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교학-승가 교육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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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 황보윤
1988년 03월 73호
불교를 각(覺)의 종교라 한다. 이러한 각(覺)의 내용을 전해 오는 모습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수행을 통하여 체험한 내용을 전하는 선불교(禪佛敎)이고 또 하나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교설(敎說)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그 계율을 통하여 각의 내용을 체득하여 전하는 것이 교불교(敎佛敎)이다.
오늘 우리의 교불교에 대하여 논란이 잦은 것은 그 실상에 문제가 있음을 대변하는 것이되, 그 문제의 많은 부분이 교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승가 교육의 부실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오늘의 승가교육의 현실에 대하여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소리가 많이 일고 있다. 그것은 불교 교단의 자체적인 요구와, 역사의 삶들(衆生)의 생활 현장에서 나오는 사회적인 요구와, 교육을 받은 학인들이 삶에 대한 물음에 온전한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학인과 교직자 스스로의 자각 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인 것이다.
그러면, 먼저, 불교 교단은 어떤 문제를 말하고 있는가. 오늘날 한국불교의 전반적인 성격은 선(禪)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승가 교육에 대하여, 일차적으로는, 인간이 가지는 근본 문제들인 생(生 : 고통), 노(老 : 두려움), 병(病:불안함), 사(死 : 공포)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선 수행인의 사상과 행위(계율)를 돈독하게 기르는 예비 단계로 보고서 선 수행자의 자질 향상을 으뜸가는 목표로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반면에, 대사회적인 기능 면에서 없어서는 안될 고등 수행인의 배출에 대한 요구가 또한 절실함을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의 불교는 교육에 방향에 대해서 갈등을 겪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사회는 어떠한가, 오늘 우리가 처한 사회는 실로 크고 깊은 많은 문제와 상처를 안고 있다. 온 인류에게 문제가 되고 있는 동-서의 냉전과 그에 따른 핵무기의 대치, 서구 자본주의의 물질 중심 사상이 빚어내는 수많은 사회, 윤리 문제들이 있고, 한반도 안에는 한민족의 역사적 요청인 통일 문제를 위시하여 부의 균등한 분배 문제,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되찾기 위한 민주화 및 민족자주화의 문제, 그에 따른 학생들의 시위, 전통 사상의 붕괴에서 오는 가치관의 혼란과 제도적인 공업화에서 오는 인간 소외의 문제들, 그리고 생태계의 파괴 들과 같은 실로 다양하고 엄청난 문제들을 떠안고 있다. 사회는 이들 수많은 문제에 대해 응답해 줄 확고한 사상과 실천의지를 겸비한 종교인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종교인으로 커야 하고 또 키워내야 하는 오늘의 불교의 승가 교육은 또 어떠한가. 저마다 개인적인 문제를 가지고 출가한 학인들은 자신의 문제 해결과 또 수행인으로서 갖추어야 하고 이해해야 할 확실한 부처님의 사상과 계율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을 요구하는데, 그런 요구를 수용할 만한 내실있는 교육을 이룰 수 있는 여건의 조성을 학인과 교직자들이 다같이 소리높여 요구하면서 미비한 승가 교육의 실태를 지적하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이러한 복합적인 요구를 제대로 포용할 수 없는 현 체제속에서, 그나마 단계적으로라도 그것을 해결해 보겠다는 승가대학들의 의지의 몸부림은 실로 눈물겨운 일이다.
교단이 종교적 의미의 문제라면, 사회는 현실적 사실 문제로 볼 수 있다. 그에 따라 오늘의 승가 교육의 모습은 두갈래의 양상을 보이고 있으나, 동국대학이나 중앙승가대학처럼 사회적 요구에 응답하려는 지적 성장 중심의 교육 경향과, 전통적 요구에 응답하려는 수행 중심의 교육 경향이다.
사회적인 현실 요구에 지나치게 참여하면 의미의 문제에 소홀해지고, 의미 문제에만 매달리다 보면 사실 문제에 답할 능력을 갖지 못한다. 어떤 것이든 그러한 극단적인 자세는 한쪽 신발을 잃어버린 느낌을 준다. 따라서, 이 양자의 상호 결핍의 요소를 인정할 때, 오늘의 승가 교육은 양자의 결핍을 채울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측면에서 위치를 설정해야지 어느 한쪽 신발만의 크기를 강조하여 교육을 행할 수는 없다는 당위성을 끄집어내게 된다. 아직 승가 교육의 이상적인 수행인 상(像)이 정립되어 있지 못한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느 한편으로 치우친 편협한 수행인을 길러낼 수도 없음이다.
그러면, 이러한 복합적인 요구를 수용할 만한 교육의 이상적인 수행인 상은 무엇이겠는가? 먼저 부처님의 사상과 행위〔戒律〕에 대하여 가장 완벽하고도 올바른 이해를 갖추고 그 행위를 습득하도록 해야 한다. 그 다음에 부처님의 사상의 실제 현장인 현실 사회를 알고, 그 사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꿰뚫어볼 수 있는 총체적인 역사의식을 갖추도록해야 한다. 그리고 아울러서 부처님의 사장과 역사의식에서 그것이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 진보냐 퇴보냐의 문제에서 떠나 정(正)인가 사(邪)인가를 가릴 줄 아는, 정사(正邪)에 대한 자기 사상이 정립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수행인이라야 개인 문제, 사회 문제, 인류문제에서 원인과 과정과 결과의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로 모아, 자기의 끝없는 정화와 개혁의 수행을 통하여, 무아(無我)의 주체자로서 실천인 - 곧, 상구보리 하화중생하는 보살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일전에 해인 승가대학에서 열린 전국 승가대학 교직자 세미나에서, 승가 교육에 대한 전반적인 토의를 기대하면서, 한 사람의 일원으로서 관심있게 지켜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세미나에서 토의된 내용은 제쳐놓더라도, 참으로 서글픈 느낌이 드는 것은, 다름 아니라, 18개 승가대학에서 부처님 사장의 한 축을 지탱하는 수행인으로서의 교직자가 불과 50명도 채 안 된다는 양적 빈곤이었다. 현직에 있지 않은 분과 재가학자들을 다 합하면 적은 수효는 아닐 터이지만, 그러나 출가하여 종교적 체험과 실질적인 수행이 축적된 수행의 교직자와, 세속의 생활을 영위하면서 불교를 학문이나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재가교직자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음을 인정할 때, 수행인으로서 교직자의 빈곤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교의 교육이란 실질적인 수행의 축적과 체험 그리고 끊임없는 정진이 바로 생명력이라고 할 때의 수행의 교직인이 그리운 것이다. 그렇다 해서 현실 안주의 늪에 빠져서 분산된 능력으로 교육할 수만은 없다. 이제 전국의 승가대학은 서로 통일된 에너지를 농축시켜, 오늘날 승가 교육의 부재 현상을 극복하고 당면한 문제들을 공동으로 대처해나가야 할 때인 것이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전국의 승가교직자 회의는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본다.
오늘의 참담한(?) 승가 교육의 당면사안에 대하여, 주체인으로서, 끊임없는 토론과 비판을 통하여 참회하고 발원하는 정신으로 정진하지 않는다면 살아 있는 부처님의 사상을 사장시키거나 연구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거나 교학의 존재 의미마저 상실한다는 위기 의식에서, 승가 교육에 대하여 몇 가지 제안을 해보고자 한다.
첫째로, 교학이 더 이상 선의 보조 단계로서가 아닌 독자적인 자기 노선을 확립하고 그 노선을 지탱할 수 있는 고등교직 수행자의 배출이 우선되어야겠다.
둘째로, 학인들의 확보가 시급하다. 총무원 ‘87년 자료에 따르면, 동국대학 74명, 중앙 승가대학 153명, 전통 강원 806명으로 총 1,033명이 현재 교육받고 있다 한다. 그러나 4년 동안에 수계(受戒)받은 비율은 그것에 훨씬 못 미친다. 이러한 사실은, 비록 교육이 개인의 선택이긴 하나, 교단의 질적 저하를 고려하여, 수계자의 자질에 따라 교단은 승가교육을 의무화함으로써 학인의 확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해 주어야 할 필요성을 촉구할 것이라 하겠다. 교직인의 배출을 질적 확보라면 학인들의 확보는 양적이라 하겠다.
세째로, 승가 교육을 할 수 있는 시설의 확보다. 동국대학을 제외한 승가대학은 비구 12개 대학, 비구니 6개 대학인데, 과연 고등 수행인을 길러낼 수 있는 교육 여건이 마련되어 있는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사찰 유지의 명분으로 개설된 대학은 자진 폐원하고, 수행과 교육시설을 갖출 수 있는 대학으로 비구 6개, 비구니 4개 정도면 어떨까 싶다.
네째는 가장 중요한 문제로서 교과 내용의 문제이다. 교과 내용은 먼저 어떠한 상(像)으로 키워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선결되어야 하지만, 종교 교육이라 해서 경(經), 율(律), 론(論)만 주장하여 교설의 획일화나 이론의 고착화로 말미암아서, 살아 있는 인간 문제를 다루는 종교가 스스로 영역을 축소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각 대학의 특성적인 내용을 선정하여 부처님 제자로서 사고의 자유와 행위의 다양성을 통해 개인과 사회와 인류의 문제를 부처님의 체험적 사상과 행위의 헌신적인 삶을 통해 시현(示顯)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개인사를 넘어 전체사로, 전체사에서 개인사로 다시 넘나들수있는 원융무애한 자유인이며 회향인(回向A)이며 해탈인(解脫人)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부분 구조가 아닌 전체 구조로서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여야 하는 살아 있는 수행인을 길러내기 위하여 편협과 아집에 빠져 자기도취에 빠져 있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세계는 인간들의 세계이지 불교세계만인 것은 아니다. 이 세계를 받아들여 적응해야 하는 주어진 고(苦)의 세계가아닌 고(苦)를 극복할 수 있는 무상의 세계로 본다면, 무상(無常 : 흐름)을 주도할 수 있는 무아적인 헌신자를 불교는 희구하고 있음이다.
교직인의 배출과 정착된 의무교육, 완벽한 교육 체제, 다양하게 살아 있는 교과 내용, 올바른 교육이념만 정돈된다면, 한국 승가 교육과 불교의 미래에 대해 신도나 교단이나 사회는 희망을 걸어도 좋다. 우리 문제는 우리가 푼다는 당위적 사고로 문제를 푸는 방법에서 파괴는 창조가 아닌 대립일 뿐이다. 전통의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변화하는 현실의 요구를 수용하는 공존의 테두리 안에서 내적 요구와 외적요구가 맞아 떨어진다면 변화와 개혁은 필연적인 결과이다.
이제 해재가 오면 해인대학의 졸업생들은 떠난다. 젊은 사자후(獅子吼)를 토할 약속된 땅도 없거니와 버려야 할 대지도 없다. 오늘의 불교의 척박한 풍토를 굳이 말하지 말자. 바로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막힘이 없는 나감에 그것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해인 골짜기도 겨울 가뭄에 목이 마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