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몇 년간 선원을 다니며 정진을 해오면서 어느 정도 공부가 익숙해지니 참선은 단지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중에서도 해야 한다는 선지식들의 말씀도 자연스레 수긍이 되었다. 이러한 참에 내 언젠가 전 세계를 한번 둘러보리라고, 언제 세웠는지 모를 다짐이 먼 기억 속에서 떠올랐다. 그렇게 한 생각이 바뀌었다. 세계를 만행하면서 공부를 해나가 보자. 갖은 역순경계의 상황을 접하며 나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한번 시험해보자. 편안한 조건에서의 안정된 수행만을 추구하지 말고 나를 힘겨운 상황에 몰아넣어보자, 라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몸의 역경계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는 젊은 시절에만 해낼 수 있는 만행이기에 더 늦추면 더욱 힘들어질 것이었다.
세계 만행의 뜻을 세웠지만 이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나 한 생각이 바뀌면 우주 법계 또한 그 뜻에 따라 바뀜을 실로 체험할 수 있었다. 만행에 있어서 경비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오다 해인사에 들른 한 외국인 관광객으로부터 카우치서핑이라는 커뮤니티를 소개받게 되었다. 이는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현지인의 숙소에서 그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의 삶과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무상으로 제공해주는 회원들 사이의 커뮤니티였다. 이후로 나도 이 커뮤니티의 회원이 되어 한국을 찾는 여러 외국인들에게 호스트로서 템플스테이를 체험할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나 또한 지난 4월에 보름간 다녀온 일본에서 서퍼의 입장으로서 일본 현지의 사람들 집에서 지내며 그들과 소통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 카우치서핑 이외에도 이미 세계 여행을 다녀온 많은 사람들의 블로그나 지금 자전거를 타면서 세계 일주를 하고 있는 한국의 여러 젊은이들의 기록에서 좀 더 알뜰하면서도 의미 있는 만행을 위한 많은 자료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오게 된 것이 바로 유라시카 만행이다.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를 일주하는 것. 이 유라시카 만행을 실행으로 옮기기 전에 나는 세 가지의 주제를 세웠다. 우선 세계의 모습을 확인해보리라 결심했다. 세계의 다양한 문화들과 그 터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경험하면서 많은 것들을 배울 것이다. 둘째로는 상황이 허락되는 대로 각처에서 봉사활동을 해보리라 다짐했다. 단지 나만을 생각지 말고 남을 위해 내가 무엇을 얼마나 할 수 있을지 알아보자는 소박한 생각이 그 시작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세계 곳곳에 자리한 불교나 이웃종교에서의 수행자들을 만나보고 그들의 수행을 접해보자는 것이다. 단순히 보고 즐기는 여행자가 아니라 두루 돌아다니며 공부하는 수행자로서의 직분을 잃지 말고 항상 수행하는 자세로 행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세계의 각처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상황을 접해보는 것은 실상 삼라에 펼쳐진 부처님 법의 모습을 대하는 것이고 동시에 나의 마음의 모습을 살펴보는 수행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면서 이번 만행에 있어서 가장 중심으로 삼은 틀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기록이다. 내가 앞서 세계 여행을 마친 사람들이나 현재 행하고 있는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것도 다 이 기록이란 결과물 덕분이다. 불교 내에서도 수많은 수행자들이 이미 세계 각처를 만행했을 터지만, 그것을 완성된 형태의 기록으로 남긴 사람은 아직 없는 듯하다. 사실 만행을 하면서 미루지 않고 그때그때 만행의 여정을 기록해나가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만일 내가 만행의 기록을 성실히 제대로 남긴다면 후에 세계 만행을 마냥 마음속에만 품어온 다른 스님들에게 소중한 선례가 되리라 생각했다. 더욱이 요즘은 세계가 인터넷이라는 현대 문명의 인드라망으로 더욱 가까워지지 않았는가. 이미 세계 널리 공급된 와이파이 망을 통해서 만행기를 올리게 된다면 그것은 그때그때 전하는 실시간 만행의 기록이 되고, 만행을 준비하는 다른 이들에게 생생한 정보와 조언이 될 것이며 또한 나의 안부를 다른 이들에게 전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된다. 그래서 만들게 된 것이 <2012 원제 스님의 유라시카 만행> 블로그다. 그리고 만일 여건이 된다면 만행을 마치고 난 뒤의 기록을 인터넷 상에만 남기지 말고 책의 형태로 만들어낼 예정이다. 이것은 마냥 인터넷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만행의 기록을 참조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면 좋겠다는 요청에서였다. 이런 의미에서 기록은 단지 나 혼자만의 감상이나 서술로만 남게 될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만행을 하는 내가 다시금 여러 사람에게 회향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믿고 있다.
1년 반이라는 긴 여정의 만행기간을 감안해서 반드시 지켜야 할 나 스스로의 약속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세계의 곳곳을 침낭과 텐트를 포함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다녀야 하는 상황이기에, 건강과 함께 신변상의 안전이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바로 매일매일 수행하는 백팔 참회였다. 백팔 참회는 수행하는 본분을 잊지 않고 스스로를 가다듬을 수 있는 근본이 된다. 또한 오랜 만행기간 동안 건강과 안전의 문제에 있어 불법의 선신과 호법 신장들의 외호를 받을 수 있는 기도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백팔 참회만은 만행기간동안 빠짐없이 수행하리라 결심했다.
그 누구도 나를 한국 불교의 해외 사절이라 임명하진 않았지만, 나는 나 스스로를 그렇게 임명했다. 여지껏 누구도 실행하지 않았던 세계 만행을 처음으로 실행하는 것이었고, 또한 그것을 기록으로 남길 원력을 세웠다. 또한 개인으로 가는 만행이지만, 내가 하는 말 하나 행동 하나가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한국 불교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는 시금석이 되리라는 책임감을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것이다. 일 년 만에 들어가는 하안거를 원만히 회향하고 난 뒤, 2012년 9월로부터 1년 6개월의 시간 동안 46개국을 거치는 세계를 향한 원제의 행각行脚은 시작될 것이다.
원제 스님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monkwonj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