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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인물 열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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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88년 03월 73호
이 글을 쓰기 전에 흔히 전통적으로 인도인의 사고가 다분히 비역사적이라고 하듯이 스님들의 사고 또한 비역사적이다. 따라서 불교사, 특히, 인물을 중심으로 한불교사를 살핀다는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우선 자료의 절대적인 빈곤과 역사적 사실이 너무나 빈약하다는 정이다. 그런 점에서 자서전 따위를 남긴 서양 사람들의 적극적 자세가 부러워지기도 하고 일찌기 역사서와 열전을 남긴 중국인들의 부지런함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러나 뜬구름처럼 무소유(無所有)를 근본으로 하여 살았던 스님들의 행적을 살핀다는 것은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군더더기밖에 되지 않거나 있지도 않은 뱀의 다리를 그리는 것만큼이나 구차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옛스님네들의 삶이 그렇듯 표일하였던 만큼, 모든 명리를 버리고 출가한 스님들에게는 덧없는 시간 속에다 이름을 남긴다거나 풀끝에 이슬방울만큼이나 허망한 삶의 편린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 자체가 퍽이나 세속적인 일이라고 느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듯 불투명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가. 그것은 역사학이 단순한 호고(好古) 취미에서 비롯되거나 옛것에 대한 단순한 고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일을 응시하고 새로운 역사적 지평을 가늠해보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이다. 다만 글을 써 가는 동안에 선인들의 순은처럼 순결한 영혼에다 더러운 탁수를 보태는 꼴이 되지 않을까 싶어 저으기 염려스러울 뿐이다. 한국 화엄철학의 여명기-순응(順應)스님과 이정(理貞)스님 역사의 물줄기를 거슬러올라가 해인사의 창건에 대한 모습을 더듬어보면, 해동 화엄불교의 초조(初祖)의 상대사(625-702)와 만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해인사의 창건은 신라시대 그 도도한 화엄종의 정신적 기반의 확충과 선양이라는 기치 아래 이른바 신라 화엄 십찰(十刹)의 하나로 세워진 절이며, 이 절을 창건한 순응스님과 이정스님이 또한 의상 대사의 법손이기 때문이다. 화엄사상으로 시작되는 해인사의 역사적 맥락을 알려면, 신라 화엄사상의 정신이 무엇이며 의상대사에서 순응, 이정스님에 이르는 역사적 공간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화엄경의 본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고 산스크리트어 이름은 Buddharatamsaka-mahavaipulya•Stura인데 흔히 줄여서 Avatamsaka Stura라고 한다.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화엄경은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들은 곧 불타발타라(Buddhabhadra, 359-429)의 번역본인 60권본 화엄경과 실차란타(實叉難陀)가 번역한 80권본 화엄경 그리고 반야(般若)가 번역한 40권본 화엄경이다. 60권 화엄경은 34품, 80권 화엄경은 39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내용이 서로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40권 화엄경은 앞의 두 역본의 마지막 장(章)인 입법계품(入法界品)에만 해당하는 것이어서 화엄경의 완역본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위에 알려진 화엄경들은 처음부터 통합된 체제를 갖춘 것은 아니고 각 품(品)이 사실은 각각 독립된 것으로 따로이 성립되었던 것을 나중에 집대성한 것으로, 그 시기는 약 4세기 무렵이었으며 장소는 중앙아시아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이다. 그런데, 대체로 이 경이 인도에서 성립되어 중국에 전해진 것은 동진시대의 인도승 불타발타라의 화엄경의 역출(譯出)에 의해서이지만, 화엄종이 성립된 것은 그때에 이미 중국 북부 지방에서 왕성하게 발달했던 지론종(地論宗)이나 섭론종(攝論宗)의 학설과 또 당나라 초기에 현장(玄獎)법사가 전한 유식불교(唯識佛敎)의 자극에 의해서이다. 중국 최초의 화엄경 연구서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동진의 도업(道業)이 쓴 화엄지귀(華嚴旨歸) 2권이 있다. 도업의 뒤를 이어 남북조시대에는 보리유지(菩提流支)가 ‘동토(東土)의 보살’이라고 칭했던 담무초(曇無最)를 비롯하여 많은 화엄 연구가들이 있었으며, 그리하여 차츰 화엄종이라는 종파를 이루는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그뒤 두순(杜順, 557~640)과 지엄(智儼, 602-668)에 이르러 화엄종은 성립되는데, 의상대사는 지엄화상의 문화에서 7년 동안 공부하다 스승이 입적하자 671년에 신라로 돌아와 해동 화엄종의 개조가 되었던 것이다. 그 뒤로 화엄종은 중국 대륙과 신라에서 사상사적으로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쳤고, 불교사상 가운데에서도 가장 큰 골격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나라 안팎으로 어지러운 사회의 제현상을 한 곳으로 결집하고 흩어진 민심을 원융무애하게 만든 사상적 지반을 이루었다. 그런 화엄종은 자연히 국가의 지도 이념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으니, 화엄종의 본사라 할 수 있는 부석사가 문무왕의 명으로 지어지고 해인사의 창건도 왕실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음이 그를 시사해 준다. 「삼국유사」의 의상전교(義湘傳敎) 조에 의하면, 의상대사 가급히 서둘러 신라 땅으로 돌아오게 된 까닭은 장차 크게 군사를 일으킨 당의 고종이 신라를 침략하려 하기에 그 무렵 당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던 김 인문, 양국 등이 의상에게 몰래 먼저 돌아갈 것을 권유해서이다. 그래서 이러한 국가적인 위기 의식과 함께 화엄종의 선양이라는 개인적인 발원을 갖고 있던 의상은 서둘러 귀국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 48세 되던 해(671년)였다. 의상이 신라에 돌아와 화엄종의 근본 도량인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종을 선양하기까지에는, 그 당시 문무왕이 불교에 귀의하였다고는 해도,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 제자를 양성하는 일에 매진하니, 삼국유사에 기록된 그의 고제(高弟)만도 열명에 이르렀다. 곧 오진(悟眞), 지통(智通), 표훈(表訓), 진정(眞定),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원(良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 들이며,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스님은 상원대사의 제자인 신림(神琳)대덕의 제자이고 이정스님은 순응스님의 제자이다. 화염 십찰(十刹)의 하나인 해인사의 창건 연대는 서기 802년으로,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한 때(676년)보다 125년이 뒤졌으며 그때가 순응스님의 만년에 해당됨을 해인사의 고기(古記)는 전하고 있다. 신림대덕의 제자인 순응스님은 그 무렵의 고승들이 다 그러했듯이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때가 신라 36대 혜공왕 2년(766년)이었는데, 이 시기를 즈음하여 신라는 정치적으로 상당한 혼란을 겪었으니, 그때로부터 해인사가 창건되던 해까지의 36년 동안에 임금이 4대가 바뀌었다. 특히 해인사가 창건되던 802년은 제39대 애장왕이 불과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지 2년이 지난 때이다. 누구의 저술인지 확실하지 않은 가야산 해인사 고적(伽倻山海印寺古籍)이라는 책에는 애장왕 왕후의 병에 대한 설화가 나오고, 또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의 중국 유학 때에 그때 이미 250년 전에 죽은 지공(誌公)화상이 그의 무덤에서 주었다는 답산기(踏山記)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사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인 듯 싶은 것이, 삼국사기에 따르면 애장왕 3년에 아손 김 주벽의 딸을 후궁으로 삼았고 애장왕 6년에 왕비 박씨를 맞아들였다고 하므로 애장왕 2년에 왕후의 병을 두 스님이 고쳤다는 것은 사실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다만 그때에 불심이 깊었던 애장왕의 할머니 생목태후가 해인사 창건의 대시주였다는, 최치원이 쓴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新羅伽倻山海印寺善安住院壁記)의 기록이 비교적 믿을 만한 자료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살펴 알 수 있는 것은 적어도 화엄종은 신라 불교 사상을 대표할 만큼 두드러진 학문적 토양을 다졌을 뿔만 아니라, 의상을 비롯한 기라성 같은 학숭을 배출하였으며 아울러 왕실과도 관계가 깊어서 정치에서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 사이에 살며 화엄 불교의 학문적 계승을 도모한 희랑스님의 행적으로 일련의 연관 속에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