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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간 갈등 문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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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김종찬 1988년 04월 74호
종교집단만큼 은연중에 정치적 색채를 내비쳐줌으로써 사회적 구조를 강짜게 확보할 수 있는 경우도 드물다. 우리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 또한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흔히 사회적 갈등이 상존할수록 이런 색채는 강한 편인데, 이런 갈등이 노골적인 사회 대립으로 치달았을때 종교의 정치화 추세는 더욱 강한 편이다 이를 두고 차라리 ‘기식구조’라는 혹평까지 등장시킬 수 있다.
지독히도 격렬했던 지난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이 역할은 강렬하게 내비쳐졌고, 그로 말미암아 종교 집단들의 상처 또한 컸다. 그것은 대통령 선거전이 본래적으로 지니고 있는 속성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사회변화에 대한, 또는 개혁의 폭에 대한 시대적 요구를 선거를 통해 규정짓겠다는 뉴앙스 때문에 격전일 수밖에 없었고, 종교 집단 또한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라는 측면이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 변화가 어차피 종교에게 새로운 시장터를 제공한다한 측면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지난 번의 격전은 새로운 종교 시장을 겨냥해서라기보다는 사회 변화의 폭에 종교 자신의 생존 여부가 포함되어 있다는 일종의 위기 의식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흔히 말하는 ‘불교는 보수’이고 ‘기독교는 진보’라는 도식적 구분마저 흔들릴 정도였다. 같은 종교 집단 내부에서도 기존의 교단 구조와는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정치화 추세에 휩싸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새로운 정권의 성격에 따라 기존 질서에 대한 부정의 폭을 가늠하는 척도가 결정된다는 의미에서 새롭게 보수와 진보의 성향이 내비쳐졌고, 그러한 태도는 정치 집단과 재빨리 밀착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정치 집단에게는 표밭을 가늠하는 한 척도가 됨으로써 도리어 철저하게 이용당한 측면 또한 없지 않다. 특정 후보의 특정 종교 집단의 지도자와의 유착이 공공연히 자행됐고, 종교에 대한 공약이 정치 선전으로 스스럼없이 등장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런 공약은 일반 종교인들과는 무관함에도 붉구하고, 정치 선전이나 선거 전략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여 종교 집단과 정치 집단이 동일시되는 양상으로마저 선전 도구화되었다. 그리하여 조직화되지 못한 대다수의 유권자에게 정차권과의 동질성을 메카니즘으로 작용하여 선거 과정에서 유감없이 그 위력을 발휘하였다.
사실 선거전이 격렬하다는 의미는 이해 관계를 달리하는 집단들의 대립이 특정 후보를 통해 강하게 대두되어 격렬한 마찰을 빚는 것을 의미하는데, 외형으로는 산업사회의 형상을 갖추었지만 여기에 걸맞는 이익 집단이 미성숙된 상황에서의 대립 양상은 자연히 원시적인 집단 구조에로의 급속한 복구 추세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것 또한 여권의 직선제 수용 원칙에서 처음부터 계획된 측면이 강하게 엿보이기는 하지만, 격전이 거듭될수록 소외된 유권자의 이런 경향은 점차 종교 집단이나 지역 연고로 내몰려졌다. 특히 ‘6. 29선언’ 이전까지의 민주화 운동을 통해 강세력을 형성한 집단들을 무력화시키는 데는 유감없이 위력을 발휘했다.
이로써 민주화운동으로 조직화된 진보 세력들이 정치 일선에서 후퇴하여 하나의 유권자로 해체되고 그와 이울러 보수 교단의 지도자들이 구정치권과 밀착되는 양상이 드러났는데, 이러한 양상은 격전 속에서 소외된 대중들이 종교적 귀속성을 찾을 수밖에 없게 한 근원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런 양상은, 뒤집어보면, 비번 선거전에서 종교는 철저하게 정치 집단의 시녀 구실을 담당했음을 도출시킬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정치 집단에게는 득이 될 수 있었지만, 종교 집단 전체로 볼 때는 엄청난 폐해를 가져왔을 뿐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미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었던 보수 교단의 때묻은 지도자들의 기사회생이다. 여기에 기식하고 있던 무리들도 이에 편승하여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전반적인 사회 변화에서물론이고 종교권에서까지 역기능의 요인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급상승은 빈주화가 지향했던 사회 통합에로의 접근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으로 종교의 기능이 전락하는 출발점을 제공한 셈이니, 곧, 종교 집단의 폐쇄성을 새롭게 도출시켜 자신들을 정점으로 하는 종교권의 재편과 사회 질서의 고착화를 지향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갈등의 상존으로 배려됐던 변화의 욕구는 어차피 새로운 합의점에서 사회적 통합을 거쳐 질서와 구조를 재편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존 질서로의 회귀보다 더 연약한 구조, 즉, 이해 관계를 바탕에 둔 인물들의 개인적 이익 집단이 사회 구조의 중심을 형성하는 형상으로 퇴보해 버렸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로 말미암아 가장 피해가 큰 집단은 역시 종교 집단이다. 그중 불교 집단이 입는 폐해가 가장 크다. 그것은 그동안의 불교가 사회적 역할과 기능은 도외시한 채 민족사 속에서의 기존 질서가 갖는 독보적 위치에 안주해왔다는 지적과 관련하여, 기존 질서를 고수한다는 것이 종교적 이해 관계에 재차 얽매일 수밖에 없다는 가능성이 짙어지기 때문이다. 더우기 그것은 더욱 폐쇄성을 띨 가능성도 농후하게 내비치고 있다.
선거의 후유증은 사실 여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어차피 선거 과정에서 특정 후보와 종교 집단은, 그 구성원들의 선택과 참여는 봉쇄된 채, 급속히 밀착된 꼴을 낳고 말아 종교간의 갈등을 노골화시킬 가능성을 충분히 안겨줘 버렸다. 가능성 정도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문제를 등장시키고 있기도 하다.
이중에서 여권 후보를 선택했던 불교는 안타깝게도 여권 후보의 부정적 의미까지 감수하면서 타 종교의 공격 대상이 될 가능성이 짙다. 이런 양상은 부분적으로 노골화되기 시작하였으니, 어느 지역에서는 공공연히 민주화의 좌절이 곧 불교 때문이라는 엄청난 폭언이 서슴없이 터져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이것은 불교에 대한 적대적 감정으로 발전, 여타 종교의 선교와 교세 확장에 도구로 작용하고 있기도 하다.
종교는 묘하게도 이런 단순한 감정이 종교 부흥에 대단한 유용성을 발휘한다. 그러므로 적대적 감정이 집단적 편견으로 아니면 이해 관계 대립으로 쉽게 발전할 수도 았다. 더우기 서구사회에서 탄생한 기독교류는 이런 감정에서 일약 세계 종교로 성장한 배경을 갖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사회 구조의 보편화라는 명제가 편견의 차원을 뛰어넘어 인류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기제를 만들었다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하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의 기독교를 두고 이러한 보편성을 전반적으로 찾아내기는 어렵다. 이들의 성장은 도리어 사회적 모순(초기에는 개화요, 근대화 과정 속에서는 산업사회의 갈등이요, 그보다는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급속한 개방화 추세 속에서는 민족자존 등)에서 선교의 동기를 부각시켜, 사회 구조의 한 부분을 장식했고 이를 바탕으로 교세 확장을 거듭해왔다. 아울러 이런 바탕이 특정 집단의 이해 관계를 결속시켜 준 측면도 있다. 물론 최근에는 이것들이 서로 상충되어 대립 양상을 띠고 있기도 하다.
어쨌든 이해 관계의 대립은 종교 집단의 속성에 따라 교세 확장에 좋은 매카니즘을 구축시켜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종교 사이의 대립 또한 쉽게 연출될 수 있고 노골화시킬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여기서 불교의 폐해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처음에도 언급했지만 이번 선거전에서 남다른 의미가 깔려 있다는 측면 이외도, 종교 집단이 정치 세력에게서 부여받은 이권이 눈에 띄게 드러날 경우, 문제는 더욱 노골화되기 쉽다. 불교가 이런 점에서 대단한 약점을 안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이권을 불교 집안 전체가 향유하거나 올바른 질서를 구축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었다면 문제가 다를 터인데, 특정 집단에게는 특정인 특히 보수적 이권에 매몰되어 있는 부류들과의 ‘거래’라는 속성을 벗어던지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이 남아 있다. 그 거래는 불교인 전체와는 어차피 무관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불교 집안 전체가 향유할 수 있을 정도로 가치가 높다면, 사회적 관계에서 유발되는 이해 관계의 대립이 집안의 결속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새로운 종교 시장을 개척할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거래’의 속성을 탈피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행하게도 이러한 형상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다. 그렇기는커녕 도리어 불교 집안 내부의 분규에 직접적으로 작용할 가능성마저 안고 있는데, 지금까지의 관행이 이 가능성을 더욱 높여 주고 있는 실정이다.
문제는 이미 시작되었다고까지 할 수 있는 대립 양상이 앞으로 만들어낼 결과이다. 어차피 재가 신도들을 조직적으로 강하게 결속시키고 있지 못한 불교이기 때문에, 이런 양상이 초래할 결과는 지극히 부정적이다.
더구나 근대화 과정에서 기존의 공동체들이 파괴되어 버렸고 새롭게 형성된 지역공동체(신흥 중산층들)의 경우 직장이나 학연 동의 공동의식이 강해지고 있는 형상을 검안해 보면, 이들 사회에 구체적으로 접근한 기독교 등이 이들에게서 연대감마저 형성시켜 주고 있고, 여기서의 이탈이 소외감으로 급속히 번져갈 가능성은 높다. 결국 이 소외감의 극복은, 우리 사회처럼 이익집단의 미성숙 속에서는, 종교권에의 편입으로 쉽게 이어질 수 있다. 이것은 곧바로 불교권의 왜소화를 의미하게 되고 종교간 대립의 악순환이 저질러질 가능성을 높여준다.
한 사회 안에서 다양한 종교들의 올바른 조화는 각각의 종교가 자신의 종교상에 입각한 위상들을 바로 정립할 때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종교 질서와 양태는 물론이고 현실적 사회 구조는 도리어 이것에 저해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종교 감당자들이 주체적으로 해결점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대개 사회적으로 승화되어 특수 이익과 편견을 불식시키는 사회적 기능에서 찾을 수 있지만, 사회적 가능이 열악한 불교에서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다름아닌 집안 존속이다. 즉 종교성의 회복이고 견실한 종교의식의 재건이다.
이미 왜곡된 질서와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과 관련하여, 이것은 불자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법회를 통한 재가와 승가의 위상 정립, 가치관의 확립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