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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산책(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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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산책 - 종안┃해인강원 강사 2013년 02월 372호

부처님 당시(기원전 6세기), 주지하듯이, 세계는 소위 야스퍼스가 ‘축의 시대Axial Age’라 부르는 정신문화(특히 종교와 철학)의 폭발적 분출을 맞이하게 된다.
축의 시대의 인도는, 북쪽의 유목 아리안족이 이미 상당한 세월 전에 갠지스 강 유역으로 이주해 와 농경생활로 정착하면서 토착민들을 다스리며 비교적 안정된 삶을 구가하고 있었다. 사회 안정의 기반인 농업은 점차 기술적 혁신을 바탕으로 가내수공업과 운송수단의 발달을 가져왔고, 급기야 원시자본주의라 불릴만한 활발한 상업무역 거래를 통한 자본 부호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상공업에 종사하는 부호 세력은 당연히 카스트caste에 묶인 자신들의 사회계급적 차별을 달갑지 않게 여겼고, 그 차별의 사상적 배경인 브라만Brahman적 세계관 또한 거부하기에 이른다. 결과적으로 많은 사상가들이 새로운 사회질서를 내세우며 알려진 바 62견 363종의 沙門의 시대가 열린다. 그러한 때에 고타마 부처님의 출가, 득도, 전법의 세월도 함께 흐르고 있었다.
같은 시기에, 중국은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겪으며 ‘백가쟁명’의 번쇄를 인내한다. 유가, 도가, 묵가, 법가, 음양가 등으로 알려진 제자백가의 이론들은 경세제민의 기치를 건 통치세력들의 ‘합종연횡’하는 500여년 세월을 떠받쳐 주고 있었으며, 통치세력들을 향해 지치지 않고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고대 중국은 진시황의 통일(기원전221년) 시기를 지나, 한무제에 이르러 비로소 동중서의 ‘파출백가罷黜百家 독존유술獨尊儒術(제자백가를 퇴출시키고 오로지 유가 학술만 존중한다)’의 권유로 유가는 정치이념화의 궁극적 촉매가 되고 그 후 2000년 중국 사상사의 중심에 선다.
한편, 또 다른 문명 발생지의 한 축을 맡은 중동과 서아시아에서는 페르시아가 오랜 바빌로니아를 밀어내고(기원전 539년) 확장을 계속해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에 걸친 국제적 영토를 관할하는 역사상 최초의 대제국으로 변모해 가고 있었다. 제국의 출현은 인접 문명 사이의 호기심과 충돌을 동시에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동방(페르시아)과 서방(그리스)의 문화교류와 함께 정복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일례로, 아테네 동북부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의 원정 침탈의 실패는 올림픽의 위상을 레슬링에서 ‘마라톤’으로 바꿔놓은 사건이었다. 어쨌든 오래지 않아 다리우스는 알렉산더에게 무릎을 굻었고(기원전 330년), 헬레니즘이라는 동서방 병립의 국제정세와 문화혼합이 기틀을 잡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때, 즉 부처님과 공자께서 인성개조와 사회개혁의 단초를 치열하게 추구하고 있을 때,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국가 Miletus란 곳에서 Thales(기원전 625-547)란 젊은이는 세계와 만물의 물질적 근본이 무엇인지, 우리가 경험하는 자연현상은 왜 우리가 경험하는 그 방식으로 운용되는지 궁금해 하고 있었다. 당시엔 상식이었던 신화적 설명은 더 이상 그를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오랜 집중 끝에 그는 ‘만물은 물이다’고 선언했다. 물질(水)은 형태를 바꾸어가며 다른 성질(木, 土 등)을 가진 개체로 전환 될 수가 있고, 그 전환을 이끄는 자연의 질서는 신화적 우발偶發에 기인한다기보다는 필요 충분한 스스로의 이유에 의해서만 작동하는 내재적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연현상의 설명방식을 신의 노여움과 사랑 혹은 상과 벌이 아니라 우리의 이성을 통해 이해 할 수 있는 합리적 보편률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은 신화를 버리고 합리를 택하였으며, (서양)철학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지중해 연안의 여기저기서 소위 七賢이라 불리는 큰 학자들이 나타난다. Heraclitus (만물유전), Parmenides(만물불변), Democritus(원자론) 등이 그들이다. 모두 합리적 사고에 기반한 세계와 인성에 대해 나름의 학설을 제시한다. 요즈음의 과학적 세계관이 상식이 된 견지에서는 그들의 이론과 논증이 오히려 교과서적이리만치 친숙하고 평범하다, Parmenides만 제외한다면!
Parmenides의 세계관은 흔히 ‘만물불변萬物不變(不滅)’이라 불리며 언뜻 보기에 우리의 상식과 현상세계에 대한 정반대의 언표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는 무상無常의 세계이며 易經의 근거인 바, 만물불변이란 주장은 억지 명제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런데 Parmenides의 이론은 긴 세월을 거치면서 수많은 철학자들을, 예컨대 고대의 플라톤과 현대의 하이데거를, 감동시켜왔고 또 그만큼 그 사상의 깊이를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언가 우리의 현상적 의식을 뛰어넘는 논증이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무얼까? 그에 따르면,
1. 만물은 불멸이고 불변이다. (Being is imperishable and unchangeable.)
2. 존재는 곧 사유이다. (Being is Thinking.)
논변: [설명1] 유有(being)는 무無(not-being)가 아니며, 무도 유가 아니다. 무언가(有)가 변한다(變, changeable)는 것은 그 무언가의 일부가 혹은 전부가 사라져 없어진다(滅-無)는 뜻이다. 역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미 언급했듯이 유有는 무無일 수 없다. 따라서 이미 있는 것은 불멸이고, 그러므로 또 불변이다. 더구나, [설명2] 무無는 (대상이 없고 내용이 없기 때문에) 인지되거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만약 무無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그 무엇이라면, 반드시 그 무엇의 존재가 우선 전제된 후 그 존재를 부정하여야 한다 (When you think of not-being無, you must think of something有 which you think it is-not無). 이는 모순이다. 따라서 (無를 포함한 어떠한 사유든) 사유는 존재이며 또한 존재는 곧 사유인 것이다.
Parmenides의 논증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는 ‘눈 푸른’ 독자들께서 감당해 보시기 바란다. 참고로, 위 논증은 긴 오리지널의 생략형이다. 그리고 가장 대표적인 반대의견에 따르면, 당시의 여러 철학자들이 그랬듯이 그리고 아직도 여전히 많은 사색가들이 그렇듯이, Parmenides가 동사-be의 존재론적existential 사용법과 문법론적predicative 사용법을 부주의하게 다루었다고 주장한다. 실재와 실재를 닮은 허구(언어)를 혼돈하였다는 것이다. 이 역시, 눈 푸른 독자들께서 판단하실 일이다. 라이프니츠의 저 유명한 질문 ‘왜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일까?’는 손대지 않은 Parmenides 그대로이며, 자신의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와 존재자(특히 현존재Dasein)를 구별해야만 한다고 소리 높였던 하이데거도 그 원천을 Parmenides에 둔다. 이와 같아서, 필자는 Parmenides 논증의 可否는 비껴두고서 그의 주장 자체에 대한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다. 과연 우리의 상식에 정면으로 도전한 만물이 불변이고 불멸인 경우는 도대체 어떤 이해를 요구하는 것인가? 철학해 보기로 한다.

먼저, 우리 모두는 3차원 세계 속에 ‘자유로운’ 좌표이동을 하면서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4차원 시간에 ‘묶여있다’고 믿는다. 시·공은 스스로의 절대값을 가지고 있다. 판단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독립 존재로서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시공에 관한 우리의 이해는, 즉 시공에 놓인 사물들의 상호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상대적이다. ‘길다’, ‘짧다’, ‘빠르다’, ‘늦다’, ‘무겁다’, ‘가볍다’ 등의 개념 도구에 의존한 이해이다. 이해와 평가의 기준은 언제나 변할 수 있고, 따라서 상대적이다. 시공과 사물 자체는 우리의 개념과 의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杞憂겠지만, 혹 손을 드신 독자께는 당분간 유식론은 보류해 둘 것을 제안한다. Parmenides는 적어도 물질주의를 버리지는 않았으니까. 시공(색) 뿐만 아니라 수·상·행·식도 당연히 개념적 틀을 요청한다. ‘달다’, ‘쓰다’, ‘힘들다’, ‘악착같이 깨어있어야 한다’는 판단에도 의사소통 단위집단의 기준틀(reference frame, 즉 언어)이 요청되며, 그래서 상대적이며 또 그래서 상호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언어와 관련 없는 인식도 생각해 보자. 박쥐와 돌고래는 소리를 ‘볼’ 수 있으며, 뱀도 열을 느끼지만 오히려 멀리서 ‘볼’ 수 있으며, 개는 동구 밖에 들어서는 주인의 존재를 보지 않고도 듣지 않고도 자신만의 확실한 방법으로 ‘알아’ 낸다. 이는 그들만의 인식 기준틀을 달리 가졌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를 인식의 선험적a priori 구조 혹은 범주category라고 불렀다. 각자의 경험을 바로 그 경험이게끔 만들어주는 원래 바탕을 말한다. 우리의 인식내용은 우리에게 주어진 인식범주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며(내재적 분석), 따라서 인과적이지만 상대적이며, 그 상대적 범주는 곧 인식의 한계상황을 보여주는(외재적 접근) 것이다. 눈은 눈을 제외한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눈 자신을 볼 수는 없다. 설사 거울 앞이라도 눈의 기능이 아니라 눈의 형상만 볼 수 있을 뿐이다. 色弱인 내 친구는 운전을 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아무리 노력하여도 그 만의 ‘선험적’ 인식 한계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적이란 결국 한계적이란 말이다. 개념과 이론으로 묶인 한계, 의식과 소망으로 묶인 한계, 즉 오온에 묶인 한계, 그렇게 우리의 인식은 相의 노예인 것이다.
Parmenides의 만물불변은 결국 변화를 읽어내는 인식론적 범주가 단 한가지 밖에 없다는 것이다. 산냐(相 samnjna)가 단 한가지 밖에 없다는 것이다. 존재이든지 아니든지, 즉 無이든지 有이든지! Parmenides도 당연히 우리와 같은 오온에 휩싸인 보통 신체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역사적 반대 증거는 없다. 그렇다면, 그도 일상적 변화를 느끼고 겪었을 것이며 또 그렇게 생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만물불변을 유도하는 단 한 가지 동사-be 만을 사물의 속성으로 인정했을까?
공간은 최소한 인식론적으로는 무한하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무한한 공간 속에서는 기준이 따로 없다. 무한한 공간 속에서는 A와 B라는 두 물체의 상·하·좌·우, 멀고·가깝고의 (절대)기준이 없다. 그저 상대적일 뿐이다. 숫자로 단위를 붙여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보이게 만든 거리와 속도도, 우리가 정한 표준을 넘어서서는 (절대)기준이 없다. 그저 상대적일 뿐이다. 시간도, 무게도, 부피도, 모두가 무한한 연장을 상상함으로써 가능한 개념들이다. 그래서 그들도 모두 그저 상대적일 뿐이다. 더구나, 우리의 육근六根을 통한 모든 감각과 의지의 내용도 이미 주관적이며 상대적이라고 밝혀져 있다. (믿고 싶지 않지만 말 덧붙인다면) 육도를 윤회하는 모든 유정들도 그러할 것이다.
정리하면, 어떠한 인식의 내용도 그 인식내용의 판단 기준이 선험적이지 못할 경우엔 다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설사 선험적이라 해도, 우리는 이미 선험적 범주가 우리의 선택이 아닐 뿐 우리 인식의 한계상황으로서의 상대적 범주임을 안다. 따라서 모든 게 상대적인 것이다. 모든 산냐는, 우리의 모든 이해는, 상대적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도 칸트도 모든 相(개념, 판단기준)은 정등각의 내용이 아니며 물자체(thing-in-itself)의 속성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하니, Parmenides의 사고법에도 상대적 속성은 진정한 속성이 아닌 것이며, 사물의 진정한 관찰에 필요한 기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고 Parmenides는 강변한다. 바로 ‘존재’, ‘유’라는 사물의 속성인 것이다. 존재는 비존재라는 상대가 없다는 것이다. 비존재라는 것은 그저 없는 것일 뿐, 존재에 대한 상대적 속성의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존재라는 사물의 속성만이 유일하게 상대적이지 않다는 것이며, 우리들의 온갖 상대적 의견doxa에 노출되지 않고서 진리truth를 담보해주는 객관적 판단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 또한, 라이프니츠의 고뇌에 찬 그러나 너무나 단순하여 무미건조한 질문 ‘왜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일까?’의 답이 있는 것이다.
하여서, 비록 Parmenides도 우리와 동일한 제행무상의 세월을 겪었겠지만, 그의 집중集中이 지시하기를 오로지 적법한 인식 범주는 ‘존재-be’일 뿐이라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Be or Not-to-be인 것이다. 더하여, Parmenides는 유가 무일 수 없다는 논리를 모두에게 상기시키며, 한번 유有는 영원한 유有이며 한번 무無는 영원한 무無임을 선언 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은 불변이며 불멸인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Parmenides를 이해 해 보려했다. 그러나 동의하기엔 이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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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호를 마지막으로“사랑할땐 별이 되어”의 연재가 끝났습니다.
2년 동안 아름다운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선사하신 정인경 님께 감사드립니다.
2013년 2월호부터 해인사 승가대학 강사로 계신 종안스님의“철학산책”과
오래된 사진으로 과거를 돌아보는“오래된 미래”가 새롭게 찾아갑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