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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민간신앙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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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 진철승 1988년 03월 73호
지난 회에서는 민간신앙을 ‘자연’ 및 ‘사회’와의 관련을 중심으로 한 민중의 세계관이라 규정하고, ‘집’ 과 ‘마을’을 둘러싼 신앙 체계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 글에서는 되도록 외래 종교와의 관련이나 영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순수하게 자연 및 인간과의 관계에서 파생된 한민족의 신앙 세계만을 다루었다.
그러면 불교는 한민족 고유의 신앙 체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불교는 다른 외래 종교에 비해서 특히 신앙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보통 무속의 신격(神格)이나 일반의 민간 신앙 세계를 살펴보면 이 점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무속의 신격 중에는 석가모니, 삼불제석(三佛帝釋), 약사보살, 지장보살 등이 가장 중요하고도 빈번하게 등장하며, 서산대사, 나용화상과 같은 승려가 신으로 신앙되기도 한다. 이들 불교적 신격들은 무신도(巫神圖)로 그려져서 다른 일반적 무신도와 함께 신단에 봉안된다. 또 신단에는 불상이 모셔지기도 한다. 특히 ‘부처님’으로 통칭되는 석가모니와 삼불제석은 무속에서 천신(天神)과 함께 최고신으로 신앙된다.
이러한 불교적 신격의 영향과 함께 불교적 세계관과 인간관은 민간의 세계관에 거의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불교적 세계관이 유입되기 이전에는 저승을 극락과 지옥으로 구분함이 없이 다만 ‘이승’과 ‘저승’의 막연한 구분이 있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불교적 세계관이 도입되면서 민간의 ‘저승’ 관은 완전히 달라져, 아미타불이 계시는 서방 극락청토와 미륵불이 설법하고 계시는 도솔천으로 대표되는 ‘극락’과, 부모은중경이나 십왕경(十王經)에 묘사되어 있는 ‘지옥’으로 분명히 구분하여 인식하게 되었다.
본디 불교가 구하려는 궁극적 목표인 자기 해탈과 중생구제는 표리를 이루며 불교사를 관철해 왔다. 그러나 이는 대개 대승불교의 교의 체계 속에서만 이루어진 것이며 실제 그러한 궁극적 목적을 이루려는 집단적, 의식적 노력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불교가 포교를 위해서든, 제도화된 교단의 생존을 위해서든, 지배층의 통치 이념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중국에 불교가 전래될 때는 불교도 천자와 국가를 위한 종교라는 것을 역설하기 위해 금광명경(金光明經), 인왕경(仁王經) 등을 제시하였고, 효를 중시하는 유교 윤리와 타협하기 위해 부모은중경 같은 불경도 지내내야 했으며, 불교의 오계(五戒)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상(五常)의 덕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강변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처럼 불교는 그 당시 사회의 윤리 체계, 민간 신앙, 국가통치 이념 등과 만나며 변질될 수밖에 없었고, 특히 한반도에 유입된 이후로 삼국의 통일을 거치면서는 국가불교, 주술불교, 장례불교로 정착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불교적 내세관이라 할 수 있는 ‘극락’과 ‘지옥’의 구분은 더욱 널리 민간에 유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극락-저승’의 구분은 형식적으로는 효와 충의 강조, 덕행과 보시와 정진의 강조를 위한 방편인 듯하나, 실제적으로는 현세의 통치 구조, 즉 지배-피지배 관계의 합리화를 위한 종교적 도그마로 이용되었음이 중세 종교사의 연구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제불보살과 조사들의 신격화와 ‘극락-저승’의 내세관을 받아들이면서도 봉건제 밑의 대중들의 생산적인 현실적 세계관은 변함없이 기층을 이어져 내려왔다. 그것은 풍농, 풍어를 기리는 생산 노동자로서의 기원, 그리고 그 생산물을 부당하게 빼앗기는, 즉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와 억압이 없는 세계에 대한 기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집과 마을의 여러 공간, 그리고 산천과 하늘을 신격화하면서도 동시에 그에 대한 끈질긴 도전과 생산력의 고양으로 이어진 역사 발전의 동력이었다.
그러면 불교에서는 이러한 민간의 세계관 및 신앙과 소망의 체계를 어떻게 수용하였을까? 첫번째로 산악 숭배나 산신 신앙의 불교적 전개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고대 노예제 사회를 전후로 하여 본격적인 농경 정착이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만주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주민들에게 산은 여전히 두려움의 대상이자 필요한 물자의 주요 공급처였다. 또한 산은 하늘과 땅을 잇고, 인간의 소망을 하늘에 아뢰는 신성한 공간이었다. 이는 이 지역이 특히 산악의 형세가 다양하고 기이하면서도 많은 물자의 공급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 인하여 형성된 산악 숭배와 산신 신앙의 맥을 아무리 불교가 더 정교하고 합리적인 세계판을 갖고 들어왔어도 흔들리지 않고 기층에 광범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불교는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방향으로 대용하여 나갔다. 하나는 오대산이나 금강산 신앙처럼 신라 이래로 전개되어 온 불국토사장이며, 다른 하나는 사찰에 산신각을 건립하는 것이었다.
불국토사상은 특히 신라에서 발달하였던 바 중국 당나라의 오대산 신앙의 영향을 받은 자장(慈藏)이 불국토인 이 반도 중에서도 청정하고 광명한 영지(靈地) 오대산에 가람을 짓게 된 것은 유명한 일이다. 이는 뒤에 풍수지리설의 영향도 받으면서 영험한 산에 사찰을 건립하게 되는 전통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전통에 근거해야 고려시대 묘청이 이국연기(利國延基)의 뜻으로 국내의 명산과 산신 가운데 여덟을 골라 호국백두악태백선인실덕문수사리보살(護國白頭嶽太白仙人實德文珠師利菩薩) 등 팔성(八聖)을 모신 일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사찰에는 예외없이 한 귀퉁이에 산신당 또는 산신각이 있다. 산신각에는 산신 탱화가 빠짐없이 봉안되어 있는데, 탱화에는 백발 노인이 호랑이를 탄 모습이나 호랑이가 그 곁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는 무속의 무신도와 거의 동일한 모습인 바, 불교적인 변용이 없이 사찰에 봉안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산신신앙의 보편성과 강도를 웅변해 주고 있다 하겠다.
다음으로 사찰의 삼성각(三聖閣)에 산신과 함께 모셔지거나 따로 모셔지는 칠성(七星)과 독성(獨聖)이 있다. 칠성신앙은 자식 발원과 수복 발원이 주목적인 바, 도교적 신앙이 불교에 수용된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그리고 독성은, 석문의범에 의하면, 부처님의 열반에 들도록 허락되지 않아 홀로 천태산에 들어 용화세계가 올 때를 기다리며 수도하는 나반(那畔)존자라고 하는데, 말세에 그에게 빌면 성도(成道)가 빠르다고 한다.
이상의 삼성(三聖)신앙 체계는 도교적인 칠성과 고유한 산신신앙, 그리고 불교적 독성(獨聖)을 함께 모신 한국적 종교혼합주의의 전형적 사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다른한편에서는 이 삼성신앙이 환인〔七星〕, 환웅〔獨聖〕, 단군〔二山神〕의 삼신(三神)신앙이 도교나 불교의 이름만 빈 채 사찰에서 전승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구한말 이래로 동학, 대종교, 증산교 등 신종교 운동의 신앙 체계와도 관련지어 검토해볼 문제라고 생각된다.

보통 재공양(齊供養)이라 불리우는 불교의식을 보면 104위(位)의 신중(神衆)이 있다. 그들은 불보살을 모신 상단에 22위, 천상계의 호법선신(護法善神)이 주를 이루는 중단에 38위, 그리고 기타 신중을 모신 하단에 44위가 있다. 이들 각 신중의 성격은 무척 다양하여 인도의 토속신, 중국 도교의 신격, 한국의 민간 신격 등이 함께 배열되어 있다.
본래 무신론이라 할 수 있는 불교에 이처럼 다양한 신의 존재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불교와 각 나라의 민간신앙과의 습합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일부 유일신교에 의해 우상숭배로 공격당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지배층에 봉사하며 그 지배 이념과 철학을 제공하고, 당시 체계를 유지하는 효율적 수단일 수밖에 없었던 중세 사회의 불교가 그나마 대중들 속에서 중생 구제의 큰 방편을 펴고 실천했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제석(帝釋), 범천(梵天), 사천왕(四天王) 등 소위 천부선신(天部善神)은 인도 재래의 민간신앙의 신격이었으나, 이후 각종의 대승경전에 포괄되면서 부처님 경전과 그 법을 설하는 법사를 보호하겠다고 서원하는 신중으로 묘사되었다. 이들은 대개 육계육천(欲界六天 : 四天王, 忉利天, 夜摩天, 兜率天, 化樂天, 他化自在天) 중 첫째 하늘인 사왕천의 사천왕, 둘째 하늘인 도리천의 제석(대개 일반적 하늘로 인식된다), 그리고 색계(色界) 18천 중 초선천(初禪天)의 천주인 범천을 중심으로 하여 주로 불법 수호의 기능을 담당하는 탱화로 형상화된다.
칠성은 중단의 44위에서 50위까지 위치하는데, 북극성과 북두칠성에 관한 관심이 자손 번영과 수명 장수였던 민중의 도교적 신앙이 그대로 불교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민간신앙의 신격들은 주로 하단에 위치해 있다. 그 면면을 대강 살며보면, 산신, 조왕신(부엌신), 문호신(門戶神), 우물신, 용신, 해신(海神) 등등으로 거의 ‘마을’이나 ‘집’ 또는 ‘산천’과 관계된 자연신들이다.
불교는 이와 같이 인도, 중국, 조선의 각 민간 신격들을 혼용하여 민중의 현실적 욕구에 대응하면서 그들을 불법에 귀의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그를 위하여 각 민간 신격을 호법선신으로 자리잡게 하는 한편, 각 신격을 대상으로 하는 민간의 각종 불공(산신불공, 용왕불공, 칠성불공, 중단의 신중불공)을 모두 포용하는 민중지향적인 자세를 취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이상 불교와 민간신앙의 상호 영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러나 주제의 성격상 좀 더 입체적인 설명이 필요한데 그러하질 못한 데 대해 아쉬움을 느끼며, 다음에는 사회변동과 가장 역동적으로 관련된 미륵신앙과 민간신앙, 민중운동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