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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만이 첨단 문명 시대의 미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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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이재운 1988년 03월 73호
먼 옛날 사람들은 아무리 먼 길이라도 두 발로 걸어야만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말과 노새와 소를 타기 시작했고, 오래지 않아 바퀴가 달린 수레도 발명하였다. 그들은 더 새로운 교통 기관을 꾸준히 발명해 나갔고, 마침내 산 너머 바다 너머 다른 마을과 다른 나라를 몇 시간 만에 며칠 만에 오갈 수 있게 되었다. 부처도 미처 가보지 못하여 막연하게만 불렀던 다른 나라가 뚜렷한 실체로서 떠오르고, 그저 상상의 세계이기만 했던 삼천대천세계의 실상도 날로 뚜렷해져 가고 있다. 이러한, 교통 기관의 눈부진 발달로 요즈음의 부처들은 승용차를 타고 다닐 수 있게 되었고, 기차와 배와 비행기도 마음대로 탈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발달은 걸어서 구도의 길을 가고, 걸어서 전법의 길을 가던 옛 부처 시대에 비하면 천지가 개벽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부처는 마이크 없이도 설법을 했지만 요즈음의 스님들은 고성능 마이크에 대고 얼마든지 그때 그 부처의 목소리를 재탕할 수 있다. 필요하다면 책과 녹음 테이프와 비디오 테이프로도 부처의 그 때 그 이야기들을 전할 수 있다. 가톨릭 교황은 인공 위성에 목소리와 얼굴을 담아 전 세계의 곳곳으로 예수의 옛날 이야기를 생으로 들려 주고 있는 데에 비하면 구식이긴 하지만 말이다. 우리나라에도 곧 불교 방송국이 생긴다니 한 사람의 말 한 마디가 부처 혼자서 평생을 뛰어다니
며 평발이 부르트고 입술이 마르도록 떠든 것보다 더 큰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게 될지 모른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늘 우리 불교계에 대한 자성 내지 비판으로 흘러간다. 그렇게 세상은 발달하여 전화로도 라디오로도 텔레비전으로도 신문으로도 잡지로도 책으로도 컴퓨터 단말기로도 부처의 말을 더 체계적으로 더 정확하게 자꾸자꾸 더 많이 전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유독 우리 불교는 아직 중국 문자에 갇혀 한국 말로는 부처를 잘 설명하지 못하고, 아직도 한지에 목판으로 찍은 낡은 책을 대해야만, 한자로만 가득 적힌 책이어야만, 비로소 불교 같고 불교 맛이 나는 줄로 여기는 사람들이 무척 많은가 보다. 그래서 불교는 곰팡내가 나느니 화석(化石)이니 하는 말들을 떳떳이 물리치지 못하는 것인가. 하늘천 따지 하듯이 읽고 또 읽다 보면 제 아무리 한문이라도 자연히 문리(文理)가 트이고 죽어라 기도하다 보면 부처가 감격하여 꿈 속으로 스스로 찾아와 불교의 진수만을 뽑아 똘똘 뭉친 환약(九藥) 한 알을 주고 갈지 모른다고 믿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는 것인가.
비행기와 인공 위성이 나오다가 왜 갑자기 이렇게 원시적이고 미신 비슷한 이야기로 흐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한 마디로 한국 불교는 스스로 주변의 상황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를 못한다.
부처도, 그 옛날 옛날의 호랑이 담배핀다고 말해도 사람들이 깜빡 속아 주던 그 때에도, 곳에 따라 때에 따라 사람에따라 같은 이야기도 다르게 들려 주었다는데, 중국 사람들이 자기네 문화와 전통과 상식을 바탕으로 이리저리 다듬고 고치고 빼고 더한 책들을 보물단지처럼 끼고 앉아, 그것도 중국어 발음도 아니고 한국어 발음도 아닌, 세상 어디에서도 쓰이지 않는 죽은 발음으로 ‘여시아문하사오니 불재기수급고독원할 새…’ 하고 읊
조리면 도대체 죽은 귀신들이 알아듣나, 중국인이 알아듣나, 아니면 우리들이라도 알아듣나. 한 예로 켸켸묵은 고서를 번역하려면 흔히 토씨만 달고 곳곳에 한문과 한자를 원본대로 많이 살려둘수록 좋다고 주장하는 스님들이 있는데, 도대체 번역이 무엇인지 알고나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다른 나라 글로 적힌 책을 우리 글로 바꾸는 게 번역이다. 그런데 왜 반만 번역하고 반은 그대로 두자는 얘기인지, 아무리 원전의 의미를 살리자는 뜻을 백번 고려한다 해도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단견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차라리 그런 사람들은 중국에 유학가서 중국말하며 중국 불교를 공부하고 진짜 ‘중국어’로 염불도 하고 설법도 하면 될 터인데, 왜 아까운 종이와 잉크와 중생의 노동력을 낭비해 가며 반번역을 주장하는지 돌이켜 생각을 해 줬으면 좋겠다.
사고는 언어를 통하여 형성되며, 언어는 의식의 한계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얘기이고 보면 우리 한국불교의 사고는, 천만번 양보하는 표현으로, 한국 현실에는 맞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현실에 어울리지 않는 얘기로는 한국인들을 설득할 수 없다. 물론 첩첩산중에 숨어서 반중국어와 반한국어를 섞어 쓰며 이 시대와 이 사회와 멀리 떨어져 살고 싶은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도 뭐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현대의 문명 사회를 인정하고 그 사회의 변화를 수용하여 지하철도 타고 승용차도 사서 타고 다닐 줄 아는 스님들은 지신이 사고도 그렇게 바꿀 줄 알아야 한다. 아직도 마른 똥막대기가 바로 불법(佛法)이라고 말해서 넥타이 매고 전자 시계를 찬 사람들을 웃겨보려고 한다면 스스로 저질 코미디를 연출하는 희극 배우가 되고 말 것이다.
교통이 아무리 발달해도 사람들이 먼 곳을 빠르고 편하고 안전하게 가고자 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듯이 불교가 아무리 현대 문명과 발전된 사회와 그 문화에 스스로 적응한다 해도 그 본뜻은 조금도 다치지 않는다. 우리 나라의 불교는 아직 신앙론이니 불교 철학이니 하고 논할 계제에 있지 않은 것이 냉정한 사실이다. 더구나 새로운 이론을 편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내고, 바랄 수도 없다. 옛것을 오늘에 살려 새롭게 정리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불교에는 최근에 각광을 받는 여러 가지 철학 이론과 사회 과학 이론 등이 폭넓게 깔려 있지만 한번도 불교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부각되지 못했다. 불교인조차 불교를 체질화하지 못하고, 맡은 분야에 응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생활과 동떨어진 불교, 현실 변화에 대용할 줄 모르는 불교, 미래 사회를 예측하지 못하는 불교, 억압과 구속을 받고있는 중생에게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하는 불교- 이것이 바로 부처가 예언한 먼 훗날의 돼먹지 못한 세상 풍경이 아니던가. 불상(佛像)만 감싸고 있다해서 불교가 지켜지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