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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인가,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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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이준교 2012년 07월 365호

길 위에서
이른 새벽 산길을 걷는다. 맺혔던 이슬은 물방울이 되어 떨어지는가 하면 더러는 솜털처럼 나뭇잎에 내려앉아 희뿌연 여명 속에서 스스로 반짝인다. 물이 소리 내며 흐르는 골짜기에는 누구인가 굴려놓은 돌들이 징검다리가 되어 길손을 돕고, 이편 언덕과 저편 언덕에 걸쳐놓은 기다란 나무 또한 다리가 되어 오가는 이들을 돕는다. 본디 있던 자리에서 떠나 마지막 순간까지 그 몸을 삭이며 스스로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이타행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모퉁이를 돌면 사람 발자국 소리에 놀란 다람쥐가 후다닥거리는 소리에 길 가던 사람 또한 깜짝 놀라고, 이리저리 휘어지다가 펴지는가 하면 오르내리는 길은 끝없이 이어진다. 산세 고즈넉하고 산자락이 겹겹이 감쌀 때쯤이면 사찰 또한 멀지 않다는 암시다. 이런 때 범종이나 목탁소리라도 바람결에 실려 오면 마음은 더 더욱 청정해지기 마련이다. 일주문 앞에서 합장하며 마음과 몸을 가다듬고 법당을 향한다.
나를 감싼 껍질을 벗어나 보려고 잠시 정진한 다음 불상을 우러른다. 불상과 후불탱화에서 선인들의 신심과 삶의 슬기를 마음으로 담아내고, 깔끔하고 화려하게 장엄한 닫집을 보며 마음의 티끌을 쓸어내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돌난간 두른 단아한 석등, 고승대덕들의 부도 앞에서 그 분들이 남기신 고귀한 뜻의 한 조각이라도 들을까 하여 귀 기울이기도 한다. 그러나 귓가에 들리는 것이라고는 새 소리, 바람 소리 뿐이다. 아직은 내 마음이 얕아서이리라.

인연 한 자락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된 지금, 불교와 인연 맺은 지는 속세로 치면 60년이 넘었지만 그 햇수가 무슨 대수랴. 남들같이 섬광처럼 번쩍이는 뜨거운 인연이 없었기 때문인지, 아직까지 마음은 황량하기만 하다. 곧잘 들르곤 하던 사찰 법당에서 먼지 앉은 불상의 어깨를 털어내다가 부처님의 손금과 자신의 손금이 꼭 같은 것을 발견하고서 그만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다는 중견 작가를 비롯, 어느 날 두견화 꽃에 묻혀 한 폭의 그림처럼 앉아 계시던 스님께서 \'욕심도 욕망도 녹여 없앨 수 있는 용광로를 지니라\'는 말씀에 그만 불자의 길로 들어섰다는 어느 시인의 이야기를 만나며 나는 그 크고 뜨거운 불연에 마냥 부러움을 느꼈다.
내가 불교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전적으로 타의에 의해서였다. 외조모께서 곧잘 ‘태어난 지 사흘 만에 경북 상주 남장사의 중궁암에 들러 불공 올렸다’는 말씀과 함께 ‘특히 마음가짐이 반듯해야 한다’ 는 격려와 기대 속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어머니 손잡고 절에 드나들 때는 사천왕상이 너무 무서워 어머니 손을 아무리 꽉 쥐어도 내 목은 항상 자라목처럼 움츠려 들었다. 그뿐인가, 시왕도의 그림은 꿈에 나타나 나를 뒤쫓기 일쑤였다.
시골 중학교 때, 독실한 불자 선생께서 불교학생회를 조직하시며 그 일원이 됐다. 붓다의 생애와 사상, 원효, 의상 스님의 이야기들이 그 어떤 동화보다 재미있었고,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때 들었던 ‘나는 무엇인가’라는 한 구절이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까까머리 중학생이 뭘 얼마나 알까마는 나의 모든 책이나 공책 앞쪽에는 ‘나는 무엇인가’라는 문장을 다짐처럼 써놓고는 했다. 그러나 선생님의 갑작스런 전근으로 불교와 인연이 끊어졌다.

명산명찰 순례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부터 등산에 열중했다. 일 년에 50주는 산에서 살다시피 했다. 명산에는 명찰이 있기 마련이고 명찰이 있는 곳은 또한 명산이니 본의 아니게 명산명찰 순례를 하게 된 것이다.
휴전선 민통선 안의 도피안사에서부터 제주의 관음사, 울릉도의 관음사에서부터 강화도의 전등사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신나게 뛰어다녔다.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잦은 출장 길 마지막 부분은 항상 사찰 순례로 장식했다. 중앙일보의 대표적 출판물인 <한국의 미>라는 24권짜리 전집 간행을 맡으면서부터 보다 체계적으로 내 가슴 속에 불교가 자리하기 시작했다. 우리 정서의 한 가닥이나마 제대로 된 시각에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던 때와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감동의 연속이었다.
고구려금동불상이 풍기는 고졸함과 시대마다 다른 불상 조각의 특징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됐고, 석탑이 꼭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 다라니경과 불화가 그 시대 과학의 총 결집이며 그 당시 예술의 최고 경지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안동 봉정사의 극락전이 우리 건축사에 남긴 업적을 어느 정도는 스스로 분별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그럴수록 마음의 갈증은 더욱 심해졌다.
다른 종교를 가진 어느 사진작가는 나와 함께 일을 하던 중 불교에 심취해 아예 사찰 건축 촬영에만 전념하기도 했다. 삼화령 애기부처의 해맑은 미소, 월정사 구층석탑의 그 오묘함과 불보살상이 터뜨리는 깨달음의 환희에 나는 크게 감동하기도 했다.
그 후, 한때는 어느 신행단체에 참여했다. 자발적이었다. 보살과 거사들이 동참, 경전과 선을 공부하는 진지한 모임이었다. 보다 효율적인 공부를 위해 구산회를 만들었다. 한 달에 한 번씩은 사찰 한 곳을 순례 답사하며 스님으로부터 법문을 듣고, 산을 오르는 등 이른바 산에서 법을 구한다는 뜻으로 시작했다. 5~6년 간 열심이었다.
후불탱화 촬영차 해인사와 백련암을 방문했던 때는 마침 저녁예불시간이었다. 예불의 그 장엄한 분위기에 취해 사진기자와 함께 법당 앞에 발이 붙은 듯 한동안 꼼짝달싹 못하는 감격도 누렸다.

타는 목마름
대장경의 오묘한 신비에서 판전의 과학성으로까지 관심의 영역이 자꾸만 넓어졌다. 자연을 이용하는 조상의 슬기가 현대과학으로도 명쾌하게 해명 안 돼 가슴 답답하기도 했다. 대장경연구소와 추진하던 대장경전산화를 위해 말석에서나마 법 받드는 일에 동참하게 된 것은 부처님의 크나 큰 가피일 터. 어떻든 예사로운 인연이 아님은 틀림없나 보다.
동양 미술의 백미로 꼽히는 석굴암을 집중 촬영했던 사진작가 A씨가 들려준 \"밤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거의 한 달 동안 진행된 38구의 불보살상 들과의 만남, 조명의 변화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미소의 진수를 보여 준 신라인들의 활기찬 생명감은 영원히 잊지 못할 감동\"이라는 말은 비록 간접적이지만 그대로 나의 감동이기도 했다.
부처님은 “사람 몸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태어나서 살아가기 또한 어렵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시기 어렵고 부처님 법 만나기 또한 어렵다”는 말처럼 부처님을 만난다는 것은 길고 아름다운 인연이 아닌가.
언제 깨뜨릴 수 있을까, 50여 년 동안 만지작거리기만 하는 화두 하나
‘나는 무엇인가,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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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교李駿敎 님은 중앙대 신문학과와 동 신문방송대학원 졸업하고 중앙일보 계간미술 편집부장과 월간미술 편집국장, 삼성문화재단 문화사업실장으로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