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명찰 순례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부터 등산에 열중했다. 일 년에 50주는 산에서 살다시피 했다. 명산에는 명찰이 있기 마련이고 명찰이 있는 곳은 또한 명산이니 본의 아니게 명산명찰 순례를 하게 된 것이다.
휴전선 민통선 안의 도피안사에서부터 제주의 관음사, 울릉도의 관음사에서부터 강화도의 전등사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신나게 뛰어다녔다.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잦은 출장 길 마지막 부분은 항상 사찰 순례로 장식했다. 중앙일보의 대표적 출판물인 <한국의 미>라는 24권짜리 전집 간행을 맡으면서부터 보다 체계적으로 내 가슴 속에 불교가 자리하기 시작했다. 우리 정서의 한 가닥이나마 제대로 된 시각에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던 때와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감동의 연속이었다.
고구려금동불상이 풍기는 고졸함과 시대마다 다른 불상 조각의 특징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됐고, 석탑이 꼭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 다라니경과 불화가 그 시대 과학의 총 결집이며 그 당시 예술의 최고 경지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안동 봉정사의 극락전이 우리 건축사에 남긴 업적을 어느 정도는 스스로 분별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그럴수록 마음의 갈증은 더욱 심해졌다.
다른 종교를 가진 어느 사진작가는 나와 함께 일을 하던 중 불교에 심취해 아예 사찰 건축 촬영에만 전념하기도 했다. 삼화령 애기부처의 해맑은 미소, 월정사 구층석탑의 그 오묘함과 불보살상이 터뜨리는 깨달음의 환희에 나는 크게 감동하기도 했다.
그 후, 한때는 어느 신행단체에 참여했다. 자발적이었다. 보살과 거사들이 동참, 경전과 선을 공부하는 진지한 모임이었다. 보다 효율적인 공부를 위해 구산회를 만들었다. 한 달에 한 번씩은 사찰 한 곳을 순례 답사하며 스님으로부터 법문을 듣고, 산을 오르는 등 이른바 산에서 법을 구한다는 뜻으로 시작했다. 5~6년 간 열심이었다.
후불탱화 촬영차 해인사와 백련암을 방문했던 때는 마침 저녁예불시간이었다. 예불의 그 장엄한 분위기에 취해 사진기자와 함께 법당 앞에 발이 붙은 듯 한동안 꼼짝달싹 못하는 감격도 누렸다.
타는 목마름
대장경의 오묘한 신비에서 판전의 과학성으로까지 관심의 영역이 자꾸만 넓어졌다. 자연을 이용하는 조상의 슬기가 현대과학으로도 명쾌하게 해명 안 돼 가슴 답답하기도 했다. 대장경연구소와 추진하던 대장경전산화를 위해 말석에서나마 법 받드는 일에 동참하게 된 것은 부처님의 크나 큰 가피일 터. 어떻든 예사로운 인연이 아님은 틀림없나 보다.
동양 미술의 백미로 꼽히는 석굴암을 집중 촬영했던 사진작가 A씨가 들려준 \"밤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거의 한 달 동안 진행된 38구의 불보살상 들과의 만남, 조명의 변화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미소의 진수를 보여 준 신라인들의 활기찬 생명감은 영원히 잊지 못할 감동\"이라는 말은 비록 간접적이지만 그대로 나의 감동이기도 했다.
부처님은 “사람 몸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태어나서 살아가기 또한 어렵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시기 어렵고 부처님 법 만나기 또한 어렵다”는 말처럼 부처님을 만난다는 것은 길고 아름다운 인연이 아닌가.
언제 깨뜨릴 수 있을까, 50여 년 동안 만지작거리기만 하는 화두 하나
‘나는 무엇인가,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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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교李駿敎 님은 중앙대 신문학과와 동 신문방송대학원 졸업하고 중앙일보 계간미술 편집부장과 월간미술 편집국장, 삼성문화재단 문화사업실장으로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