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부처조차 뛰어넘어야 하는 도의 길

다음 게시물
거룩하고 청정한 수행을 위한 법문 - 해인총림 방장 법전 스님 2013년 02월 372호
수도암 대적광전 정면에서 앞을 바라보면 멀리로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이 보인다. 가야산 정상의 봉우리가 마치 물속에 연꽃이 피어오르는 듯해서 수도암에선 ‘연화봉’이라 불렀다. 선원이 완성되고 불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감회에 젖어 연화봉을 바라보았다. 가야산을 떠나온 지 어느덧 10년의 세월이 넘어가고 있었다.
온갖 어려움을 딛고 마침내 선원을 열면서 내가 다짐한 것은 인재불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평소 진정한 종교혁명은 어떤 형식이나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선지식 한 사람이 자신과 같은 참으로 눈 밝은 사람 하나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러한 내 소신이 마침내 실현될 시기에 이른 것이다.
공부하기 좋은 도량에서 한국 불교의 맥을 이어갈 인재를 키워보고 싶었다. 예나 지금이나 진정한 불사는 불법을 이어갈 사람을 키우는 데 있으며, 스승보다 뛰어난 제자가 나와야 불교가 발전할 수 있다.
1980년 수도암 선방이 개원되자 직지사 조실 관응 스님, 범어사 조실 석주 스님, 파계사 조실 고송 스님이 같이 와서 첫 결제를 시작했다. 한 생을 반듯하게 수좌로 살아온 세 분의 선지식은 선방에서 후학들과 함께 기거하면서 정진하셨는데 결제가 끝나고 나서 “일생을 통해 이렇듯 환희심 나게 살아본 적이 없다”고 했을 만큼 대중 모두가 열심히 정진했다.
서너 사람 정도 살 수 있던 수도암이 정돈되고 정면 9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형태의 반듯한 선방이 들어서자 수좌들이 몰려들었다. 지금부터 30여 년 전인 1980년대 초, 당시 새로 지은 수도암 선방은 전국에서 셋째 손가락 안으로 꼽을 만큼 잘 지어지고 전망이 좋은 곳이었다.
어느 해는 39명의 대중이 한 식구가 될 만큼 제방에서 많은 수좌들이 방부를 들였다. 지금은 한 해 20명 정도의 방부를 받고 있는 걸 감안하면, 당시 수도암의 명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제방에서 모인 대중이 한두 철 살고 나자 제각기 흩어지는 일이 되풀이되면서 선방의 분위가가 안정되지 않는 것이었다. 한곳에 오래 있으면서 정진에만 몰두하게 할 필요성을 느꼈다. 여러 곳의 선방을 옮겨 다니면서 결제를 하게 되면 정신이 해이해지고 ‘직업적인’수좌가 되기 쉽다. 그래서 6년 결사를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옛 전통 수행방식으로 생활하고 정진하면서 용맹정진을 했으면 했던 것이다.
수도암에서 여법하게 한 철을 난 젊은 수좌를 불러 결사 대중을 모아보라고 했다.
“한 철 공부하고 나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 깊은 공부를 할 수 없어. 몇 년 동안 한곳에 머물러 공부해야 힘을 얻을 수 있네. 이렇게 선방을 잘 지어놓았겠다, 우리도 부처님께서 설산에서 6년 고행정진 끝에 힘을 얻고 깨달으신 것처럼 생사를 걸고 용맹정진 해보세.”
그렇게 해서 내 상좌를 비롯해 제방에서 18명의 수좌가 모였다. 1983년 여름이었다. 그들은 수도암 하안거 결제에 들어가지 전, 경북 현풍면 도상암에서 보내면서 강도 높은 짜임새 있게 시간표를 짜고 예비정진한 다음 수도암으로 왔을 만큼 의욕적이었다.
“6년 동안 산문 밖을 나가지 말고 살아보자.”
나는 그들에게 다음 세 가지를 지키면서 정진할 것을 당부했다.
‘첫째, 하루에 나무 한 짐씩 할 것. 둘째, 하루 한 번 108배를 할 것. 셋째, 하루에 한 번 한 시간씩 밭을 맬 것.’
나는 발심한 수좌들을 이끌면서 한번 자리에 앉으면 움직이지 않는 불령산의 절구통이 되어갔고, 후학들 또한 수행에 고삐를 늦추지 않으면서 좌복 위를 떠날 줄 몰랐다.
불사에 혹독하게 몸을 부린데다 한번 앉으면 일어날 줄 모르는 정진으로 인해서 나의 어깨는 돌처럼 굳어져 있었다.
선원 대중은 상체가 딱 벌어지고 힘이 짱짱해 보여 ‘저런 힘을 가져 큰 불사를 했구나’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때때로 어깨가 쑥쑥 아려 어깨에 소금찜질을 하곤 했다.
좌복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 대중을 뒷바라지하는 시간이 많았다. 겨울이면 경옥고를 직접 고아서 신도들에게 나눠주고 그 수입으로 선방 대중들을 외호外護했다. 경옥고는 생지황生地黃, 인삼, 백복령白茯笭, 백밀白密, 따위를 넣어서 달여 만드는 보약으로 혈액 순환을 고르게 해주는 한약이다. 넓은 부엌에 묵묵히 서서 경옥고에 들어가는 한약 재료들을 혼합하고 달였던 때가 바로 엊그제인 것만 같다.
결사를 시작한 지 한 철이 지나자, 공부할 때 밀어붙여야 한다면서 대중 모두는 하루 14시간씩 정진을 시작했다. 그런 가행정진 속에서도 수좌들 가운데 반수 정도는 언제 잠을 자는지도 모르게 용맹정진을 하고 있었다. 요와 이불이 따로 없이 좌복을 배에 덮고 가사를 입고 채 한두 시간 자고 일어나 다시 자리에 앉는 대중을 보면서 어느 누구도 게으름을 피울 수 없었다. 수도암은 날로 생기를 띠어갔고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분위기 속에 정진에 거듭해 가고 있었다.
위가 약한 사람은 높은 지대에 적응하지 못해 배앓이를 해가면서도 정진을 계속했다. 솔잎으로 생식하면서 바짝 마른 모습으로 정진을 거듭하는 수좌에게, “마른 데 비해 잘 앉는구나. 허리가 당당하다”며 칭찬해주었고, 나 또한 그들에서 오래 앉아 있곤 했다.
보름마다 삭발하는 날의 소참법문에서 나는 결사 대중들에게 돈오돈수頓悟頓修의 수행을 강조하곤 했다.
“조금 아는 해오解悟정도 가지고 마치 공부를 다 한 것처럼 행동하면 힘을 발할 수 없다. 천 년 어두운 동굴에 한번 햇살이 들어가면 일시에 밝아지는 것처럼 깨달음은 오로지 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는 돈오돈수다. 선종에선 아직 몰록 깨닫는 돈頓으로만 성불하는 길을 가르친다. 깨친다는 것은 한번 깨칠 때 근본 무명을 완전히 끊고, 깨침의 최고 경지인 구경각을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동정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가 될 때까지 정진하라. 잠 속에서도 화두가 성성해야 몰록 생사를 파하고 본래면목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다. 화두가 오매일여 되기 이전에 내놓는 것은 자신을 속이고 남도 속이는 것이다. 헛것을 본 것과 같다.”
한평생 내가 주장한 깨달음에 대한 수행론은 돈오돈수였고 동정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의 세 단계에 이르도록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불기 2557(2013)년 ≪누구 없는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