일어섰다. 전장에서 돌아 온 소크라테스는 다시 학문에 빠져들고, 수학과 천문학을 포함한 ‘자연학’에 열의를 보이면서도 ‘인문학’에도 서서히 관심의 추를 더하고 있었다. 세월과 함께 지식과 사상도 무르익어 배움을 얻고자 찾아오는 젊은이들이 늘어났고 그 중에는 플라톤 형제들도 함께하였다. 나중에, 피타고라스의 기하학과 파르메니데스의 순수이성(존재론)을 유난히 탐닉한 “젊은 소크라테스”의 학구열을 계승한 플라톤은 그 법통을 자신의 Academy정사精舍 입구에 새겼다: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 문에 들어서지 말라! 언뜻, 플라톤의 요청은 선찰 일주문 주련柱聯으로 자주 만나는 ‘입차문래入此門來 막존지해莫存知解’(여기 문을 들어서거든 세속의 지식과 견해를 내려놓으시오!)와 대척되어 들린다. 사량분별심을 일으키는 지해를 내려놓으라는 주문은, 삭발을 통해 번뇌의 알음알이를 벗어던지고 염의를 걸치고 무차별의 선계禪界로 들어선 승려들에겐 곧 명령이다. 이러한 정서와는 크게 대조되어 보이는 플라톤의 기하학적(수학적) 요구는 어떠했을까? 알음알이에 불과했을까? 철학해 보기로 한다.
플라톤의 대화편 《Menon》을 보면, 테살리아의 젊은 귀족 메논이 아테네의 아니투스Anytus를 방문했을 때 소크라테스를 만나 ‘덕德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인가? Can virtue(arte) be taught?’를 시작으로 대화를 나눈다. 기원전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한 아테네에는 친스파르탄 30인에 의한 참주정이 실시되지만 이듬해 시민들의 궐기로 아니투스가 이끄는 민주파가 이들을 몰아내고 민주정을 회복하게 된다. 그러한 때 일어난 대화이다. 혼란한 시대에 도덕적 훌륭함을 저버리고 입신양명만을 추구하는 세태를 꼬집는 플라톤의 질문으로 평가된다. 하여간에, 질문을 받은 소크라테스는 덕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가르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선 더욱 알 수 없다고 주장하며 오히려 덕이 무언지 말해보라고 권한다. 메논은 당시 사회가 모범으로 삼는 다양한 덕의 목록을 제시한다. 정의, 지혜, 절제, 용기와 더불어 남성의 덕, 여성의 덕 등에 대해 상술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들은 모두 덕의 한 가지 모습일 뿐이며 덕의 진정한 정의定義가 되지 못한다고 심술을 부린다. 그 다양한 덕을 덕답게 만드는 그 무엇을 요구한 것이다. 덕의 본질, 덕의 원형, 덕의 진여를 보여 달라는 것이다.
거듭되는 요구와 거부에 짜증이 난 메논은 소크라테스를 향해 ‘논자의 역설(debater’s argument)’로 공격한다. “우리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설사 덕의 정의를 얻게 된다하더라도 그것이 우리가 원래 찾고자 했던 정의인지 어떻게 알겠느냐?”(Menon, 80d-e)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내고자 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면 더 이상 찾을 필요가 없고, 모른다면 모르기 때문에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찾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고 더구나 그것이 곁에 주어지더라도 원래 원하였던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덕이든 무엇이든 가르칠 수도 배워지지도 않는다는 모순에 빠지게 될 뿐만 아니라, 배움에 있어서 아무런 노력도 불가不可하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논박하기를, 배움에 관하여 “지혜로운 사람들로부터 들은 신성한 얘기”(81a)를 들려주겠노라며 “영혼은 불멸이며 끊임없이 윤회하며 이 세상과 저 세상에 속한 모든 지식을 다 배워 알고 있으므로,” 꾸준한 노력을 통하여 “덕에 관해서건 무엇에 관해서건 이미 전에 배워 알고 있는 것을 상기想起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81c-d )고 주장한다. 신체적 죽음으로 인한 망각 때문에 탐구와 발견의 노력은 필요하지만 기실 그 내용은 이미 우리들 영혼 속에 갖추어 감추어져 있는 지식과 지혜의 상기recollection를 위한 노력일 뿐으로 특별히 새롭게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소크라테스의 여래장如來藏 사상인 것이다. 번뇌와 무명으로 덮씌워져 밝히지 못한 불성佛性이 우리 모두에게 이미 갖추어져 있어, 일심으로 마음만 밝히면 견성성불見性成佛이 된다는 것이 여래장 사상이다. 아마도 소크라테스의 여래장은 자신과 플라톤이 우러러 보던 ‘지혜롭고 신성한’ 피타고라스학파와 파르메니데스학파의 영향인 듯하다. 그들은 감성의 세계sensible world에 의지한 지식과 믿음은 단순한 의견과 억측일 뿐이고 진정한 지식은 영원불변하는 그 무엇으로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마음의 눈으로만, 지혜로운 사유로서만, 다다를 수 있는 영혼 속에 늘 담겨져 있는 원형들archetypes이라고 한다. 그들 입장은 곧 플라톤 이데아론의 근거이자 상기설의 바탕인 것이다.
‘여래장(상기설)’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메논에게 소크라테스는 그 증명을 위해 Menon의 아주 어린 수하手下를 불러와 자신 특유의 Elenchus(문답식 변증법)를 펼친다. 메논을 앞에 두고, 소크라테스는 “기하학에 무지한” 그 소년으로 하여금 기하학의 기본공식 중 하나인 ‘주어진 정사각형의 대각선을 한 변으로 하는 새로운 정사각형은 원래 주어진 정사각형 면적의 두 배가 된다’는 점을 단지 여러 차례의 엘란코스를 통해 스스로 깨달아 이끌어내도록 한다(82b-86a). 주지하듯이, 기하학의 공리나 정리는 현실세계의 도형figure을 바탕으로 이해되지만 그 절대값은 마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형상form일 뿐이다. 즉 기하학의 진리는 이데아의 세계에 속한 것이며 진여의 세계에 속한 것이다. 예컨대, “양변이 a, b이고 빗변이 c인 직삼각형은 언제나 ‘a² + b² = c²’이다”는 주장의 진위는 결코 아무리 정교한 도형을 사용할지라도 오차를 발생시키지만, 심안으로 본 직삼각형은 늘 본래 모습(이데아)을 통하여 주장의 참을 반드시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주 정교하게 그려진 직삼각형의 측정에서 미세하게나마 ‘a² + b² ≠ c²’라고해서, 우리는 ‘a² + b² = c²’ 정리定理가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이 완전히 정교한 직삼각형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말을 빌면, 그러한 이데아를 볼 수 있는 심안은 배워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원천적으로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훗날 Euclid(기원전 330-275)에 의해 기하학이 정립되어 공간에 관한 보편지식을 얻게 되는데, 공간 구조의 보편성은 감각에 의해서 주어지지 않고 이성에 의한 논리적인 따라서 보편적인 추론에 의거함을 밝히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플라톤의 기하학은 세간의 알음알이라기보다는 보편의 세계, 무차별의 세계, 진여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열어 보여주는 한 개 열쇠인 셈이다. 눈으로만 보이는 세간을 넘어 서 있는 것이다. 한편, 소크라테스는 대화편《Menon》과《Gorgias》등에서 덕의 정의를 지덕합일知德合一(Virtue is knowledge)로 규정짓고 덕은 지혜로울 때 그 본연의 기능을 다할 수 있다한다.
Academy 입구의 기하학에 대한 언명의 힘은 세월을 넘어 ‘엄밀한’ 서양학문의 전통이 되고, 먼 미래의 주역들인 데카르트와 케플러와 뉴턴과 아인스타인의 범우주적 발견에까지 그 힘을 미친다. 그들의 과학적 발견은 모두 본질적으로 기하학적 통찰로부터 얻어진 것이다. 뉴턴의 ‘운동의 법칙’이 그렇고 아인스타인의 ‘일반상대성원리(중력장이론)’가 그렇듯이 기하학적 이해 없이는 불가능한 성취인 것이다.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듣고 깨우쳐 태양계의 운행을 일반화시키는데 성공한다. 이를테면, 케플러의 ‘태양과 행성을 연결하는 타원궤도의 선분이 같은 시간 동안 그리는 면적은 항상 일정하다’는 면적-속도 일정의 법칙은 근본적으로 기하학이다. 데카르트는 기하학geometry과 대수학algebra을 융합한 데카르트-좌표계(Cartesian coordinate system)를 만들어내어 수학에 공헌한 바가 실로 지대하다. 덕분에 대수기하학이 가능해져, 도형을 순수한 방정식만으로도 서술해 낼 수 있어 공간에 대한 더없이 깊은 이해를 만들어주었다. 예컨대, 기준점(0, 0)으로부터 반지름 2인 구체적인 원circle의 방정식은 ‘x² + y² = 4’가 될 것이며 일반적인 원의 방정식은 ‘(x−a)² + (y−b)² = r²’으로서 임의의 반지름 r과 임의의 기준점 (a, b)에서 그려진 원이 될 것이다. 바로, 실재(공간space)와 언어(방정식equation)가 영역을 넘나들며 합쳐지는 모멘트를 제공하는 것이다. 영화 ‘메트릭스Matrix’의 가상과 현실의 결합이 의미 있게 와 닿는 이유인 것이다.
이제, 기하학(수학)은 인류의 온갖 문명과 문화에 불가결한 방편이 되었다. 생명현상 자체가 수학적 현상임을 현대과학이 자꾸만 증명하고 있다. 섣부른 직관이나 즉대卽對와 즉비卽非만으로 무시하기엔 기하학은 진여의 세계에 너무나 깊이 관여하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