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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의 횡포와 믿는 자의 갈등-종교백화점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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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김형균 1988년 04월 74호
눈 여겨 보아야 할 몇 가지 상황
〈상황 I〉 1901년, 당시 제주 읍성(邑城)은 통칭 ‘이재수의 난’으로 불리는 민중 봉기가 일어나 천주교와 그 신자들의 횡포에 대항하는 민중들이 한달 반 동안 일대를 점령하고 있는 가운데 5백-7백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이 난을 진압하기 위해 2척의 불란서 군함에 실려온 불군(佛軍)은 경군(京軍)과 함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여 이 재수, 강 우백, 오 대현의 세 장두(狀頭)를 교수형에 처하고 기타 주모자들을 징벌하였다.
8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이 민란을 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어 있다. 천주교 제주교구에서 발행한 「제주도 신축년 교란사」에서는 “…민란의 원인은 제주도민들에게 오랫동안 잠재되어 있던 외부 세력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것이며… (중략) …전통적인 민속신앙을 고집하는 도민들의 반감 등이 새로 내도하여 선교를 시작하게 된 천주교에 대한 증오로 노출되었던 것이다.”라고 하여 민속신앙을 ‘고집’하는 도민들의 천주교에 대한 ‘증오’로 원인을 규명하고 있다.
그러나 1972년 세상을 떠난 제주도 향토사학자 김 태승 씨의 유저(遺著)인 「제주도사론고(濟州島史論巧)」에서는, “봉세관(捧稅官) 강 봉헌은 집세감색(執稅監色)과 마름(舍音)은 모두 교인(敎人)을 전용하였는데 그들의 작폐가 많았다. 입교자들은 봉세관과 결탁, 각동 소재의 토속신앙 시설이 있는 공유지를 매입, 경내의 신목(神木)을 벌채하고 신당(神堂)을 부수었으며, … 어업세와 관련있는 각 포구의 객주들을 위협하여 입교를 강요하였고, 또 봉세관은 각포(各浦) 소산의 해산물을 교인들에게만 도매시켜 상인과 생산자는 매매치 못하게 하였고, 부녀자를 강탈하고 금전을 편취하였으며… 또 교인들은 신당에 제사지내는 일이나 무당이 굿하는 일까지 간섭하고 금지하는 권리를 행사하여 그들의 자유를 구속하였다…또 교도들은 프랑스 선교사의 세력을 빙자, 교당과 분회소에 형구를 비치하여 비교인(非敎人)이 교회와 교도를 비난하거나 원망하면 린치를 가했으며 민사-형사의 처리권과 판결권까지 행사했다”라고 각종의 자료와 보고서를 인용하여 상황을 분석한 후, 그리하여 견디다 못한 대정군내의 유지들이 자위수단으로 상무사(常務社)를 조직하여 교도들의 불법행위에 대항하게 된 경위를 상세히 밝혔다.
이러한 시각의 차이에 의해 오늘날에도 천주교측은 그 당시의 민중을 ‘폭도’나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선교사들을 성안시하고 죽은 교인들은 순교자라고 하며 현재 제주도의 교인이 2만이나 되게 늘어났으므로 ‘교회의 승리’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향토사가들은 “난의 직접적인 원인은 천주교의 포교방법이었다”고 주장하며 당시 교수형을 당한 이 재수, 오 대현, 강 우백을 추도하는 ‘삼의사비(三義士碑)’를 세워 ‘읍민을 괴롭히던 불의의 제악(諸聽)과 싸워서 이를 패배시켜 민중의 고통을 제거코자 한 의인이었음’을 깊이 숭앙하고 있다.

〈상황 II〉 어느 한 친구의 어머니가 금요일에 돌아가셨다. 풍습대로면 3일장에 의해 일요일에 발인을 해야 하지만 그 날은 ‘주일’이기 때문에 장사를 모실 수 없다며 하루를 당겨 토요일에 장지로 모셔갔다. 돌아가신 지 18시간 만에 모든 장례가 끝났다. 멀리서 오는 친지나 뒤늦게 온 문상객은 헛걸음을 치고 발을 굴렀다. 호상을 보던 이들도 너무도 빠른 삶과 죽음의 교차에 허망함을 느낀 것은 집에 돌아오고 난 뒤였다.

〈상황 III〉 두 남녀가 좋아했다. 종교가 다른 그들은 갖은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하고 부모와 함께 살게 되었지만 시어머니는 일요일 날 교회에 가지 않는 며느리를 인정할 수 없었다. 우상 종교를 믿는다는 심한 구박 속에서 며느리는 남편에게 분가하자고 했고, 시어머니는 교회에 나가거나 이혼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고 했다. 그 결혼은 불행으로 끝났다. 그 원인은 두 가지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남편과의 사랑 때문에 개종을 할 수 없었던 며느리의 자존심과, 우리 가족은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철칙에 얽매인 시어머니의 고집, 이 두 가지였다. 그리하여 하나는 자기의 종교를 보호하던 끝에 눈물을 머금은 희생자가 되었고, 하나는 독선(獨善)에 의한 가해자이면서도 성경의 말씀을 끝까지 지켰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상황 Ⅳ〉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에 다니던 어린이는 일요일이면 아빠와 함께 절에 나가 어린이법회에 참석했다. 어느 종교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 어린이는 절을 더 좋아했다. 국민학교에 들어가 2학년이 되었을 때 하루는 나이 많은 여선생이 그 반의 어린이들에 대한 종교 조사를 했다. 천주교․기독교 부문에 많은 손이 올라갔다. “불교 믿는 사람 손들어 봐요”라고 했을 때 손을 들은 그 어린이는 그만 머쓱해졌다. 오직 자기의 팔 하나만이 넓은 교실에 올라가 있었고 수많은 눈초리가 집중되었다. 얼굴이 빨개진 그 어린이는 그러나 곧 기쁨으로 충만해졌다. 나이 많은 여선생이 손을 들은 것이다. “나도 불교를 믿어요. 우리 반에는 불교믿는 사람이 둘이군요.” 어린이는 신이 났다. 선생님이 더욱 좋아졌다. 어깨도 으쓱해져서 집에 돌아와 엄마한테 온통 자랑을 했다.

〈상황 V〉 조그만 수퍼마켓의 주인 부부는 고민에 빠졌다. 교회가 하나였을 때는 함께 교회에 나갔고 두 개가 되었을 때는 둘이 각각 나누어 나갔기 때문에 교인 단골을 만들 수 있었으나 지금은 같은 동네에 다섯 개의 교회가 생겨 그만 단골인 교인들의 자기 교회에 나오라는 성화를 감당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부부는 아무 교회나 나가면 ‘교인 가게’로 통용될 수 없나 하는 원망감이 들기도 하였으나 딸이 자기가 나가는 교회로 나와야 된다는 각각의 요구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마침내 아무데도 안 나가기로 결정하였다. 서로 자기 교회가 아닌 곳으로 나가면 다시 안볼 것인 양 윽박지르니 차라리 아무데도 안 나가는 것이 단골 유치에 유리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갈등이 있어야 할 이유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는 종교만을 위한 투쟁과 갈등은 존재하지 않았다. 숭유억불의 시대에서도 그것이 내란이나 분쟁으로 비화되지는 않은 것이다. 사찰을 탄압하고 스님을 멸시했으나 부처님의 가르침만은 존중하였다. 동학혁명도 탐관오리의 탄압에 대한 민중 봉기였으며 동학 자체의 확산을 위한 운동은 아니었다. 적어도 이 땅에 사는 이들의 종교관은, 신앙은 인류의 행복을 위한 정신적인 양식이며 생활 질서의 보조기능을 담당해 줄 뿐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과 사회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종교 단체는 다음 다음의 문제로 미루어져도 아무런 부담감을 갖지 않았다.
즉 종교는 목적이 아닌 것이다. 어떠한 신앙도 사람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하면 좋은 것이다. 가뭄이 들면 하늘에 빌고, 빗님이 오면 감사해 했다. 천벌을 제일 두려워했고, 역천(逆天)을 금기로 알았다. 그 하늘은 자연의 섭리이었다. 하느님도, 인간 스스로 또 그 섭리 속에 있는 섭리 자체이다. 모든 것이 포함된 섭리이기 때문에 어떠한 윤리도, 어떠한 학문도, 어떠한 신앙도 인간을 위한 조화(調和)에서 벗어나 생각할 줄을 몰랐다.
씻김굿을 하는 무당이나 수륙재를 지내는 스님이나 기우제를 지내는 사제도 그 어느 누구도,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평안케 하면 배척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종교를 도구화하지도 않았고 세력화하지도 않았다. 종교가 왕권의 위에 서서 호령하지도 않았다. 다른 이를 공격하는 도구로 쓰여지지도 않았으며 그저 부엌에 있는 그릇처럼 생활의 하나였다. 씻김굿도 수륙재도 기우제도 좋은 것은 다같이 공경했다. 모든 이가 불교 신자이었고 모든 이가 민속신앙을 추종했고, 좋은 것은 모두가 좋아했다. 마치 공기(空氣)가 사람을 구분하지 아니하고 초목을 구분하지 아니하고 존재해 있듯이 그렇게 믿음의 세계는 같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불볕 뜨거운 대낮처럼 종교와 종교의 문제로 첨예한 대립을 이루고 ‘승리’와 ‘패배’의 두 길에서 헤매이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갈등의 산만한 현상은 왜 우리를 괴롭히는가.
착하게 살면 누구니․죽어서 좋은 곳에 갈 수 있다는 논리가 아닌, 아무리 착해도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갈수 없다’는 독선의 논리가 시작되고부터 우리는 평화의 공간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여호와의 앞에선 이는 ‘선택된 사람’이라는 선민(選民) 의식이 풍선처럼 부풀어올라, 흰 옷 입은 단일민족의 정감에 계급을 이루고부터였다.
반만년의 모든 풍습은 미신이요 우상숭배라는 ‘서구적 종교개념’이 제대로 된 학문인 줄 아는 눈 어둔 학자들이 이땅에 있고부터였다. 미신(迷信)이란 말은 우리나라에서는 없던 말이고 사용되어 본 적이 없었다. 마녀(魔女) 사냥할 때 하던 기독교인들이 쓰던 Super-stition을 번역하며 생긴 조어(造語)였다., 우상숭배도, 로마시대에 독수리나 송아지 등의 우상 앞에 산제물을 바치며 빌던 풍습에 반대하여 생긴 용어였다. 기독교를 받는 서양사람들을 선의 사도처럼 받들고 배우고 쫓아다닌 이땅의 모서주의자(慕西主義者)들에 의해서.
신앙인들간의 갈등이 있게 된 이유는 바로 그렇게 시작되었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와서 세 가지의 옹졸한 교리를 펴지만 않았어도 박해는 받지 않았을 것이다. 바이블의 모든 것은 좋은 것이고, 그것에 반대되는 전통문화의 모든 풍습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흑백(黑白)논리’와, 교회에 나가면 선택받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선민논리’와, 그래야만 말세, 지옥의 위협 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독선논리’만 내세우지 않았다면, 그들은 칭송받을 수 있는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고 또 그에 합당한 일을 행했다. 누구라도, 나라도, 가끔 그곳에 가서 말씀을 배웠을 것이다.
근년에 이르러 국정교과서의 기독교적 편찬 내용에 얽힌 사건, 전직 승려였다는 명 진흥 목사의 불교 비방사건, 닥군성전 건립 반대사건, 광신교도에 의한 제주도 관음사 방화 사건, 주요 기도처 석물(石物)에 대한 십자가 표기사건, 87년도 대통령 선거 당시의 입후보자간의 종교적 비리사건 및 자기 종교를 청와대에서 펼치겠다는 망언 등, 지상(紙上)을 어지럽히는 종교적 소요가 점차 거세어지고 있다. 이미 ‘갈등’의 단계를 지나 ‘분란’의 시점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불교의 근성(根性)
이땅의 종교사 중 대부분을 불교사가 차지하고 있는 것은 두 가지 관점에서 인정할 수 있다. 하나는 일천육백 년 동안 불교가 이루어 온 문화, 윤리, 사상 등의 제방면에서 그 방대한 공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불교가 갖는 독특한 힘, 즉 ‘크낙한 포용(包容)’의 종교관이다.
원리(原理)는 대승이요, 현현(顯現)은 보살이라고 허는 이 ‘크낙한 포용’은 매우 흥미로운 속성을 갖고있다.
동양의 종교 특히 불교를 이해할 때, ‘종교’라고 하는 개념을 서구적 종교학의 개념 아래 고착시켜서 조직적인 종교세(宗敎勢)라든지 사회 현실에서의 표출력(表出力), 현대적인 이용도(利用度)로 구분하여 현상적인 힘만을 따지는 것은 실상과 거리가 먼 판단을 하게 된다. 그것은 서구종교를 논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불교가 그러한 종교들과 같이 분류되는 종교라고해서 인식하는 궤범을 똑같이 하는 것은 편견의 어리석음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마치 아버님이 가르쳐 주시는 교훈처럼 일생의 귀감으로 삼고 선생님이 가르쳐 주는 지식처럼 배우고 익혀서 내것으로 하며, 점차 완전한 인격으로 가는 보살의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중을 위하여 불교가 무엇을 했느냐하는 식의 종교단체의 활동 논리보다는, 부처님 제자인 우리는 무엇을 했느냐는 종교인으로서의 자세가 주요한 것이고, 민족의 발전을 위하여 불교라는 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로 질문할 것이 아니라, 불제자들은 민족의 발전을 위하여 과연 부처님 말씀다웁게 하였느냐고 물어보아야 한다.
종교라고 하여 굳이 단체나 그룹을 이루어서 ○○불교 단체, △△불교 협회 식으로 세력화하고자 하는것은 자체의 행정이나 교육, 연구, 포교를 위하여 그 나름대로 필요하지만, 그 단체가 바로 대사회적인 실력을 행사하는 힘을 가져야 한다는 논리를 성립시켜서는 안 된다. 진정한 불교의 힘은 안개같이 스며들어 공기처럼 있는, 모든 대중이 함께 하는 행동 방향 그 자체로서 올연히 빛나는 것이다. 제법무아의 도리를 가지고 이 세상의 정치, 경제, 문화에 영향력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분야에서 힘을 행사하는 이들을 가르치어, 제법무아를 배우고 익혀 그 뜻과 같이 살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근성은 좀더 많은 사람이 좀더 정확히 부처님 말씀을 배우고 수행 정진하여 보살의 길로 나아가게끔 하는 데서 할 바를 다해야 한다. 행여 경제적인 파워나 조직적인 힘을 자체에서 갖추어, 종단이나 불교 단체에서 경제적인 힘이나 조직, 인력의 위세로 세상을 정화한다는 식의 물리적인 힘의 논리를 펴려 한다면, 그것은 서구종교적인 발상일 따름이니 잘못된 태도이다.
막강한 조직력을 갖추어 그 힘으로 정세를 바꾸고 교육 내용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또는 국내외로 대단한 경제력을 갖추어 그 힘으로 자기 교단의 위세를 증강시키는, 그러한 종교 운영은 이땅의 사탄이요 마귀인 것이다. 종교답게 진리를 통한 감동과 이해로, 불교답게 인격 완성과 이타(利他)의 보살행으로, 진정한 ‘우리’의 기둥이 되어야 한다.
불의(不義)를 보고 스님이나 재가 불자가 참지 못하고 일어서는 것은 부처님 말씀을 배운 ‘사람’으로서, 피를 나눈 ‘겨레’로서, 그러하지 못한 이들의 횡포를 막는 것이며, 일찌감치 그들을 불법의 세계로 교화하지 못한 책임을 통분하는 것이지, ‘불교’를 위해서, ‘종교’를 위해서, 주먹을 불끈쥐는 것이 아닌 것이다. 불교가그 때문에 성하고 쇠하는 것이 아님은 당연지시이며, ‘크낙한 포용’에 의해 누구라도 부처님 말씀다웁게 행
하면 기독교인도 도반으로, 기독교 단체도 승가로 여기며 기뼈 찬양하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근성일 것이다. 이땅에 90 퍼센트 이상이 불교 신자라 해도 그 힘으로 타종교를 억누르지않는 모양새, 정치와 사회와 경제에 종교 단체로서의 인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 차림새, 불교를 믿거나 안 믿거나 이웃을 돕고 착하게 살면 누구나 극락에 갈 수 있다는 가르침, 이와 같은 것이 이땅의 불교가 더욱 부처님 말씀다웁게 꽃필 수 있는, 부처님 당시의 정법시대(正法時代)로 환원할 수 있는 ‘근본 성품’인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을 원만히 이루기 위해 우리는 종교 사이의 묘한 경쟁심, 종교를 생활의 수단으로 삼는 사리사욕, 종교단체를 명예의 도구로 이용하는 삿된 미음을 떨치고, 이 산만하게 빚어지고 있는 ‘종교 백화점-코리아’의 실태를 정시해야 한다.
그리하여 점차 크게 일고 있는 종교 갈등의 파랑(波浪) 속에서, ‘산악 같은 무게와 바다같은 심상(心像)으로 행열을 이루는 합창한 이들의 모습’을 나투어야 한다.

모욕에 흔들리지 말고, 비방에 찡그리지 말고, 정치와 사회의 무분별한 종교세 개입에 안달하지 말고, 우리 모두는 이땅을 벗어날 수 없는 겨레이듯, 모든 이는 부처님의 자비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진정한 믿음’으로 눈길을 마주치자.
하여, 그들의 행하는 모든 종교적 공격과 문화적 파괴에 대한 피해 망상을 벗어나, 하나하나 수습해 나가자. 그 모든 방면에서의 분규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기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