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지여, 저 고행자는 자기도 살생하지 않고 남을 시켜 살생하지도 않으며, 자기도 도둑질하지 않고 남을 시켜 도둑질하게 하지도 않으며, 자기도 싸움하지 않고 남을 시켜 하게 하지도 않으며, 자기도 거짓말하지 않고 남을 시켜 하게 하지도 않는다. 그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세계에 두루 차고 다른 세계에도 또한 그렇게 되어 사랑하는 마음은 넓고 커, 둘도 없고 한량도 없고 원한을 맺는 일도 없어 세간에 두루 찬다. 슬퍼하는 마음, 기뻐하는 마음, 버리는 마음도 또한 그러하다.
이 법 가운데 또 훌륭한 것이 있다. 나는 항상 사문들이 보리(菩提)를 잘 말하여 능히 스스로 조복하고 남을 조복 시키며, 스스로 지식(止息)을 얻고 남을 지식시키며, 스스로 저쪽 언덕에 건너가고 남을 건너가게 하며, 스스로 해탈을 얻어 남을 해탈하게 하며, 스스로 멸도를 얻고 남을 멸도시키게 한다.
이와 같이 보리를 얻고 중생을 피안(彼岸)에 인도하는 것이 해탈의 길이라 하였다.
사람이란 생각이 미숙하면 행동도 무용하여 한 평생을 다 살고나도 남기는 일이 없게 된다. 삶을 덧없게 여기는 사변이나 희론은 살고는 있으면서도 삶의 본질에 참으로 참여하지는 못하는 것도 여기에 근거를 둔 것이라 하겠다.
생각하는 일에서 행하는 일 사이에도 적지 않은 거리가 있다. 사는 일이 어렵다고 따지기만 한다고 해서 지혜로울 것이 없다.
지금 세대에선 사람다운 긍지가 아쉽게 생각된다. 현대인은 인간 됨됨이의 격조가 선명하지 못하고 거의가 다분히 규격화된 듯한 인상이다. 일상생활의 세사에 시달리다 보니 기계의 부품처럼 쓰임을 당한 듯도 하여 동정이 가기도 한다. 그러나 예속과 굴종에 꿀을 핥듯이 달가와하는 현상은 인간으로서 치욕이 아닐 수 없다. 허우대는 어지간하나 속은 유약하고, 외곽은 유지되고 있으나 그 허실의 정도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외형의 안정에 급급하여 내면은 황무지처럼 거칠고 건조하게 병들어 있는 이가 많다.
스스로 가책이나 고독의 엄습을 끔찍하게 무서워한다. 그래서 저 범지들처럼 스스로 속셈하여 고행하는 것은 마땅히 공양과 공경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게 된다. 이것은 큰 허물이며 때(垢)다. 수행자는 집착이 굳어져 애착하고 물들어 버릴 줄 모르게 되므로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날 길을 모른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속에서도 남의 정의(正義)를 듣고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자기 허물을 보지 못하며 생사를 벗어나는 길을 모른다. 사랑 때문에 우는 이를 오만한 경멸로 비웃을 수 있음
을 만족스러워한다. 상도덕을 등지고도 얼마든지 붐비는 상가며, 이웃 사이의 몰이해, 혈연 사이의 반목, 남편과 아내의 이른바 동상이몽.
스스로 자기의 착함을 칭찬하고 남을 헐뜯고 비방한다. 또한 게으르고 잊기를 잘하여 고독 속에서 선정을 익히지 않고 지혜가 없어 뽐내고 교만하며 아는 체한다. 신의가 없고 또한 반성도 없다.
그러므로 깨끗한 계나 윤리 도덕을 지키지 않고 부지런히 힘써 남의 가르침을 받을 줄 모르며 항상 원한을 품고 교활과 거짓을 부리며 자기의 소견을 믿고 남의 장단(長短)을 찾으며 항상 삿된 소견을 품고 자기 합리화만을 추구한다.
삶은 마냥 무엇인가를 찾는 과정이다.
사람이 사람을 찾아 택하고 그게 아니었다고 다시 이 선택을 포기할 수 있는 그런 권리가 마냥 주어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찾고 있는 것과 찾아낸 것과의 사이에 적지 않는 거리를 인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찾던 건 이게 아니라고 부정하면서 손에 있는 것을 버리고 쉽사리 새것을 맞으려 한다. 이것은 원래 믿었던 기준에서 잘못됨으로써 부재의 관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상실과 부재를 탓하며 기다릴 줄을 모르고 고독 속에서 진실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생각하는 일, 찾는 과정에서 더 신중하고 더 진실함으로써 행하는 일과 찾아낸 것들에 더 충성하고 조금은 지속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올바른 생각으로 갈망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기다린다면 마침내 성취한 것도 한결 아끼고 보존하며 감사한 생각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긴 겨울을 지내는 나무들은 고요하다. 침묵하며 견디는 자의 모습은 오히려 경건하다. 수은주가 영하의 강추위에서, 눈과 얼음으로 덮인 포장을 둘러친 속에서도 벗은 맨몸을 드러내고 떨고 섰던 나무들이 있다. 산과 벌판에, 또는 도시의 가로수, 정원수 등 어떠한 나무들도 유달리 굳게 서서 눈발을 몰고온 삭풍이 긋고 지나가는 아픔을 참고 견디는 침묵.
별빛 쏟아져내리는 한밤에도 침묵 속에 수많은 축복을 묵언으로 꿈결처럼 받아들이는 나무를 바라본다. 강철처럼 꼿꼿이 서서 겨울을 나는 동안 그 몇이나 가지가 부러져도 땅밑의 뿌리는 생명력의 순환을 끊이지 않고 첫봄 햇빛이 따사로울 그 때를 기다린다.
이제 나무의 살갗에 아픈 절상(切傷)을 헤집던 바람이 메마른 속마음을 훈훈하게 축여주고자 더운 손길을 어루만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생명의 저력이 강건하기는 마치 불의 당근질에 단련된 보배 칼처럼 미래의 나무에 열매를 맺어 생명력의 전승으로 영원하여지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마음 깊숙한 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막연한 느낌을 알아차릴 때가 있다. 마치 현실이 아닌, 꿈속에서처럼 어렴풋한 풍경을 본 것 같기도 하다. 바람이 일거나 파도가 치기도 하고 몹시 줍거나 적막해지기도 하고 까닭없이 힘이 빠져 허탈해지고 또 무섭게 조용해지기도 한다.
이런 때가 본래 우리의 밑바닥에 있는 존재에 접근해가게 되는 때이다. 마치 오래 굶주린 때 간절히 음식을 갈구하듯이, 목마를 때 물을 생각하듯이, 오랫동안 진실로 사랑을 갈구할 때처럼, 창호지 저편에 새벽이 밝아오듯이, 달빛에 눈을 뜨고 누군가의 음성을 들은 때처럼 순수한 자아를 면대하는 계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면대는 언제나 고요하고 고독하며 침묵하는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부처는 산림에 혼자 있으면서 한적한 곳을 좋아한다. 시끄러운 것을 즐기어 쓸데없는 일을 떠들면서 날을 보내는 것과는 달리 능히 스스로를 항복받고 해탈을 얻게 되는 것과 같다.
우리들의 하루를 돌아 보면 모든 만남들의 홍수다. 뒤엉킨 실타래의 관계처럼 뒤바뀌어 놓였다. 이러한 속에서 가슴을 펴고 편한 자세로 쉬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고독 속에 나의 참 모습이 드러나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의 마음이 외출에서 돌아온 뒤 오늘의 삶의 끝에서 분을 열고 방안에 들어설 때처럼 포근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참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요함을, 한적함을 사랑할 일이다. 본리를 증득하는 성패의 여부는 마음이 한가롭고 고독의 성숙 여부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이 마음은 무엇인가?
생명은 골수나 중추 또는 오장의 어디에도 그 실재가 없다. 그러한 마음을 어떻게 풀이하고 자신 안에서 어떻게 실감있게 체험할 것인가? 그것의 답이 오계와 십선 그리고 사무량심을 정수(淨修)하는 것이라고 이 산타나경은 설하고 있다.
수행자는 언제나 마음을 거론하는 일이 빈번하다. 그러나 고독 속에 찬바람 맞으며 서서 기다리던 나무가 햇빛이며 대지의 양분이 스며들어 감미롭고 유순한 잎과 꽃을 피우고 달디단 열매를 맺듯이 기다림 뒤의 만남이 얼마나 예사일인가를 알게 될 때 부처님에 대한 믿음도 한결 굳어지리라 본다.
참으로 가장 고독하고 가장 겸허한 마음일 때 삶의 원리며 인간의 실재를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