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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보광원 주지 한우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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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정영 2013년 02월 372호

대구 도심에 자리한 보광원의 오후는 조용하다. 나뭇가지 위에 앉은 겨울새들만 이런 저런 말을 나눌 뿐이니 절 마당은 묵언 중인 수좌의 기품이 깃든 듯 낙낙하고 적적하다. 병 중인 아흔 다섯 세의 조실스님이 계셔서일까. 보광원의 한 나절이 바람에도 나부끼지 않으니 가볍되 가벼이 여기지 못할 가랑잎 같다. 한우 스님께 어찌 지내시는지 여쭙는다.
\"조석 예불 보고 부처님 전에 공양 올리고 기도하면서 지내지 스님이 뭐 별 다를 것 있겠어요.\"
은사스님이신 조실스님께서 지은 지 벌써 60여 년이 된 보광원에서 한우 스님은 은사스님을 시봉하며 그만그만하게 지내신단다. 차 한잔 건네시며 스님은 가만히 지난 시간을 더듬으신다.
\"은사스님께서 이 보광원을 지을 때만 해도 포교당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우리 스님이 포교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생활 불교를 하겠다고 대구에 오셔서 보광원도 짓고 최초로 불교학생회도 만드셨지요.\"
은사스님이신 화산 스님은 만해 한용운 스님을 모시며 불교 혁신 운동도 하고 백범 김구 선생을 모시며 신탁통치 반대 운동도 하셨다. 그래서 보광원 마당엔 한용운 스님의 \'님의 침묵\'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은사 스님께서 한용운 스님의 사상에 영향을 많이 받으셨어요. 그 사상이 제게도 영향을 준 것 같아요.\"
한우 스님은 지난 달 다시 보광원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많은 일들을 했다. 동화사에서 소임을 볼 땐 포교국이란 게 없던 시절인데 포교에 뜻을 두었던 은사 스님의 영향이었던지 포교국을 만들고 국장으로 3년간 지냈다. 그리고 70,80년대에 민주화 운동을 했던 스님들과 함께 \'실천불교전국승가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94년도에 그 스님들과 함께 종단 개혁을 이뤄냈다. 그리고 대구에서 꾸준히 불교가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대구 \'참여연대\'를 발기해 운영위원으로 일하기도 했고 대구 경북 사단법인 \'반부패국민연대\'를 만들어 목사님들과 활동하기도 했고 양심수 후원회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크게 꼽을 만한 활동으로는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피폭자들을 위해 \'원폭 피해자와 함께하는 시민 모임\'을 만든 것이다. 피폭자 협회와 한국 청년 연합회의 대구 지역 청년들과 함께 이뤄낸 가장 큰 결실은 한국에 거주하는 피폭자들에게도 일본에서 의료수당을 지급하게 만든 것이다.
\"은사 스님의 영향도 받고 주변에 바른 생각을 가진 도반 스님들의 영향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불교 운동이나 사회 운동을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그 단체들은 지금까지도 활동 범위를 넓히며 잘 돌아가고 있단다. 스님은 그 조직들이 자리를 잡았을 때 젊은 스님들에게 그 끈을 넘겨주고 나왔다. 그리고 가창 남지장사의 주지 임기가 끝나자마자 인도로 건너갔다.
\"민주화 운동을 하고 종단 개혁을 하고 여러 가지 사회 활동을 하면서는 세상이 바뀔 줄 알았죠. 그러나 안 바뀌죠. 하던 일을 다 놓고 나를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에 떠났습니다.\"
인도의 수행법도 공부하고 그동안 일에 치여 보지 못했던 경도 다시 읽었다. 공부하다가 지루하면 온종일 버스를 타고 부처님 성지에 가서 며칠 씩 기도를 드리고 오기도 했다.
\"시설도 여락하고 음식도 부실했지만 참 행복했어요. 주지 소임 보고 불사 하고 사회 활동 하느라 온갖 것에 끄달리며 각박하게 살다가 다 놓고 떠나니 편하대요. 돌아올 여비조차 없었지만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더라고요.\"
스님은 인도에서 ‘인연법’을 믿고 사는 사람들을, \'인과\'와 \'업\'이란 말이 통념적으로 쓰이는 것을 보았다.
\"거지한테 내게 보시하라고 하면 5루피를 줘요. 사람들은 왜 거지한테 돈을 얻어 쓰냐고 하는데, 거지도 복을 짓기 위해서 보시를 하는 거예요. 그 사람들은 가난하게 살면서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질 줄 알아요. 그래서 우리보다 행복지수가 훨씬 높아요.\"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는데 그렇게 인도에서 3년을 머물렀다.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몸과 마음은 자유롭게 흘러 다녔다. 영혼과 육신이 어디에도 걸리지 않으니 고달픈 생각이 없고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니 그저 평화로웠다. 어딜 둘러봐도 소유하지 못해 불행해 하는 이들은 없었다. 풀로 엮은 집에서 신발도 없는 아이들이 열 명 넘게 살아가지만 그들은 그 상황에 대해서 절대로 남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문제를 자기 문제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전생에 복을 짓지 못해서 가난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돈을 열심히 벌면 가난한 이들을 도와 복을 지을 거라고 말한다. 가난에 대해 부모를 원망하고 국가를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는 우리와는 전혀 딴 세상의 이야기만 같다. 한우 스님은 그들의 모습을 보며 과거의 행동들이 반성이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이 들었단다. 그래서 3년 만에 귀국해서 바로 선방으로 갔다. 한 십년만 걸망지고 뼈 빠지게 공부해보자 싶었다. 그곳에서 만난 도반 스님들이 한우 스님을 보곤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인도는 한우 스님이 수행해 오는 동안 큰 전환점이 됐다.
\"수도자와 수행자의 차이는 뭘까요? 수도자는 제 도만 닦으려는 자고 수행자는 도를 닦으면서 중생을 보듬어 가는 자인 것 같아요. 그런데 난 내 성찰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스님이 살아온 시기는 사회에 반항하는 시대였다. 그러다 보니 자기 성찰이 부족해서 한계점이 왔다는 걸 알았다. 정신이 번쩍 들어서 모든 걸 놓고 인도로 떠났던 것이 지금도 참 잘한 일이란 생각이다.
\"사람이 착각 속에서 살거든요.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 내가 제일 잘한다는 생각. 근데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가요.\"
스님은 인도에서 돌아와 선방에 머물다가 은사스님이 편찮으셔서 지금 보광원에서 주지 소임을 맡아 살고 있다. 인도로 떠날 때처럼 모든 것은 손에서 놓은 그대로다. 그것이 참으로 여전히 편하다.
“인도에 머물면서 가난한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일 년 동안 돈을 조금씩 모았지요.”
그렇게 모은 돈 550만원을 이번에 주변의 힘든 아이들에게 장학금으로 줬다. 가장 가까운 주변부터 살펴야 한다는 게 스님의 생각이다. 그러면 옆 사람들이 또 주위를 살피면서 점점 더 넓혀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신다.
“내가 어떻게 이 세상을 다 책임지겠어요. 어떤 사람이 세상을 바꾸려고 뛰어다녀봤대요. 안 바뀌더래요. 나이를 좀 더 먹어선 나라를 바꾸려고 뛰어다녀봤대요. 못 바꾸겠더래요. 나이를 좀 더 먹어선 가정이라도 바꾸려고 뛰어다녀봤는데 그것도 안 되더래요. 죽을 때에야 알았대요. 내가 변해야 되는 거였다고. 처음부터 자신이 변하면 세계가 다스려지는 것이지요.”
스님은 행자 시절 이야기를 꺼내놓으신다. 장작 패고 불을 때고 밥을 하던 시절에 선방에 다니는 스님들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며 의기가 충만한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보며 계를 받으면 바로 도를 닦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스님이 계속 선방을 찾았던 것은 사숙이신 일타 스님 큰 스님의 영향도 컸다.
“스님 하시는 말씀이, 중노릇 하는 데는 치문만 배우면 되고 도 닦는 데는 서장만 배우면 된다고 하시대요.”
일타스님께서 편지를 써주시면서 송광사로 가라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송광사에서 첫 철을 났다. 그렇게 훌륭한 스님들의 가르침이 스님을 공부하게 했다고 말씀하신다. 그런 가르침이 없었다면 수행이 무언지도 모르고 절이나 하나 지어 살았을 것이라며 한우스님은 웃으신다.
“늘 기도해요. 내 곁에 늘 선지식이 머물기를, 도량이 청정하기를, 훌륭한 도반이 곁에 있기를. 난 이 세상에 뭘 남길 생각은 없어요. 예전엔 무언가 성과를 남기려고 했는데 다 부질 없는 것이지요. 깨달은 바는 없지만 부처님 가르침대로 중생을 위해 살다가 가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에요.”
그러다가 나이가 좀 들면 조용한 산사에 들어가 텃밭이나 가꾸며 살고 싶다. 그러다가 누가 찾아오면 차 한 잔 대접하곤 부처님 이야기나 나누고 싶단다. 그리 살면 좋지 않겠나 하신다. 그러니 부처님의 팬이 되지 말고 부처님의 제가 되라 하신다.
“제자와 팬은 달라요. 부처님의 제자는 법을 알아듣고 제 것으로 가져가지만 팬은 그저 짝사랑 할 뿐이지 부처님의 법을 못 가져가요. 간절함이 없으면 부처님의 팬일 뿐이지요.\"
그래서 한우스님은 신도들에게 생활 속에서 기본부터 가르친다. 그것은 간절함에서 생겨나는 것이고 또 간절함을 더 단단히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 틈이 벌어지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번뇌가 들어옵니다. 그 틈부터 막아야지요. 벽이 무너지는 것은 그 작은 틈에서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삼일수심 천재보 백년탐물 일조진 三日修心 千載寶 百年貪物 一朝塵이라 했다. 한우스님은 이 말 만큼 맞는 게 없다며 요즘 이 말을 마음에서 되새긴다. 그렇게 신도들을 교화한다. 그렇게 나로부터 시작한 수행의 한 발자국 그리고 주변을 살피는 한 발자국 가장 곁에 있는 어려운 이들을 위한 한 발자국이, 소리치지 않아도 큰 힘이 될 것을 믿는다. 천년의 보배가 될 것을 믿는다.
\"예전엔 우리의 생각을 따르는 사람은 아군이고 반대하는 사람은 적으로 봤어요. 그런데 같이 가야하는 게 맞더라고요. 갈등은 새로운 갈등을 만들고 그 반복은 또다시 반복을 만들 뿐이에요. 타협하고 양보하는 것, 이게 우리의 삶 아니겠어요.\"
나부터 변하란 말씀이다. 늘 똑같은 내 잣대의 눈으로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지 말란 말씀이다. 눈을 뜨고 있다고 해서 깨어 있는 게 아니란 말씀이다. 늘 살아 있는 생생한 눈으로 견성하라는 말씀이다. 새들이 노닐다 간 도심의 오후가 말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