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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대장경판의 각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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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박보하┃사진작가 2013년 03월 373호

세월은 유수와 같다는 말이 있다. 90년대 초 어느 일간지의 전통문화 코너의 대장경 전산화 사진 취재를 위해 처음 해인사를 찾았다. 그때 한참을 기다리다 컴컴한 밤중에야 어둠 속에 걸어 올라오는 스님 한 분을 만났다. 종림 스님이라고 하셨다. 젊은 스님이었다.
다음 날 니콘 F3카메라에 36컷짜리 컬러 슬라이드 필름을 넣고 스님이 모델이 되어 철컥철컥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장경각에 올라가 경판을 꺼내들고 찍기도 했다. 당시 뵈었던 장주 스님도 젊은 시절이었다. 촬영을 마치고 당시 연구소로 문을 연 지금의 우화당으로 내려와 스님이 타주는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온갖 종류의 커피와 커피기구들로 미루어 보건대 스님께서는 커피에 관심이 많거나 아니면 중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은 몰랐지만 커피 맛은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취재 중에 대장경 전산화를 시작한다는 말을 듣고 어쩌면 언젠가는 사진도 찍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해인사에 갈 때마다 이 일은 꼭 내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이번엔 종림 스님을 모시고 해인사에 내려가게 되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보경당 뒤쪽에 위치한 대장경 보존원 사무실이었다. 이런저런 인사가 오간 후 종림 스님께서는 당시 실무를 보던 남일 스님을 소개해 주셨다. 사진가라고 소개하자 남일 스님께서 혹시 뭘 좀 봐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잠시 후 스님께서는 어두컴컴하게 찍힌 대장경판 사진을 보여주면서 왜 이런 현상이 생겼는지, 해결책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드디어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가 바로 대장경판의 디지털 촬영 작업을 준비하던 때였다.
그 후 준비 과정을 거쳐 촬영 팀을 꾸려 해인사에 내려가 대장경 전산화 작업에 합류하게 되었다. 사간판을 시작으로 8년 동안 오직 해인사 대장경판 촬영에만 매달렸다. 8만 장이 넘는 경판의 방대한 양도 양이지만 조사, 보수, 청소 등 여러 팀이 함께하는 작업이라 촬영에서의 실수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칫 실수로 재촬영을 해야 하는 경우 모든 팀이 함께 움직여야 하고, 이는 곧 모든 작업의 중지로 이어지는 대형 사고를 의미했다.
때문에 촬영 스튜디오의 안전 문제나 사진 파일의 관리는 늘 지나치다 싶을 만큼 주의를 기울였다. 조명 장치의 발열 문제나 고용량 전기를 사용해야 하는 문제로 사진 팀원들에게는 늘 신심보다 기술적 완벽도를 먼저 요구했다 그런 탓에 사진 팀은 신심이 부족하다는 말을 가끔 듣기도 했다.
그렇게 해가 지나고 작업량이 쌓여 가는 사이 컴퓨터와 디지털 사진의 기술력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처음 600만 화소로 시작했던 촬영 작업이 끝날 즈음에는 1600만 화소로 바뀌었다.
사간판을 시작으로 법보전과 수다라장을 오가며 작업량이 쌓여갈 즈음 이곳에서의 나의 역할에 대해 문득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순간적으로, 어느 때는 온종일 머릿속에서 생각이 떠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즈음 촬영 중 경판의 활자면 바깥쪽의 모서리에 새겨진 글씨를 보게 되었다. 각수명이었다. 즉 경판을 판각한 판각자의 사인이었던 것이다. 천년 전 혼신의 열정을 다해 한 자 한 자 목판에 새겨 나간 각수의 영혼을 만난 것이다. 그때 비로소 지금 나의 역할이 바로 그런 것이어야 한다는 깨달음이 들었다.
촬영이 끝날 즈음 한쪽 면에 활자가 없는 경판 하나가 나왔는데, 그 뒷면에는 분필로 1965년 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다. 현재 공식적인 대장경판의 숫자는 정확하게 8만 1,258장이다. 사진 촬영은 물론 모든 조사 작업에도 전자계산기와 컴퓨터가 사용되었고 각 팀에서 수십 번의 검산이 이루어졌다. 사진의 파일 넘버는 자동으로 매겨진다. 때문에 경판의 숫자에서 오차가 나올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1965년도에 그리고 수기로 센 경판의 숫자가 단 한 장의 오차도 없이 지금과 일치 했던 것은 천년 전의 열정과 집중이 그곳에서도 그대로 제 역할을 다했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