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밀착된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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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백승연
1988년 03월 73호
어렸을 때, 어느 날이던가 어머니 따라 절에 갔던 기억이 또렷이 남아 있다. 어느 절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날이 초파일이나 성도개일쯤 되었던지 사람들이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거기 와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드신 할머니들이나 펑퍼짐한 몸매의 아주머니들이었었는데 뭘 그렇게들 열심히 절을 하는지… 나는 멋모르고 어머니 뒤만 졸졸 따라 다니다보니, 왜 그렇게 절을 해야 하는 데가 많고 또 절하는 사람들은 뭘 그리 중얼대며 정신없이 열심들이었는지, 미국식 합리주의의 학교 교육에 잘 길들여진 나로서는 모두 미신이요 우상숭배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나는, 절에 가는 사람들은 무조건 잘 살게 해달라고 빌러 가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절이란 으례 그런 곳으로만 생각되어 어머니 쫓아 절에 가는 일도 거의 없었다. 따라서 불교와는 꽤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좀 자라서 사춘기 때, 남달리 심하게 갈등을 겪으면서-또 사춘기 때 누구나 그러하듯 전 혜련에 매료되고 헤세에 탐닉하며-존재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풀려고 꽤나 고심했었다. 그때 기독교 쪽의 손길은 여러 곳에서 뻗쳐왔지만 지나치게 강요하는 태도로 다가오고 맹목적인 믿음만을 강조하는 모습에서 오히려 반감만을 갖게 되어 상대적으로 불교에 대한 관심이 커지게 되었다. 누군가, 불교는 꽤 심오한 철학을 지녔다고 하는 말도 들었고, 그리고 불교는 기독교와는 다른 어떤 신선한 해결책을 제시해줄지도 모른다는 호기심이 일었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불교 써클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 써클 선배들이 종교적인 면보다는 철학적인 면에 좀더 치중했었고(물 론불교에서종교와 철학을 분리해서 말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그래서 처음 접하게 된 것이 원시불교였다. 지금 생각해도 이것은 좋은 인연이었고 복이라면 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원시불교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된 진리의 세계는 참으로 경이로왔다. 그때 이 세계에는 완벽하고 절대적인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알아내는 것이 내 지상최대의 목표로 삼았으며, 또 과학적인 방법만이 유일하고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내게는, 불교를 통해 깨우쳐진 여러 가지 사실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접하게 된불교는 정말로 우상이 아니었고, 막연하고 황당한 세계도 아니었으며, 곧바로 내 의문의 갈증을 깨끗이 해소해주는 사원한 한모금의 물이었고, 부닥치는 현실문제에 해답을 줄 수 있는 정연한 철학이었다.
이렇듯 나의 경우는 여건이 좋아 비교적 설득력 있는 불교를 접할 수 있었고 쉽게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지만, 주위를 가만 돌아보면, 고민하는 젊은이에게 불교가 그렇게 설득력 있게 다가와 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는 깊은 철학을 담고 있으며 부처님의 말씀은 심오하다고 말하고 있으면서도, 다만 그렇게 강조만 할 뿐 어째서 심오하다고 하는지, 어째서 부처라는 사람이 위대한지, 그래서 지금 현재 우리 문제와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말을 해주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많은 젊은이들이 심한 자기 갈등을 겪으면서 자기 물음에 해답을 얻기 위해 불교의 문을 두드리는 경우가 있다. 허나, 불교는 이들을 대개 제대로 포용해주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 이유로서 나는 다음 세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다.
첫째, 많은 절들이 무당집과의 구별이 모호할 정도로 점이라든가 사주팔자에만 능하고, 신도들 또한 그런 면에만 관심 기울여 철저히 구복적인 성격만을 갖는다는 점이다. 이런 모습을 볼 때,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교육을 받아온 젊은이들은 강한 반감을 느끼게 된다.
둘째, 불교 교리에 관심을 갖고 접근하려 하는 경우, 우선 그 엄청난 분량에 질려버리고 그 다음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를 몰라 당황하게 된다. 쉽게 접할 수 있는 책들은 대개 단편적인 수필정도에 그치고 있어 진리를 갈망하는 젊은이들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며, 그밖의 좀 깊이있는 책들은 대개 낯선 용어들 때문에 몇장 못 넘기고 제풀에 지치게 만든다. 일반인들이 교리에 접하기 위한 교재 정리가 거의 안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현실 문제는 너무 가까이 있고 불교의 진리는 너무도 멀리 있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다른 해결책을 찾기 위해 발길을 돌리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세째, 어떤 스님네들은 ‘이론이 무슨 소용이냐, 실천이 중요하지’ 라며 마치 교학(敎學)은 말싸움에 불과하고 선(禪)만이 실천이라는 듯이 말씀들 하고 계시는데, 이런 스님들의 말만 어설프게 익힌 어떤 불교인들은 ‘어차피 세상은 공(空)할 뿐이네’ 라며 마치 초탈한 세계에 사는 이방인처럼 공(空)이라는 이름의 허황된 세계만을 읊조리고 있다. 이런 얘기들만 듣다보면 불교는 나의 현실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다른 세계의 이야기로만 생각되
어 그나마 공부 시작할 엄두도 못내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러나, 내가 불교를 (조금이나마) 공부해서 알게 된 바에 의하면, 공(空)이란 곧 연기(緣起)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 연기란 공허한 다른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대상물들을 그 자체로서가 아닌 타(他)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으로 아주 구체적인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불교가 다음과 같은 모습이기를 바란다.
뭔지 모르게 내면 깊숙한 데에서부터 올라오는 불안감과 답답함에 이유없는 반항을 꾀하게 되는 십대들에게는 그 답답함을 해소시켜 줄 ‘한모금의 물’이, 그리고 산다는건 무엇인가, 나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잘사는 것인가 하며 고민하다가 실존주의에 빠져 생을 엄청난 부담으로만 느끼며 힘겹게 살아가는 어느 내성적 젊은이에게는 ‘그 짐을 덜어줄 수 있는 굳센 철학’이, 그리고 엄청난 모순 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는 사회 속에서 고민하며 그 해결책을 갈망하는 청년에게는 ‘그 해결책을 제시해줄 수 있는 밝은빛’이 각각 되어주었으면 한다.
또, 자기가 무얼 하고 있는지조차 생각할 사이도 없이 너무도 바쁘게 직장생활을 하다가 자신을 그 회사의 한 부속품으로밖에는 여길 수 없음에 비애하게 되는 직장인에게는 ‘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는 스승’으로서, 또 자녀 문제로 남편 문제로 고민하는 아주머니한테는 그 아주머니대로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뒤늦은(? ) 자아 성찰을 꾀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께는 또 그 나름대로의 해답을 제시해주는 불교가 다가와 주었으면 한다.
불교가 아무리 심오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고 또 2,000 여년 동안 훌륭한 많은 사람들의 업적을 토대로 발전해 왔다고하더라도, 지금우리 시대 우리 문제에 빛이 되어주지 못한다면, 또 우리 시대 불교인 중에 설득력 있는 말 한마디 해주는 사람이 있지 못하다면, 그 앞선 업적들이다 무슨 소용이랴?
불교도 우리 시대의 우리 언어로 대응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학 연구가 더욱 활성화되어야할 것이다. 물 밀듯이 밀려들어와서 이땅의 주류를 차지하게 된 서양식 사고방식에도 불교는 나름대로 적극적 대응자세를 보여주었으면 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는 얘기지만 불교가 무협지나 공상 영화에서나 상상될 법한 허황된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내가 살고있는 삶의 현장에서 부딪치는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있는 모습으로 좀더 많은 사람들이 실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