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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월인사 주지 혜관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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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정영 2011년 11월 357호

대구 시내를 벗어나니 가을빛이 완연한 산과 너른 들판 사이로 나들이 나온 이들이 맑은 숨을 내쉬며 오후를 즐기고 있다. 한가롭고 다감한 풍경이다. 그 풍경 속으로 한참을 따라 들어가니 비슬산 아래 보일듯 말듯 월인사가 자리 잡고 있고 절 마당엔 혜관 스님이 마중을 나와 계시다. 감나무마다 감이 주렁주렁 열렸고 장독대엔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았고 마당의 흰 개와 스님이 밥을 챙겨 준다는 아홉 마리의 고양이들은 모두 시름 한 자락 없이 낮잠에 빠져 열반 중이시다. 누가 보면 초라한 법당이라 할지 모르지만 겉치레의 붓질 한 점 없는 손바닥 만한 법당도 이 풍경 속에선 거분하다.
“10년 전에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땐 개금도 안 된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 단청도 없는 허름한 촌집이었어요.”
혜관스님은 해인사 지족암에서 15년 동안 일타스님을 시봉하다가 스님이 돌아가신 후 이 작은 시골마을에 터를 잡았다. 길이 닦이지 않아 농로를 따라 들어와야만 하는 곳, 모두가 문을 닫고 떠나 폐사되어 속인이 관리하던 곳이다. 터를 찾다가 우연히 들른 곳이었는데 처음엔 너무 허름해서 엄두도 못 내고 삼배만 하고 뒤돌아섰던 곳이다. 몸이 좋지 않아 선방에도 갈 수 없었고 돈이 많지 않아 좋은 터를 알아볼 수도 없었던 스님과 어떤 인연이었는지 스님은 다시 이곳을 찾게 됐고 그때부터 손수 뜯어내고 수리하기 시작했다. 뜯어내는 것만으로 얼추 모양새를 갖추고는 혜국스님께 월인사라는 절 이름을 받았다. 그리고 혜국스님을 모셔 봉불식을 했는데 이 작은 절에 400여명이 모였다.
“봉불식이 끝나고 인사를 하려고 앞에 서는 순간 눈물이 확 쏟아졌어요. 그동안 스님 모시던 것, 여기까지 온 길들이 떠오르면서 눈물이 줄줄 흘렀어요. 혜국스님이 봉불식 마치고 돌아가시면서 미안하다고 하시대요. 일타스님 상좌가 100여명이 넘는데 유일하게 스님을 15년간 모신 나를 끝까지 책임지지 못 해서 미안하다고. 인연이 다 돼서 나온 것이니 괜찮다고 했지요.”
초파일이 지나고 나서야 월인사 법당에 단청을 할 수 있었다. 자재 값만 들여 소박하게 했지만 단청을 하고나니 그나마 절 같았다. 현판도 처음에 컴퓨터에 있는 서체로 달아 놓은 것이 아직도 그대로 붙어 있다.
“신도들을 모으려고 자비도량 참법기도를 시작했어요. 법당은 비좁았지만 서른 명 정도가 함께 했지요. 그렇게 이 절을 지켜왔어요.”
스님은 어려서부터 몸이 아팠다. 보는 사람마다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했다. 병원에 가도 병명이 없다 하고 한의원에 가니 가뭄의 논바닥과 같은 몸이라서 아무리 좋은 약을 먹어도 스며들지 않는다고 했다. 집안의 종손이었으니 온갖 병원에도 다 가보고 굿도 해봤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의학으로는 어렵겠다며 산으로 가라고 했다. 그래서 스님은 고등학교를 어영부영 마치고 지인의 소개로 창녕 영축산의 작은 절로 들어갔다. 일흔이 넘은 노스님 한 분이 계신 절이었는데 하룻밤 자고 도망 와 버렸다. 그러나 또 다시 절로 보내졌고 그렇게 해서 스님은 그 작은 절을 왔다갔다 하며 기도도 하고 조상 천도제도 했다. 그곳에서 지내며 몸이 좀 수월해져 노스님을 도와 밭도 메고 나무도 하고 지게도 지고 행정도 봐주게 됐다.
“스님 심부름으로 통도사에 자주 갔는데, 중도 아닌 놈이 왜 절에 심부름을 오냐고 스님들이 자꾸만 머리 깎으라고 하셨어요. 난 종손이라 절대로 스님은 안 될 거라고 했지요. 그런데 절에서 지낸 게 그럭저럭 10년이 되던 어느 날 출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다 정리하고 해인사로 갔지요.”
막차를 타고 해인사에 가니 날은 캄캄하고 눈은 수북이 쌓여 다리가 푹푹 빠졌다. 문이 잠겨 있어서 문 밖에서 삼배를 했다. 그러고는 행자를 따라 들어가니 스님들이 몸이 약하다고 돌아가라고 했다.
“내가 창녕에 있는 절에 있을 때 신도들 모시고 해인사에 보살계를 받으러 간 적이 있어요. 그 때 스님 세 분이 앉아 계셨는데 한 분이 손가락이 없는 거야. 그 스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물었지요.”
그렇게 해서 단숨에 지족암에 올라갔다. 법당에 들어가 절을 하니 부처님께서 왜 이제 왔느냐고 하는 것 같았다. 스님은 눈물을 흘리며 절을 했다. 그렇게 지족암에 머문 지 사흘 째 되던 날, 일타스님을 만났다.
“새로운 행자냐며 이마를 딱 때리시고는 한번 살아봐라 하시대요.”
군불을 때고 소일을 하며 일주일 쯤 지나니 삭발을 했다. 머리를 깎으니 시원했다. 승복을 입고 일타스님 앞에 가서 삼배를 하니 또 머리를 한 대 때리시며 처음에 머리 깎아놓으면 도둑놈 같은데 너는 중상이구나 하셨다. 그러고는 팔만대장경 요지를 말씀하시고는 또 머리를 한 대 때리시며 잘 해봐라 하셨다. 머리를 깎고 사흘 째 되던 날, 도량석 시간에 원주가 안 일어나기에 스님은 창녕 절에서 하던 것처럼 도량석을 했다. 일타스님이 부르더니 시봉을 하라고 하셨다. 그렇게 일타스님 시봉 15년의 세월이 시작됐다.
“시봉 첫날 죽밥을 해버렸어요. 그런데 그 다음 날은 고두밥이 된 거예요. 그런데도 스님은 아무 말씀도 안 하셔요. 고두밥은 고들고들해서 좋고 죽밥은 물렁하니 좋다고 하셨지요. 빨래도 수행이라며 손수 하셨어요. 말년에 아프실 때만 내가 빼앗아서 해드렸지.”
행자생활 11개월쯤 됐을 때 일타스님이 법명을 지어주시며 상좌로 들이셨다. 그렇게 해서 계를 받고 지족암으로 돌아왔는데 원주가 지족암을 떠나고 없었다. 출타하셨던 일타스님이 돌아오셨기에 강원에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대중생활 하러 내려간다고 했더니 가사장삼을 벗으라고 하시대요. 그러더니 당신 탁자를 세 번 치시면서 혜관이를 지족암 원주로 임명한다 하셨어요. 그렇게 해서 계 받자마자 원주가 돼버렸어요. 결국 스님 밑에서 치문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스님 밑에서 공부하고 기도하며 시봉을 했지요.”
스님은 절에 들어온 지 30여 년 동안 만행 한번 해보지 못 했다. 송광사, 수덕사, 법주사 선방을 다녔지만 3년뿐이었다. 일타스님 시봉 15년, 그러고는 월인사에서 보낸 것이 스님 이력의 전부다.
“우리 스님 살아 계셨으면 난 월인사 주지도 못 했을 거예요. 중 벼슬은 닭 벼슬보다 못 하다고 하셨거든요. 그리고 항상 말씀하셨어요. 중은 도 닦으러 왔지 돈 벌러 온 것이 아니라고, 법 지키러 왔지 밥 먹으로 온 것이 아니라고.”
스님은 일타스님의 이 말씀을 늘 마음에 품고 산다. 월인사 10년의 세월도 그러했고 앞으로의 시간도 그렇게 지켜갈 것이다. 스님은 지금도 일타스님이 좋아하시던 음식을 보면 15년 동안의 하루하루가 다 생각이 난단다. 그러면서 일타스님이 사형선고와도 같은 의학계의 진단을 받고 미국으로 떠나시던 날 얘기를 꺼내놓으신다.
“떠나시기 전날 가사장삼 입고 절을 드렸더니 미안하다 하시대요. 너를 선사로 만들고 싶었는데 법사로 만들어놓았다면서요. 저는 스님 머리 깎아드리고 목욕시켜 드리면서 보고 듣고 배웠으니 후회 안 한다고 했지요.”
한국에서 입적하면 사람들이 모여들 것을 생각하신 스님은 일부러 미국으로 떠나시면서, 미국인들은 덩치가 좋아 좌선도 잘 하더라며 다음 생엔 미국인으로 태어나야 겠어서 미국으로 간다고 눙치셨다. 그러면서 스님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셨다.
“환생해서 올 테니 기다려라 하시대요. 해인사에 엎드려 있다가 20년 후에 스무 살 된 코쟁이 하나 왔다 하거든 내려오라고. 그래서 그 코쟁이가 스님인 줄 어떻게 아느냐 여쭈니 씩 웃거든 나인 줄 알고 귀 잡고 데려가 머리 깎여라 하시대요. 전생에 내가 널 시봉했고 금생에 네가 날 시봉했으니 다음 생엔 내가 널 시봉하겠다고, 그렇게 삼 세를 거쳐야 도반이 된다고 하시면서….”
일타스님은 미국에 계시며 스님에게 오라고 했지만 비자 받기가 어려워 가지는 못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부터 불안하더니 하와이에서 열반하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 순간 스님에겐 귀 잡고 머리 깎이라던 말씀만 빙빙 돌았다. 스님 사진을 방에 갖다 놓고 향 피우고 밤새 앉아 울었다. 은해사에서 영결식을 한다고 했지만 스님은 지족암에서 열반종을 쳤다.
“열반하신지 12년이 됐으니 이제 스님 오시기까지 8년 남았네요. 그 전에 해인사 가서 기다리고 있어야지요. 코쟁이가 와서 씩 웃거든 머리 깎여서 나도 이마를 딱 때리면서 몇 해 부려먹어야지요.”
스님은 그리움 가득한 웃음으로 일타스님과의 15년간의 이야기를 갈무리하신다. 12년이 지났음에도 어제 일처럼 기억하는 하루하루, 어제 잡았던 손처럼 체온이 느껴지는 사연들이 스님 안에 가득하니 그 그리움이 얼마 만큼인지를 알겠다.
“다음 생에 또 사람이 된다고 하면 난 또 스님이 되고 싶어요. 회향을 잘해야지요.”
스님이 붉어진 마음으로 가을 저녁 빛이 내려앉는 절 마당을 거니신다. 감나무도 한 번 올려다보고 먼 하늘도 한번 바라보신다. 그러더니 절 마당의 흰 개를 가슴에 안고 한참을 쓰다듬으신다. 이 갸륵한 풍경이 허공에 머문다. 그곳엔 웅장한 대웅전도 번듯한 가사장삼을 차려입은 스님도 없다. 그저 도 닦고 법 지키는 부처님의 제자 하나가 인적 드문 산 아래 살고 있을 뿐이다.